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마루: 해모수, 이번에 성산백호소를 재건하게 되면 차라리 위치를 조금 옮겨!] [그렌: 맞아 그러는 게 좋겠어. 자리를 아래쪽으로 조금만 옮겨도 방어하기 좋고 포구와도 가까운 지형이 나오잖아.] [해모수: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마루: 이번에는 나무로 감시 초소를 짓지 말고 토성을 쌓아봐! 좀 힘들겠지만 훨씬 튼튼할 거야.]해모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같아서는 돌로 성을 쌓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예산도 없을뿐더러 시간도 오래 걸렸다.
[그렌: 그나저나 왕규동을 저대로 가만 놔둬서는 안 될 것 같아.] [마루: 나도 동감이에요. 그동안 해씨 사 형제를 괴롭힌 행태로 봐서는 절대 부하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버리는 돌 정도로밖에는 취급하지 않고 있어요.] [해모수: 몰래 죽여버릴까요?] [그렌: 걸리지만 않는다면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 [마루: 아니에요. 마법을 쓴다면 모를까 그건 너무 위험해요. 일단 놈을 적으로 규정했으니 기회가 오면 제거하거나 상부에 투서를 하는 게 좋겠어요.] [해모수: 투서!]해모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성공만 한다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이미 해씨 사 형제는 왕규동과 이리저리 엮여있었다.
특히 왕규동이 왜구에 의해 몰살당한 북현 유지들의 재산을 꿀꺽하는 과정에 연루되어 있어 조심해야 했다.
[그렌: 해씨 사 형제의 입장도 있고 하니 투서는 상황을 좀 봐가면서 하는 게 좋겠어. 이곳 속담에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도 있잖아.]해모수와 마루 모두 그렌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성산백호소에 도착했다.
“해대호 총기!”
“해광호 총기!”
“해상호 총기!”
“해모수 소기!”
어떻게 알았는지 영문에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이 모조리 나와있었다.
그들은 해씨 사 형제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다들 악전고투 끝에 죽다 살아난 상태였다.
서로에 대한 전우애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펑펑 울어댔다.
사선을 함께 넘은 전우들!
앞으로 생사고락을 같이할 사이이기도 했다.
“자! 다들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서 소라도 한 마리 잡아먹읍시다.”
“소가 어디 있어요? 돼지라면 모를까?”
해모수의 말에 병사 하나가 웃으며 반박했다.
“소든 돼지든 오늘 내가 살 테니 배 터지게 한번 먹어봅시다.”
“술은 제가 사지요.”
“하하하! 이거 만나자마자 잔칫상부터 차리겠네.”
“와아아아!”
해씨 사 형제가 차례로 호기롭게 말을 하자 다들 웃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뒤쪽으로 새까맣게 불타버린 성산백호소의 참혹한 모습이 보였다.
해모수는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는 이를 갈았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허름하게 세워놓은 막사들을 흔들며 푸른 바다를 향해 넘실넘실 나아가고 있다.
* * *
아침이 됐다.
동녘에 해가 뜨고 온 세상이 밝아졌다.
어젯밤 늦게까지 벌인 잔치의 영향인지 성산백호소 병사들의 안색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해대호는 아침부터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성산위에서 내려온 명령서를 정식으로 개봉했다.
현재 성산백호소의 상황도 보고를 들어 파악했다.
보고가 계속될수록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우리가 성산위 감옥에 갇혀있는 사이, 성산백호소에 식량 한 톨도 주지 않다니…….”
“그동안 다들 어떻게 연명했는지 궁금하군요.”
해대호의 탄식에 이어 해상호의 궁금증이 더해졌다.
“밖에 보이는 막사는 어디서 났습니까?”
해광호의 질문을 끝으로 부하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막사를 울리기 시작했다.
“식량은 해동상회라는 곳에서 보급해 줬습니다. 해모수 소기의 요청으로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막사는 영율소에서 빌려줬습니다.”
“성산위에서는 우리가 굶어 죽기를 바라나 봅니다.”
“개새끼들! 정말 인간이라면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다들 칼을 갈고 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시면 성산위의 지휘관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리겠습니다.”
“개 같은 몽골 놈들이 물러가서 좋다고 했더니… 이제는 승냥이보다 더한 한족들이 몰려와 우리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습니다.”
부하들이 흥분하자 해대호가 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자 자! 진정들 하게. 일단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서 복수를 하든 말든 방법을 생각해 보세.”
“급료로 나오는 곡물은 왜 안 주는 겁니까?”
“앞에서 잘라먹고 뒤에서 나눠먹고 있는 게지.”
그동안 해모수가 머리를 잘 써서 나름 풍족하게 지냈다.
하지만 해씨 사 형제가 없는 사이 확실히 자신들이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살아남은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군역에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제대로 보급도 안 해주다니…….
도대체 누구를 위해 싸우라는 말인가!
결국 해모수가 다시 나서야 했다.
“제가 영율소에 가서 식량부터 해결해 오겠습니다.”
“해모수 소기가?”
모두의 시선이 해모수에게 쏠렸다.
“분위기로 볼 때, 당장 성산위로 가서 보급을 해달라고 하면 날벼락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영율소에서 급한 대로 빌리고 나중에 성산위에 청구하는 방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할까?”
그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도무지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죠.”
하지만 해모수는 너무도 쉽게 애기를 했다.
해씨 삼 형제가 해모수를 보더니 눈으로 괜찮겠냐고 물었다.
해모수는 미소로 그들에게 답을 해줬다.
“해모수 소기가 생각이 있는 듯하니 한번 믿고 맡겨봅시다.”
“좋습니다.”
“해모수 소기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동안 쌓아온 전공과 명성이 있어 의외로 다들 쉽게 찬성했다.
해모수는 즉각 막사를 박차고 나왔다.
일단 가장 급한 것은 군량, 아니 식량이었다.
아무리 정예 강군이라도 먹을 것이 없으면 오합지졸이 되는 법이다.
언제까지 해동상회에서 백여 명이나 되는 입을 채워줄 수는 없다.
그 돈이 전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해모수는 여진 삼총사와 같이 말을 타고 영율소로 달려갔다.
영율소에 도착하니 도강원 정천호가 그를 반갑게 맞아줬다.
도강원은 해모수의 얘기를 듣고는 혀를 찼다.
“쯧쯧, 도대체 성산위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어.”
“성산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손을 벌리려고 왔습니다.”
“성산백호소에 군량을 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세. 어차피 나중에 받으면 되는 일이니 내겐 문제랄 것도 없지. 다만 자네의 상황이 곤란해질까 그게 걱정이네.”
해모수는 빈말이라도 이렇게 말해주는 도강원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저야 도강원 정천호께서 힘을 써주신 덕분에 이렇게 감옥에서 나와 백주 대낮을 활보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게 내 덕분이라는 것은 어찌 알았누?”
“헤헤! 제가 비벼볼 언덕이 도강원 정천호 말고 세상에 또 어디가 있겠습니까?”
“뭐라고? 전에는 나를 아주 잡아먹으려고 하더니 이제는 아예 꼬리를 확 내리는구먼.”
“제가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전 언제나 도강원 정천호를 존경하는 일개 소기에 불과합니다.”
“겸손한 척하지 말게. 이미 다 알고 있어.”
“뭘 말입니까?”
도강원은 눈을 게슴츠레 하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병사들에게 다 들었네. 왜구들과의 일전! 아니 성산백호소 전투에서 활약이 어마어마했다면서…….”
“제가요? 아닙니다. 그랬다면 성산백호소의 병력이 반이나 죽었겠습니까?”
“그건 자네의 잘못이 아니야. 그 병력으로 왜구들의 공격에서 반이나 구해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마찬가질세. 아니 아무도 그런 활약을 보일 수는 없을 거야.”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어린 나이에 머리도 좋고 무예도 뛰어나니 앞으로 대성하겠어. 나중에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날 좀 잘 봐주시게.”
“네에?”
농인 줄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놀란 척했다.
도강원은 뭔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고 자신의 부관을 불렀다.
“필요한 만큼 군량을 내줘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강원 정천호의 호의로 당장 병사들에게 먹일 군량을 확보했다.
영율소에서 지원해 준 병사들과 함께 성산백호소로 군량을 옮겼다.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이 군량을 싣고 온 수레를 보자 다들 좋다고 춤을 춰댔다.
“우와! 역시 해모수 소기야!”
“식량이 왔다.”
“군량이 왔어. 이제 밥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야호! 해모수 소기가 최고다.”
인기 절정의 해모수는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만큼 인기가 치솟았다.
병사들의 최애 지휘관이 되어버린 해모수는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시대는 매 끼니만 잘 먹어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굶어 죽지 않으려고 군문에 투신하는 자도 꽤 많았다.
[그렌: 이러려면 땅을 구해서 농사를 짓고 고깃배를 빌려서 물고기를 잡는 게 낫겠다.] [해모수: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병력이 충원되면 이백 명도 넘으니 그중에서 일부만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동원하면 될 거예요.] [마루: 그건 안 돼요. 차라리 돈이 들어가더라도 해모수가 식량을 공급해 주는 것이 좋아요. 먹고사는 것에 신경을 쓰는 군대가 어떻게 강군이 될 수 있겠어요. 아마 이런 현상은 오래가지 않을 거예요. 도지휘사사에서 성산위로 새 지휘관을 파견할 수도 있고 이미 감찰을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렌: 마루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 어차피 현재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은 해모수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야. 앞으로 이들을 수족처럼 부리려면 권위가 필요해!] [해모수: 금방 했던 말과는 많이 다르시네요.] [그렌: 크흠.]반전의 변화를 보여준 그렌에게 해모수가 퉁명스럽게 일침을 가했다.
그렌은 못 들은 척 괜히 마른기침을 했다.
해모수는 영율소에서 성산백호소까지 군량을 나른 영율소의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술 한잔하라고 돈주머니를 건네줬다.
입술이 퉁퉁 부은 것처럼 주둥이를 십 리만큼 내밀고 있던 병사들이 반색했다.
그들은 해모수를 마치 현세에 등장한 부처를 대하듯 했다.
병사들은 솥을 걸고 불을 피웠다.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매 끼니마다 풍족하게 밥을 먹은 성산백호소의 생존한 병사들!
점차 해씨 사 형제에 대한 충성도가 극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사이 몇 차례의 지휘관 회의도 있었다.
거기서 만장일치로 성산백호소를 새로운 장소에 짓기로 결정했다.
해모수와 해대호는 지휘사 장제민과 지휘첨사 왕규동이 잠시 출타한 틈을 타 성산위로 출동했다.
제일 먼저 성산백호소로 증원된 신병을 인수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동안 받지 못했던 병사들의 급료와 막사 등 필요한 보급품도 요구했다.
또한 성산백호소 재건에 필요한 자재(資材)도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왕규동의 언질이라도 있었는지 성산위 보급창에서는 원하는 것을 쉽게 내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당장 쓸 군량과 병사들의 쥐꼬리만 한 급료, 그리고 막사 등 일부만 챙길 수 있었다.
침을 탁 뱉고 도망치듯 성산백호소에 돌아왔다.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이 그런 해모수 일행을 크게 환영했다.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 충원된 신병을 반겼다.
해씨 사 형제는 고려 유민 및 소수민족 출신의 기존 병사들과 미리 얘기한 대로 아무도 모르게 신병들의 출신을 구별했다.
대부분 고려 유민과 소수민족 출신 신병들이었다.
하지만 한족도 일부 있었다.
아무래도 왕규동이 심은 세작이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일단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는 신병은 출신을 불문하고 전부 따로 모았다.
그리고 철저히 분리해 놓고 감시를 했다.
분류가 끝나자 신병들에게 기본 훈련을 시키고 성산백호소 재건 작업에 투입했다.
부하가 생긴 기존의 병사들은 신이 났다.
원래 구르던 자가 굴릴 수 있게 되면 모든 게 즐거워지는 법이다.
새로 만들어지는 성산백호소에서는 매일 곡소리가 들렸다.
곡소리가 커지는 만큼 감시초소, 아니 감시탑도 빠르게 세워졌다.
나무로 세워 올리는 것이 아니다.
옮긴 장소에 높게 토벽을 쌓고 보강 공사를 하는 것뿐이다.
막사에서의 생활은 고단했다.
하지만 그래도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으니 다들 열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