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쾅!
파이어볼은 동혈의 입구를 부숴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연합군의 마법사는 이미 마나가 바닥났는데 적군의 마법사는 아직도 마법을 쓸 수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아군의 진형은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었다.
경사가 진 곳이라 위쪽으로 올라온 적병들이 많이 지쳐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아군은 파탄을 드러냈을 것이다.
부서진 목책과 비교해 보니 진형이 상당히 안으로 밀려 들어와 있었다.
그렌은 간간이 수류탄을 던지며 주변을 살폈다.
이미 연합군의 모든 병사와 기사들이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마나를 회복하기 위해 여전히 한쪽에서 명상 중이었다.
난전으로 치달은 상태라 폭탄을 터트려도 이전과 같은 효과는 보기 힘들었다.
이 상태로 전투가 계속 진행된다면 패배할 가능성이 높았다.
전투에서 패하면 포로가 될 것이고 그동안 했던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이제는 정말 농성밖에는 없나 보군.”
“그렌 님, 마나석 광산 안으로 들어가시죠.”
고민은 야엘의 한마디 말에 끝났다.
그렌은 즉시 마나석 광산 안으로 달려갔다.
광산을 운영하기 위해 파놓은 동굴은 생각보다 크고 넓었다.
“저쪽이 좋겠어요.”
야엘이 동굴 안쪽 깊숙한 곳에 툭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를 가리켰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그 바위를 향해 뛰어갔다.
헐레벌떡 바위 뒤에 몸을 숨기자 그나마 좀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롱 소드와 방패를 들고는 그렌의 옆에 굳건히 섰다.
그 모습이 마치 전설에 나오는 전투의 여신 같아 보였다.
흐뭇한 미소로 쳐다보자 야엘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야엘, 마나석 광산 안쪽 좀 살펴봐!”
“네, 다크를 보내겠습니다.”
야엘은 어둠의 정령을 보내 광산 안쪽을 정찰했다.
입구 쪽은 폭이 넓고 높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졌다.
또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동굴은 깊었다.
“동굴이 무척 깊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져서 농성을 한다면 쉽게 잡히지는 않겠어요.”
“굳이 적을 물리칠 필요도 없어. 그냥 버티기만 해도 카시오페라 왕국과 부르나 왕국에서 지원이 올 거야.”
그렌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어떻게 버틸지를 고민했다.
[마루: 이대로 계속 전투가 벌어지면 다 같이 죽는 수밖에 없어요.] [해모수: 맞아요. 최선은 그냥 동굴 안에서 존버하는 거예요.] [그렌: 뭐? 존버?] [마루: 끝까지 버티라는 말이에요.]마루가 해모수의 말을 해석해 주자 그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렌: 휴우우우! 나도 알아. 문제는 얼마나 오랫동안 농성을 하며 버틸 수 있느냐는 거야. 야엘과 단둘이라면 모를까 사람이 많아지면 전처럼 식량이 부족해질 텐데…….] [마루: 그런 고민은 그때 가서 해도 돼요. 일단은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죠. 최악의 경우 마법사는 포로로 잡혀도 몸값만 내면 풀려난다잖아요. 물론 다시는 코티아르 왕국과의 분쟁에 참여할 수는 없겠지만.] [그렌: 그거야 적들이 신사적으로 나왔을 때나 그렇지. 만약 앙심을 품고 죽이려고 들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방법이 없어. 내가 적군을 좀 많이 죽였어야지.]생각해 보니 그렌의 말도 옳았다.
알게 모르게 지금까지 적병을 제일 많이 처치한 건 바로 그렌이었다.
일반 병사와 기사들은 모르지만 적군의 마법사라면 이미 그의 존재를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밖에 있을 때 동혈로 파이어볼을 날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마나석 광산 밖은 전투로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그렌과 야엘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우르릉, 그릉!
그때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렌은 급히 시선을 돌려 밖을 쳐다봤다.
“이런 미친! 누군가 어스퀘이크 마법을 쓰고 있어.”
“어떡하죠? 나갈까요?”
“늦었어.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급히 야엘의 옷을 잡아끌며 동굴 안쪽으로 달려갔다.
채 20미터도 뛰기 전에 마나석 광산의 입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해모수: 형, 잠시 몸 좀 빌려요.] [그렌: 그래. 부탁해!]워낙 상황이 급박하자 해모수가 그렌의 몸에 빙의했다.
다다다다다!
다엘 스텝을 이용해 빠르게 앞으로 치고 달렸다.
그의 몸이 앞으로 쭉 빨리듯 달려가자 야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들고 있던 방패를 머리 위로 올렸다.
떨어지는 파편을 막으며 야엘은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렌의 뒤를 바짝 쫓는 그녀의 뒤로 돌과 바위들이 마구 떨어져 내렸다.
바닥은 널을 뛰듯 마구 뒤틀렸다.
두 사람은 결국 중심을 잃고 바닥에 자빠졌다.
앞쪽에 경사가 있는지 두 사람의 몸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렌은 자신의 옆을 굴러가는 야엘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도 반사적으로 그의 몸을 안으며 위쪽으로 방패를 들어 막았다.
천지가 무너지는 충격과 함께 그렌과 야엘의 몸 위로 흙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우르릉, 쿵쾅, 꽈르릉!
‘실드, 실드, 실드…….’
무너진 동굴에 휩싸인 그렌은 속으로 미친 듯이 실드를 외쳤다.
그리고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 * *
대망 슈퍼를 중심으로 사방에 설치된 철제 방벽과 차단 문.
마루가 1차 방벽으로 부르는 곳이다.
안쪽의 주택들은 바깥쪽에 있는 주택들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다행히 좀비가 1차 방벽을 뚫고 안으로 기어 들어오지는 않은 것 같다.
―마루야! 너 왜 집으로 안 들어오니?
“우리 동네 안으로 좀비가 침입했어요. 제가 가서 처리하고 올게요.”
―늦은 밤인데 괜찮겠어? 잘 보이지도 않잖아.
“걱정 마세요. 벌써 혼자서 열 마리도 넘게 잡았어요.”
―으음, 무조건 조심해라!
“예, 아버지.”
이대근과 통화를 하고 난 마루는 어깨를 한번 으쓱 들어 올렸다.
왼손에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 창을 가볍게 쥐었다.
그는 일단 1차 방벽 안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봤다.
창문의 좁은 틈새로 가족들과 이웃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마루는 그들을 향해 손을 한번 흔들어 줬다.
1차 방벽의 차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살고 있는 문원동 안으로 들어오려면 열여섯 개의 길목에 설치한 철제 방벽과 차단 문(2차 방벽)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과천 공업사 박 사장이 자신에게 사기를 치지 않았다면 좀비가 2차 방벽을 뚫고 동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동네 안에 분명히 좀비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건 누군가 실수로라도 차단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일단 2차 방벽부터 확인하자.’
마루는 우선순위를 세웠다.
그는 문원동 외곽을 빠르게 한 바퀴 돌았다.
다른 곳은 다 닫혀있는데 북쪽에 있는 공용 주차장 차단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마루는 고개를 흔들며 일단 차단 문을 단단히 잠갔다.
그러고는 대망 슈퍼를 향해 걸어갔다.
텅텅텅텅!
가장 중앙에 난 큰길을 걸어가며 그는 창으로 방패를 쳐서 소리를 냈다.
진짜 좀비가 소리에 민감한지 살펴보려는 의도였다.
놀랍게도 좀비들이 사방에서 소리에 재깍 반응했다.
크아아아!
캬아오오!
먼저 좀비 두 마리가 나란히 다가왔다.
목이 반쯤 잘리고 입가에 피를 묻힌 좀비 둘.
데모 진압용 복장을 한 것을 보니 안타깝게도 에스캅의 경비원들이었다.
마루는 가볍게 혀를 찼다.
도도도도!
다다다다!
좀비는 사이좋게 달려들었다.
쿵!
마루는 방패로 달려오는 좀비를 하나씩 밀어서 튕겨냈다.
기본적으로 마루의 근력은 18(+2)이다.
건강한 성인 남자가 가지는 근력의 두 배에 해당한다.
거기에다 포스까지 운용하고 있는 터라 힘이 증폭된 상태!
좀비 따위에 전혀 밀릴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속도가 줄어든 좀비는 마루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창을 휘둘러 머리에 하나씩 구멍을 내줬다.
10초도 되지 않아 좀비 두 마리가 나란히 땅바닥에 누웠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에스캅 경비원이었던 좀비들의 입가에 피가 묻어있었다.
이미 어딘가에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텅텅텅텅!
마루는 계속 창으로 방패를 쳐서 소리를 냈다.
잠시 후, 좀비들이 어디선가 우르르 몰려나왔다.
숫자는 열다섯!
굳이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던 그는 철제 방벽 위로 사뿐히 뛰어 올라갔다.
크하아악!
캬하아아!
역겨운 고성을 지르며 좀비들이 철제 방벽을 향해 몰려들었다.
마루는 방패와 창을 내려놓고 개량궁을 들었다.
동개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를 걸었다.
좀비들은 그의 발아래에서 이를 갈며 생명체를 향한 이유 없는 적대감을 드러냈다.
마루는 시위를 크게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좀비의 정수리를 향해 거의 수직으로 화살을 발사했다.
핑, 퍽! 핑, 퍽! 핑, 퍽! 핑, 퍽! 핑, 퍽…….
아무리 활을 못 쏴도 코앞에 보이는 표적을 놓칠 마루는 아니었다.
그는 열다섯 개의 화살로 좀비의 대가리에 모조리 구멍을 뚫어줬다.
텅텅텅텅!
마루는 창으로 방패를 치며 다시 소리를 냈다.
좀비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궁술 연습도 할 겸 다가오는 좀비를 향해 활을 쐈다.
핑, 퍽! 핑, 퍽! 핑, 퍽! 핑, 퍽! 핑, 퍽!
거리가 멀지 않아서 그런지 쏘는 족족 백발백중으로 좀비의 머리를 꿰뚫었다.
다섯 마리의 좀비가 쓰러지자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그는 창으로 방패를 쳐댔다.
텅텅텅텅!
하지만 30분이 지나도 새로운 좀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마루는 창으로 방패를 치는 것을 멈췄다.
그는 차를 가져와 좀비를 실어 나르기로 했다.
으르릉, 그르릉!
픽업트럭 짐칸에 있던 강준모가 벌써 좀비가 되어 그를 격하게 맞이했다.
눈은 피가 흐른 것처럼 붉었고 피부는 탁한 회색이었다.
핏줄은 검은색으로 변해 무척이나 징그러웠다.
마루는 좀비가 된 강준모의 모습을 보며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일단 위험 요소부터 해결해야 했다.
부우우웅!
픽업트럭을 몰고 2차 방벽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직접 처치한 좀비들을 하나씩 옮겨 차곡차곡 짐칸에 쌓았다.
좀비의 몸에서 검은 피와 역겨운 체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준모의 픽업트럭 짐칸에는 원래 비닐이 깔려있다는 점이다.
새 차라서 그런지 강준모가 꼼꼼히 관리한 티가 났다.
마루는 픽업트럭을 몰고 문원동 서쪽에 있는 공용 주차장 옆 소각장으로 갔다.
좀비들을 꺼내 나란히 눕혀놓고 스마트폰을 꺼내 먼저 얼굴 사진을 찍었다.
한때는 아끼고 친하게 지내던 후배, 강준모!
그마저 좀비로 변해버린 현실이 마루에게는 나름 큰 충격이었다.
사진을 다 찍고 나자 이제는 좀비들을 겹겹이 잘 포개놓고 골고루 물총을 쐈다.
물론 물총에 들어있는 것은 물이 아니라 알코올이었다.
차 안에 있던 1회용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화르륵!
불은 순식간에 좀비에게 옮겨붙어 이내 거대한 화염으로 변해갔다.
마루는 좀비들이 모조리 타버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다 타고 재만 남자 그는 그것마저 땅에 묻어버렸다.
뒤처리를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하늘을 쳐다보니 어느새 짙은 어둠 사이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형! 일어나.”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마루는 재용이 부르는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아버지한테 항의를 하고 있어.”
“뭐야!”
그는 속에서 짜증이 확 솟구쳤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우리 가족과 동네 이웃들을 하나라도 더 살려보겠다고 잠도 못 자고 밤새도록 뛰어다녔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가보자.”
안색을 굳힌 마루는 빠르게 무장을 하고 현관을 나섰다.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가 대망 슈퍼로 넘어갔다.
“…내뱉으면 다 말인 줄 아십니까?”
“그럼 내가 못 할 말 했습니까? 당신 아들이 살인한 것은 분명하잖아요.”
대문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이미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린다.
몇 마디 안 되는 말이었지만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잡혔다.
“아침부터 남의 집에 와서 웬 소란입니까?”
마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등장했다.
건장한 체격에 부리부리한 눈!
힘찬 목소리에 서릿발 같은 기상이 은연중 몸에서 흘러나왔다.
대문을 나서자 아버지 이대근을 중심으로 동네 사람 몇 명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방금 전까지 이대근에게 핏대를 올리던 사람들이 금세 자라목이 됐다.
아무도 말을 못 하자 이대근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