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사람들은 대망 슈퍼의 사장 이대근과 그의 아들 마루를 훔쳐봤다.
그러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참 여러 가지로 말들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대근과 마루처럼 열정적으로 종말을 대비하지는 못했다.
―대망 슈퍼 이 사장님, 나오세요!
“네, 말씀하세요. 박 사장님.”
―작업 다 끝냈습니다.
“조금도 빈틈없이 확실히 작업하셨죠?”
―물론이죠. 아주 튼튼하게 잘 세워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만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네, 박 사장님도 좋은 밤 되세요.”
워키토키에서 과천 공업사 박 사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또다시 이대근과 마루를 흘깃거리며 쳐다봤다.
“이 사장님,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고 대비하신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마루의 선견지명입니다.”
“아드님요?”
민정의 아버지 김민석은 이대근의 말에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물끄러미 마루를 쳐다보자 옆에 있던 민정이 김민석을 향해 입을 삐쭉거리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지난번에 제가 아빠 엄마한테 얘기했잖아요! 그때는 들은 척도 않으시더니… 이제 와서 뭘 그렇게 놀라세요!”
“으음, 그게 오늘 일을 두고 한 말이었구나. 솔직히 난 아직도 좀비가 나타나는 세상을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구나.”
사실 이런 반응이 정상에 가까웠다.
김민석은 이대근과 마루가 파이럿 혜성이 폭발한다고 했을 때, 둘 다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의 말대로 파이럿 혜성이 폭발하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는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좀비가 넘쳐나는 험한 세상!
앞으로 어떻게 헤치고 나가야 할지 걱정이 눈앞을 가렸다.
마음 한편으론 아직도 그들의 말대로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
아니 그들의 말을 결코 믿고 싶지 않았다.
“아버님, 이제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벌써 종말은 시작됐습니다. 미국을 시작으로 파이럿 혜성의 파편이 지구 곳곳에 떨어질 것이고 곧 이곳 한반도에도 떨어져 내릴 겁니다.”
“으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모든 가치를 생존에 두고 18세기 이전, 야만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자신과 가족을 위하고 지키는 길입니다.”
“자네는 세상이 그렇게 변하게 될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나?”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저희 가족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고 이 사태를 대비해 왔습니다.”
김민석은 확신에 찬 마루의 대답에 긴 한숨을 토해냈다.
대망 슈퍼 이 사장과 그의 아들 마루!
생각해 보면 파이럿 혜성이 나타난 이후, 이들은 참 독특한 행보를 보여왔다.
‘종말 대세일’이란 이름으로 가히 파격적인 세일을 했다.
지나치게 많은 식료품을 대량으로 구매해서 비축해 놓는 모습도 보였다.
그는 굳이 이러한 사실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망 슈퍼에서 벌이는 여러 가지 기행(奇行)에 대해 저절로 알게 됐다.
뭐 같은 동네에서 슈퍼와 마트를 하고 있는 사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 될 것이다.
‘혹시나 해서 집에다 식료품을 여유 있게 비축해 놓은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군.’
김민석은 하도 대망 슈퍼에서 난리를 피우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집과 마트 창고에다 식료품을 넉넉히 비축해 놓았다.
나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반품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안 되면 싸게 덤핑으로 다른 곳에 팔아치울 요량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 민정 그리고 자신!
이렇게 세 식구만 쓴다면 아마 몇 년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량만 비축해 놓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정말 이번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는다면 절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좀비가 창궐하지 않는다면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십중팔구는 마루의 말대로 좀비 사태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김민석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만약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될까?
내전(內戰)이 일어난 나라를 살펴보면 여자와 아이들이 얼마나 참혹한 일을 당하는지 잘 알 수 있다.
법과 질서가 무너진 아포칼립스(Apocalypse: 파멸, 세상의 종말, 대재앙).
결코 내전이 일어난 상황보다 나쁘면 나빴지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민석은 자신의 아내와 딸이 총칼을 가진 무법자들에게 잡히는 상상을 해봤다.
수도 없이 강간을 당하고 성노예로 끌려가 치욕스러운 삶을 마감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피가 거꾸로 치솟을 것만 같았다.
마루처럼 자신이 젊다면 모를까 지금 나이를 생각할 때, 결코 혼자서 아내와 딸을 잘 건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연히 시선이 듬직한 마루에게로 향했다.
‘진짜 좀비가 창궐한다면 아내와 딸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마루라는 이 청년이 되겠군. 지금은 의사나 변호사를 사위로 들이는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젊고 건강한 힘 있는 청년이 생존에 더 적합하다.’
김민석은 자신의 생각을 빠르게 정리해 결론을 내렸다.
술이 한잔 들어가서 그런지 평소에 가지고 있는 결정 장애가 지금은 전혀 자신을 방해하지 않았다.
“마루라고 했지?”
“네, 아버님.”
“내 딸 좋아하나?”
“네?”
“민정이 좋아하냐고?”
“아! 예.”
마루는 갑작스러운 김민석의 말에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그런지 얼떨결에 좋아한다고 속에 있는 말을 하고 말았다.
마루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능금처럼 달아오르자 김민석의 눈에 기광이 흘렀다.
“아빠!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걸 본 민정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러나 오늘 아빠의 행동은 자신의 예상을 한참이나 빗나가 버렸다.
“너도 이 청년 좋아하냐?”
“네? 아니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시는 거예요?”
“마루 청년은 네가 좋다고 하던데… 너는 싫은가 보지!”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민정은 아버지의 말에 크게 당황해 얼굴을 붉히며 마루의 눈치를 살폈다.
“난 이 청년이 마음에 들어. 하지만 굳이 네가 싫다고 한다면 너의 뜻을 존중하겠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자! 굳이 싫어하는 사람 앞에 억지로 앉아있을 필요는 없다.”
김민석이 냉정하게 말을 하며 일어났다.
놀란 민정은 급히 그의 손목을 붙잡더니 빠르게 말했다.
“아니 내가 언제 마루 오빠가 싫다고 했어요?”
“그럼 좋아하는 거냐?”
“그, 그래요.”
“뭐라고? 안 들린다. 크게 말해봐.”
“좋아한다고요. 이제 됐어요?”
민정은 자꾸만 다그치는 아빠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서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를 깨닫고는 그만 푹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아버지 김민석의 허접한 유도신문에 그만 홀라당 넘어갔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고백을 한 셈이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부끄러움에 홍시처럼 얼굴이 붉어진 민정은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민정의 본심을 듣게 된 마루는 몸이 붕 뜨고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김민석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눈치 빠른 백하연은 남편의 의도를 바로 눈치채고 맞장구를 쳤다.
“다행이다! 나도 마루 청년이 듬직해서 참 마음에 들었는데…….”
“당신도 그랬군. 그럼 마루 청년만 좋다면 둘이 정식으로 교제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렇죠!”
김민석과 백하연은 분위기를 둥둥 띄우더니 금세 마루와 민정의 교제를 기정사실화해 버렸다.
“아버님, 그리고 어머님, 말씀 편히 하세요.”
“그럴까? 마루야! 너 내 딸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잘 지켜줘야 한다.”
“네? 아! 물론이죠. 고맙습니다.”
마루는 김민석의 말에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대근과 김영희는 김민석과 백하연이 하는 양을 옆에서 지켜보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렇다고 깽판을 놓거나 반대를 하는 우(愚)를 범하진 않았다.
둘 모두 마루의 며느릿감으로 민정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이대근과 김영희는 일단 나 몰라라 하면서 모른 척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김 사장님, 댁의 따님과 우리 아들 마루의 교제를 정식으로 허락하신 겁니까?”
“아이고 형님, 김 사장이 뭡니까? 앞으로 그냥 맘 편하게 민석이라고 부르세요.”
“네에? 앞으로 사돈이 될지도 모르는 사이인데… 나중에 호칭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거야 개인적인 자리에선 형님 동생 사이로 지내고, 공적인 자리에만 사돈 행세 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럼 그렇게 할까요?”
“하하하, 당연한 소리는 그만하시고, 어서 이 동생의 술 한 잔 받으세요.”
“크흠, 그럼 우리 아우님 술 한번 받아볼까?”
이대근과 김민석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금세 형님 동생 하며 빠르게 친해졌다.
그러자 백하연도 가만히 옆에서 두고만 보고 있지 않았다.
김영희에게 바로 언니 드립을 치기 시작했다.
“저는 영희 언니라고 불러야겠네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그럼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호호호, 참 말씀 재미있게 하시네요.”
“언니, 동생한테 무슨 존댓말을 쓰세요? 그냥 하연이라 불러주세요.”
“좋아. 그렇게 하자. 그럼 오늘 하연 동생을 만난 기념으로 맥주는 내가 쏠게.”
“호호호, 그러세요. 오늘 밤 우리 취하도록 한번 마셔봐요.”
이대근과 김민석에 이어 김영희와 백하연도 금세 언니, 동생을 부르며 급격히 친해졌다.
민정은 대체 오늘 아빠 엄마가 왜 저러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놀라서 큰 눈만 말똥말똥 깜빡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루는 민정의 부모님이 왜 갑자기 저런 행동을 하는지 금세 눈치챘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소중한 딸!
그들은 이 불안한 시기에, 민정의 안전을 위해 미리부터 그녀의 옆에 마루를 묶어두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꼭 저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내가 여자 친구 하나 지켜주지 못할까 봐 이러시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해(河海)와 같다.
마루는 아직도 그 마음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순 없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마루의 형제자매들이 모조리 다가왔다.
그들은 김민석과 백하연에게 인사를 드리고, 특히 오늘의 히로인이라고 할 수 있는 민정과 안면을 텄다.
민정은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어머 어쩜 이렇게 예쁘니! 우리 마루는 참 좋겠다.”
“예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언니가 너무 아까워요. 이런 미녀는 우리 오빠 같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생각을 고쳐먹으세요. 꺅!”
쫙!
마루가 잘되는 꼴에 배가 아파 헛소리를 해대는 철없는 윤아!
서현은 그런 여동생을 사정없이 응징했다.
윤아는 등짝에 화끈한 고통이 느껴지자 눈물을 글썽이며 언니를 노려봤다.
그렇다고 감히 서현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서현이야말로 어머니 김영희 여사보다 더 무서운 그녀의 천적이었던 것이다.
“형수님, 제가 마루 형 동생, 재용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수씨, 전 마루의 형 되는 태인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루 잘 좀 부탁합니다.”
“네?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민정은 부끄러움에 볼이 발갛게 익은 얼굴로 태인과 재용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바비큐 파티의 주최 측이라고 할 수 있는 마루의 가족이 민정과 그녀의 부모님에게 신경을 쓰느라 잠시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파라솔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어느덧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버렸다.
그들은 차라리 마시고 죽자며 다들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설사 좀비가 창궐한다고 해도… 당장 이 동네로 쳐들어오진 않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낳은 결과였다.
물론 불안한 눈동자로 연신 하늘을 쳐다보며 TV를 시청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당장 내일 지구에 종말이 찾아와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 아니 한 잔의 술을 마시고, 한 점의 고기를 씹겠다는 태도였다.
오직 서진아만 종말과 상관없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마루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할머니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것으로 그나마 치밀어 오르는 질투의 불길을 간신히 다스리고 있었다.
은하수 아래로 별똥들이 길게 꼬리를 드리운다.
온 세상에 절망과 파멸의 씨앗이 내리고 있는 불길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