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10
10화
“이리 앉아라.”
“네.”
어머니 김영희 여사께서 빈 의자를 손으로 툭 치시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손을 씻고 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자신의 자리에는 잡곡밥이 고봉으로 한가득 담겨있다.
“오늘 메뉴는 김치찌개네요.”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하하하, 그렇죠. 감사합니다.”
마루는 국그릇에 김치찌개를 가득 담아주는 어머니를 향해 엄지를 척 폈다.
그 모습에 김영희 여사는 좋아 죽는다.
별거 아닌 아들의 칭찬이 저렇게 좋으실까?
그 모습에 막내 여동생 윤아가 입을 삐쭉거렸다.
“우리 엄마는 오빠들만 좋아해. 딸은 사람도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리니? 내가 서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김영희가 시집간 큰언니를 사랑한다는 말에 다시 윤아가 발끈했다.
“이제는 딸 차별까지 하시네?”
“이년아! 넌 차별받아도 싸! 장학금을 한 번 받아오길 하니? 아르바이트를 해서 스스로 용돈을 벌기를 하니? 걸핏하면 내 화장품이나 훔쳐 쓰고 만날 한다는 짓이 용돈 타령 아니면 명품 타령이잖아?”
“엄마! 다 큰 딸한테 자꾸 이년, 저년 하실 거예요?”
쫙!
“꺄악!”
“내 배 아파 낳은 내 딸년한테 내가 이년, 저년 좀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디?”
“아파요.”
“그럼 아프라고 때리지. 안 아프라고 때리겠어?”
김영희는 막내딸 윤아의 등짝을 단 한 방으로 응징하고 식사 시간을 평정했다.
그 모습에 아버지를 비롯한 이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애교와 아양이라는 필살기로 무장한 윤아!
집에서 언터처블이나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하도 예쁜 짓을 많이 해서 그런지 아버지를 비롯한 윤아의 오빠들은 유독 윤아에게 약했다.
그래서 조금만 울고 떼를 써도 쉽게 지갑이 열렸다.
그런 사실을 윤아는 여우처럼 간파해 잘도 이용해 먹었다.
하지만 그런 윤아에게도 천적은 존재했다.
윤아의 생각과 속을 뻔히 읽고 있는 김영희 여사가 바로 그 장본인 되시겠다.
“지금이 무슨 독재 시대도 아니고…….”
“너 자꾸 뭐라고 구시렁거리는 거야? 정말 오늘부터 화끈하게 용돈 끊어버려야 정신을 차리겠어?”
“아니요. 내가 뭐라 그랬나요? 오늘 찌개 참 맛있네. 아빠, 오빠들! 뭣들 하세요? 다들 열심히 먹자고요.”
윤아의 너스레에 모두 실소를 흘렸다.
김영희는 시집갈 나이가 다 된 막내딸의 철없는 짓에 단호하게 다시 응징을 할까 하다가 꾹 참았다.
하지만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윤아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진 않았다.
윤아는 급히 고개를 밥그릇에 처박고는 열심히 숟가락질을 했다.
마루는 매일 벌어지는 이런 소란한 일상이 싫지 않았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나름 최선을 다하시는 부모님!
각자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며 살아가는 형제자매들!
이들을 보면 끈끈한 가족의 정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빠! 요새 무슨 화장품 써?”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피부가 좋아졌어!”
윤아의 말에 마루는 순간 등골에 싸한 느낌이 들었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해진 얼굴.
어린아이처럼 뽀송뽀송해진 피부.
자신이 봐도 좀 너무했다 싶을 정도였다.
남자들이야 그런 것에 둔감하니 바로 캐치를 못한다.
그러나 지금 한창 자신의 미모에 관심이 많은 나이인 윤아의 눈길을 피하진 못했다.
“글쎄? 사우나를 다녀와서 그런 게 아닐까?”
“사우나? 흐음,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윤아는 사우나라는 말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새로운 이슈를 들고 나왔다.
“오빠! 그런데 키도 좀 커진 것 같아.”
“정말?”
“응. 그러고 보니 확실히 키가 커졌어.”
“하하하, 잘됐네. 이제 나 루저에서 벗어나는 거야?”
“설마 180센티미터도 더 된다는 말?”
“그럼 좋지 뭐. 안 그래?”
윤아가 계속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자 마루는 아예 대놓고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의혹에 젖은 반응을 보이던 식구들도 금세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설사 갑자기 마루의 신장이 더 커지고 피부가 좋아졌다고 해도, 다들 그냥 잘됐다고 생각을 하지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할 것이다.
“윤아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과일이나 좀 내와.”
“네.”
결국 어머니의 한마디에 마루에 대한 윤아의 청문회는 바로 종을 쳤다.
밥을 다 먹자 디저트로 과일이 나왔다.
흠집이 있어 팔기는 애매한 물건.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만 골라 접시에 예쁘게 담아냈다.
이 정도면 식후 디저트로는 최고였다.
취향대로 각자 좋아하는 커피나 차를 마셨다.
하루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나누는 시간!
마루의 가족 모두에게 귀하고 소중한 일과의 하나다.
기쁨은 함께하고 고통은 서로 나누는 가운데…….
가족공동체라는 개념이 절로 심어진다.
마루도 강남에 갔다가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가족들로부터 적지 않은 위로와 조언을 받는다.
하지만 해모수와 그렌 그리고 피라미드의 얘기는… 아직도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 얘기를 하려면 필연적으로 먼저 교통사고를 당해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과연 가족이라도 자신의 말을 믿어줄까?
혹시 정신병자 취급은 하지 않을까?
부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었다는 말을 하면 놀라서 쓰러지시지는 않을까?
여러 가지 갈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다.
‘파이럿 혜성으로 인해 인류가 멸종에 이를지 모른다고 말하면 분명히 어디 사이비 종교 단체에 빠진 줄 알겠지?’
역시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고민을 해봐야겠다.
큰형과 마루가 식탁을 정리했다.
어머니와 윤아가 설거지를 하고 아버지는 다시 슈퍼로 나가셨다.
재용이 들어와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마루는 자신만의 공간인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옥탑방에 들어오자 그렌이 조심스럽게 마루에게 물었다.
[그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마루: 뭔데요?] [그렌: 나한테 잠깐만 이 세상을 느낄 수 있게 마루의 몸을 움직일 권한을 줘!] [마루: 네에?]마루가 깜짝 놀라자 그렌이 오히려 당황해했다.
[그렌: 아, 아니 내 말은 마루의 육체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마나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마루: 마나를 느껴요?] [그렌: 비록 1서클의 견습 마법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난 마법사야. 만약 마루의 세상에 마나가 존재한다면 분명히 나의 지식이 큰 도움이 될 거야.] [해모수: 어차피 형의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잖아요? 나중에 형이나 나나 그렌 아저씨에게 빙의를 하면 그때 반대로 형도 시험을 해보세요.]마루는 살짝 고민이 됐다.
‘빙의한 상태에서 내 몸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없는지는 꼭 확인해 봐야 한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내가 그것을 막을 수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어느 쪽을 선택해도 결국 최소한 한 번 이상은 테스트를 해봐야 했다.
[마루: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렌: 아! 고마워!] [해모수: 고마워 형!]그렌과 해모수, 둘 다 마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마루: 그런데 누가 먼저 할 거예요?] [그렌: 내가 먼저 해볼게.] [해모수: 그래요. 그렇게 해요.]셋이 빠르게 합의를 하자 먼저 그렌이 바로 시험에 들어갔다.
[그렌: 먼저 오른팔을 들어볼게.] [마루: 네.] [그렌: 어? 되네?] [마루: 되네요.]마루는 자신의 오른팔이 위로 들리는 것을 보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신기하게도 그렌이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그렌이 자신의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 행동을 쉽게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루는 그렌과 해모수에게 이런 사실을 전해줬다.
[마루: 확실히 마음속으로 허락하지 않겠다고 생각을 하면 몸이 안 움직이네요.] [그렌: 정말 그렇군. 몇 번이나 시도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육체의 통제권은 빙의를 당한 당사자에게 있으니 이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야.] [해모수: 정말 그렇군요.]그렌과 해모수는 조금도 섭섭해하지 않았다.
둘 다 자신의 육체에 상대방이 빙의해 올, 반대의 경우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렌: 자, 이제 몸의 통제권을 잠시만 내려놓도록 해.] [마루: 네.] [그렌: 마나를 느끼려면 몇 분 걸릴 거야. 굳이 몸을 움직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침대에 앉아있도록 해.] [마루: 그러죠.]마루는 그렌의 조언대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
등을 벽에 기대고 편안하게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순간, 묘하게 온몸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루는 그냥 힘을 빼고 가만히 있었다.
[그렌: 이상하군. 마나가 거의 없어.] [마루: 얼마나 없는데 그러세요?] [그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기준으로 100의 마나가 있다면 여긴 1의 마나밖에는 존재하지 않아. 마나는 만물을 이루는 근간인데 이렇게 마나가 느껴지지 않다니…….]그렌의 말에 마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모수: 이번에는 내가 해볼게요.] [마루: 그래.] [그렌: 잠깐만 오러 사용이 가능한지 좀 살펴보고.]이번에는 해모수가 해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그렌은 잠시 시간을 더 달라고 하곤 마나에 이어 오러의 유무와 사용이 가능한지 확인했다.
[그렌: 잘하면 오러를 쓸 수도 있겠어. 하지만 역시 효율은 극악이군.] [마루: 다 됐으면 해모수에게도 기회를 줘보세요.] [그렌: 응, 좋아.]그렌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해모수가 마루의 몸을 움직여 봤다.
[해모수: 난 왼팔을 움직여 볼게요.] [마루: 그래.] [해모수: 역시 되는군요. 이것 참 신기하네요.]해모수가 참 천진하게 말했다.
마루는 자기 혼자 올라가는 왼팔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영혼이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게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모수: 난 끝났으니 이제 그 노트북이라는 것 좀 열어봐요.]해모수의 말에 마루는 자신의 노트북을 열었다.
[마루: 뭐 궁금한 거 있어?] [해모수: 당연히 앞으로의 역사가 궁금하죠. 형이 내 미래에 사는 사람인데 안 궁금하겠어요?] [마루: 하긴, 나라도 궁금하겠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게 뭐야?] [해모수: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요. 재물을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는지 알고 싶어요.] [마루: 앞으로 일어나는 일이야 역사책을 보여주면 될 것이고……. 재물을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은 나도 잘 모르겠다. 금광이나 하나 찾아줄까?] [해모수: 정말요?]해모수의 목소리가 후끈 달아올랐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금광 하나만 잘 찾아서 개발해도 해모수는 아마 엄청난 재물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해모수가 관심을 보이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마루는 인터넷을 검색했다.
[마루: 이게 좋겠다. 복건성(福建省) 천주시(泉州市) 덕화현(德化懸) 자금산(紫金山)에서 천만 톤급 대형 황금 광상(鑛床) 발견, 황금과 구리가 혼재한 노천 광산으로 황금 함량이 최소 25만 톤 이상이다.] [해모수: 25만 톤이라면 어느 정도나 돼요?] [마루: 으음, 어디 보자. 쉽게 설명하면 성인 여자의 몸무게를 대략 50킬로그램으로 잡고 두 명이면 100킬로그램, 스무 명이면 1,000킬로그램이 되니까 1톤. 25만 톤이면 약 500만 명의 몸무게가 되나?] [해모수: 네? 여자 500만 명의 몸무게에 해당하는 금이라고요?] [마루: 뭐 대충 그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네.]해모수는 마루의 말에 그만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마루와 그렌은 해모수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대충 그의 상태를 짐작하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리 엄청난 금광을 발견해도 실제로 개발하려면 그만한 권력이나 무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해 줘야 가능한 법이다.
왕족이나 조정의 실권자의 지원 없이 금광을 개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아직 그런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해모수!
아마 지금쯤 황금으로 된 집과 정원을 생각하며 상상 속을 노닐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지금 해모수는 생전 처음으로 세상이 온통 황금빛으로 가득한 환상(幻像)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 * *
“에구머니나, 이게 누구야?”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해모수도 그 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손으로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자 눈앞에 낯이 익은 중년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해모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대뜸 초가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너 우리 집 막내아들 맞지?”
“엄마! 맞아요. 저 해모수예요. 으어어엉!”
“아이고 내 아들! 으흐흐흑!”
오 년 만에 상봉한 모자(母子)는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는 대성통곡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