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그녀는 작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저는 지금 구 할 구 푼의 힘을 잃었습니다.”
“…….”
“사부님의 백년적공(積功)도 무용지물이 됐어요.”
“…….”
“하지만 은공을 위해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해모수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쏟아져 내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의 연속!
그러나 그는 왕지현의 말도, 행동도 막을 수 없었다.
가냘픈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도 슬퍼서… 몸을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휘리릭!
가녀린 무릎이 살짝 굽혔다 펴졌다.
왕지현의 몸이 허공으로 쑤욱 떠올랐다.
가볍게 정자를 벗어나 내려선 평평한 바위.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해모수를 쳐다봤다.
허공의 한 점에서 두 개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쳤다.
말없이 바라보는 그의 눈에 왕지현의 얼굴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손에 환도가 천천히 회전했다.
그리고 세상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손을 내밀면 잡힐 듯 하늘거리는 하얀 궁장
불타오르는 석양에 번져가는 저녁 하늘
노을에 물든 옷깃에 불어오는 산들바람
제풀에 겨워 마중 나온 나뭇잎은 회오리 춤을 춘다.
슥, 사삭, 부웅, 붕!
연못가의 바위 위를 뛰노는 어린 사슴처럼
스치듯 튕기는 버선발에 찍히는 물방울이 애처롭다.
벼락을 무색게 하는 공간을 가르는 일섬
서늘한 칼날의 회전은 공기를 찢어발긴다.
착, 착, 착, 착!
하양 사 옷고름 고이 접어 나빌레라!
수면 위로 둥실 연방 수를 놓는 나이테
한 아름 모아지고 둥글게 퍼져나가고
용틀임해 오르다 튕기듯 펼쳐지는 작은 진저리
휘익, 휙휙, 후욱, 훅훅!
휘어지는 곡선이 어찌 이리 아름다울꼬!
내지른 칼날의 빛이 폭풍처럼 터져나간다.
바람에 떠오른 한 송이 꽃처럼…….
날아오르는 자태는 한 폭의 우아한 미인도다.
해모수의 입은 딱 벌어지고 눈은 휘둥그레졌다.
9할 9푼의 힘을 잃었다면 99퍼센트의 힘을 잃고 1퍼센트만 남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오러나 마나 같은 특별한 기운을 쓰는 것도 아니다.
순전히 육신의 힘만으로 펼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연못의 수면 위를 마치 땅 밟듯이 밟고 다닌다.
그것도 환도를 들고 격하게 칼춤을 추면서 말이다.
왕지현의 신비로운 검무는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두 발은 대지를 굳건히 딛고
칼은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구친다.
몸은 허공을 밟으며 팽이처럼 돌고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기세 속에
마침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회자색으로 빛나는 신비로운 왕지현의 눈동자!
그 안에서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웅웅웅웅웅!
귀에는 이명이 들리고 시선은 과거의 어느 한 점을 짚는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작은 점이 폭발적으로 커지며 눈앞에 쏟아지듯 활짝 펼쳐진다.
해맑게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의 눈동자!
그곳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다.
“아하하하하!”
맑은 웃음소리엔 호연지기가 넘쳐흐른다.
물 찬 제비처럼 거친 파도 위를 날아다니는 여인.
그녀의 입가는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새파랗게 빛나는 삼척장검이 바다를 가르고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신형은 하늘에 닿을 듯하다.
거침없는 질주와 무엇이든 부숴버리는 파괴력!
천상천하유아독존!
세상 어느 것도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극에 달한 신념!
휘날리는 은발이 원을 그리며 날아오르자
거대한 용오름이 일어나 바닷물을 먹어치운다.
웅웅웅웅웅!
다시 이명이 들리고 그녀의 시선이 훌쩍 뒤로 밀려난다.
마치 시간이 빠르게 흘러 감기는 듯한 모습!
그러다 문득 어느 한 장면이 벼락처럼 떠올랐다.
커다란 무역선의 갑판.
비굴하게 웃음 짓는 중년 사내가 손을 내민다.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여인!
섬섬옥수에 들린 종이 한 장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기회를 틈타 입에 재빨리 독단(毒丹)을 먹이고 온몸을 포승줄로 묶는다.
하지만 여인은 마치 삶을 포기라도 한 양 아무런 저항도, 반항도 하지 않는다.
바다 건너편에서 수상한 배 한 척이 다가온다.
발판을 타고 거친 해적들이 쏟아지듯 들어온다.
음탕한 눈빛과 탐욕스러운 얼굴!
무뢰배들은 여인을 마치 짐짝처럼 들고 떠나간다.
웅웅웅웅웅!
뼈를 울리는 진동.
이명과 섞이며 짜릿한 통증이 골수로 깊게 파고든다.
파칭!
보이지 않는 강렬한 파동이 주마등을 강타했다.
눈앞에 보이던 회상이 조각나 바스러지며 모든 잔재가 한곳으로 빨려든다.
마침내 남은 것은 회자색으로 빛나는 서늘한 눈동자!
풀렸던 태엽이 다시 감긴 듯, 얼어붙은 시공간이 풀리며 온전하게 돌아간다.
붕, 서걱, 턱, 파삭, 펑, 퍼벙!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왼쪽에서 보였다가 오른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내려치는 칼날이 무를 베듯 숭덩숭덩 나무를 잘라낸다.
허공을 격하고 떨친 섬섬옥수(纖纖玉手)!
잘린 나뭇조각들이 터지듯 비산한다.
해모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가녀린 여인의 손에서 어찌 이런 놀라운 신기가 펼쳐지는가!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놀라기에 앞서… 여인의 검무는 너무도 슬프고 애달프다.
처연하다 못해 이젠 처절하기까지 하다.
얼마나 원통했으면, 분했으면 저런 춤사위가 나올까?
무슨 한(恨)이 저리도 깊기에 손짓 하나마다 모골이 송연해질까!
해모수의 눈에 뿌옇게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휘청!
그때 왕지현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쨍그랑!
손에 힘이 풀렸는지 환도까지 떨어뜨렸다.
놀란 그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피를 토하며 서서히 옆으로 쓰러지는 그녀!
해모수는 쏜살처럼 몸을 날려 간신히 왕지현의 몸을 붙잡았다.
그의 품에 안겨 힘없이 숨을 몰아쉬는 여인.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 이슬 같은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힘이라곤 깃털만큼도 없는 모습.
해모수는 급히 왕지현의 몸을 들고 별채로 향했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혔다.
왕지현을 만난 지 이제 겨우 사흘!
하지만 마음은 어찌나 애틋한지… 놀란 마음을 쉽게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갑자기 웬 피를 이렇게……. 무리하지 마시오.”
그의 억눌린 듯한 목소리에 끝내 왕지현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이어지는 것은 가뭄에 빠짝 말라버린 논 자락 같은 마른 목소리.
“저는 평생 세 번의 은혜를 입었어요.”
“…….”
“그리고… 두 번 배신당했습니다.”
“으음.”
듣기만 해도 목구멍이 콱 막히고 심장에 무거운 돌이 얹힌 것만 같다.
“첫 번째 은혜는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이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고결한 것이다.
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일 초도 지나지 않아 해모수는 반전을 맞이했다.
“첫 번째 배신은 제 아비가 저의 피를 마시는 것도 모자라 초경이 지난 저를 욕보이려고 했던 일입니다.”
“예에?”
해모수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게 뭔 개소리란 말인가?
아버지가 딸의 피를 마시고 욕을 보이려 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팩트 폭행에 그로기가 된 기분이다.
왕지현은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갔다.
“천음(天陰)이 한 몸에 모인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금시초문입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해모수의 흠칫 놀란 반응에도 왕지현은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왕지현이 누운 침대 한쪽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자신의 따뜻한 손으로 그녀의 차가운 손을 감싸주었다.
왕지현의 입가에 떠오르는 따뜻한 미소!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러나 대담하게도 그녀는 해모수의 손을 잡고 자신의 하체로 이끌었다.
놀랄 틈도 없이 왕지현의 불두덩에 손이 닿았다.
“앗 차가…워?”
반사적으로 손을 거두려고 했다.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따뜻해야 할 사람의 사타구니 사이!
그런데 그곳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많이 놀라셨죠?”
“솔직히 좀 노, 놀랐소. 어떻게 여인의 몸이…….”
“죄송해요.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코 제 몸을 이해할 수 없으셨을 거예요.”
“잘 알겠소. 그러니 제발 이 손 좀 놓아주시오.”
아직도 자신의 손은 왕지현에게 붙잡혀 있었다.
아니 그녀의 불두덩에 바짝 닿아있었다.
애원조로 말하는 해모수의 표정!
그 모습이 좀 웃겼는지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행히 왕지현은 그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해모수의 손을 슬며시 위로 들어 올렸다.
불두덩에서 벗어난 손은 이제 왕지현의 아랫배로 이동했다.
‘차갑다. 마치 얼음장 같아.’
부끄러운 마음보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천음지체(天陰之體)라고 하더군요. 세상의 모든 음기(陰氣)가 한 몸에 모이는 특이한 체질이래요. 하지만 그럴듯한 이름과는 달리 저에겐 천형(天刑)이나 다름없는 병, 치유 불가의 절맥(絶脈)이에요.”
“혹시 그것 때문에 몸이 차가워진 것이오?”
“맞아요. 음양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야 살 수 있는 게 사람의 몸인데 음기가 강하다 못해 양기까지 잡아먹을 정도니……. 찾아온 의원마다 일곱 살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직 이렇게 살아있지 않소?”
“예, 살아있죠. 죽지 못해 이렇게 살아있답니다.”
왕지현의 눈에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해모수는 그녀가 우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지금은 그냥 그렇게 해주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잠시 마음을 추스른 왕지현이 말문을 열었다.
“제 아비는 원래 고려의 황손으로 왕이 될 사람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황음(荒淫)에 빠져 결국 궁에서 쫓겨나고 말았답니다. 그때 같이 딸려 나간 계집종 하나가 덜컥 임신을 해서 나은 아이가 바로 저예요.”
“그럼 낭자도 결국 황손이란 말이잖소.”
“그건 아닙니다. 저는 태생이 천출이라 황적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없습니다.”
“아!”
왕지현이 가지고 있던 슬픈 출생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얘기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허랑방탕한 아비는 황음무도하여 막대한 가산을 탕진하고 도술(道術)과 선술(仙術)에 심취해 영생불사를 추구했습니다.”
“도술과 선술이라…….”
시쳇말로 사이비 종교 단체에 푹 빠졌다는 말이었다.
“천형의 몸을 가진 저는 일곱 살 때 벌써 죽을 목숨이었으나 하늘의 도우심인지 신통력이 뛰어나신 무명대사를 만나 가까스로 명줄을 잇게 됐습니다.”
“그거참 잘됐군요.”
해모수가 기뻐하자 오히려 그녀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새옹지마(塞翁之馬)였는지… 아비가 어디서 사특한 말을 듣고 와서는 제 피를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음기가 강하고 초경(初經)을 치르지 않은 동녀(童女)의 피를 마시면 무병장수(無病長壽)한다는 헛소리를 믿으신 거죠.”
“이런 미친! 진짜 딸의 피를 취해 마셨단 말입니까?”
“예.”
정말 믿지 못할 얘기였다.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자식의 피를 마신단 말인가?
하지만 이 황당무계한 스토리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러다 열둘에 초경을 치르고 나자 화가 난 아비는 그날 밤 술을 마시고 제 방으로 들어와 절 욕보이려고 했어요.”
해모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어 갔다.
“몸을 지키려고 결사적으로 반항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저는 기골이 장대한 아비의 힘을 이길 수 없었어요. 끝내 치욕을 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갑자기 아비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더니 결국 급살을 맞고 말았습니다.”
“급살이라면 혹시 심장이 멈추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예, 바로 그거예요. 갑자기 심장이 멈춰서 돌아가셨어요.”
“설마 그 원인이 낭자의 체질과 관련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겠죠?”
“맞아요. 원인은 제게 있었어요. 천음에 노출된 아비의 몸에 음기가 침습하여 심장이 멈춰버린 거죠.”
“세상에!”
오래 살진 않았지만… 그래도 살다 보니 별일을 다 들어보는 것 같다.
왕지현의 소설 같은 얘기는 끝이 없었다.
“아비가 죽자 화가 난 군대부인(郡大夫人)께서 저 대신 제 어미를 멍석에 말아 때려죽이셨어요. 그러곤 저까지 노예로 팔아버리려고 하셨죠.”
“…….”
듣다 보니 해모수도 슬슬 화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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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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