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정한 여자로군요.”
“하지만 천기를 살피고 계시던 무명대사께서 저에게 큰 화가 미칠 거라는 것을 아시곤 급히 하산하셨어요. 군대부인께 고개를 조아리며 저를 맡게 해달라고 애원하다시피 부탁해 간신히 밖으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그거참 다행이군요.”
“네, 천만다행이었어요. 그리고 제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눈에 뭐가 쓰이기라도 했는지… 입가에 피가 묻은 왕지현이 미소를 짓자 해모수는 그게 또 참 예뻐 보였다.
“그러나 딱 이 년이었어요.”
“…….”
“무명대사를 사부님으로 모시고 묘향산에서 천문과 지리, 주역 등을 배우며 무예를 닦은 시간 말이에요.”
“그렇군요.”
맞장구를 쳐주자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녀는 정색을 하며 다음 얘기로 넘어갔다.
“이 년이 지난 어느 날, 사부님이 오시더니 곧 우화등선(羽化登仙)하게 될 거라며 제 단전에 당신의 백년적공을 불어 넣어주셨어요.”
“백년적공이라면 내공을 말하는 겁니까?”
“내공? 아니에요. 백 년 동안 선기(仙氣)로 연단한 영선단(靈仙丹)을 말하는 것이에요!”
해모수는 마루가 가끔 심심풀이로 읽던 무협지가 생각났다.
가공의 무협 소설이긴 하지만 재미있고 무척 흥미로웠다.
등주에도 이와 같은 책들이 잘 팔리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비록 내공이 아닌 선기이긴 했지만… 오러 연공법에 비견되는 선기연단법이 실존하고 있을 줄이야!
그는 점차 가슴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영선단이라면 먹는 내단(內丹)인가요?”
“생각하고 계신 것과는 전혀 달라요.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분명히 제 단전에는 오랫동안 선기로 연단되어 영성을 띤 호두알만 한 영선단이 존재했답니다.”
“으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상당히 애매모호한 발언이었다.
왕지현이 다시 입을 뗐다.
“사부님 덕분에 전 천형을 피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완전히 천형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에요. 영선단은 천형의 발호를 막는 수단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어요.”
“아!”
“사부님이 우화등선하시고 나자 전 천애 고아가 됐어요. 사부님이 남기신 유언대로 하산해 의주로 갔어요. 거기서 지용수(池龍壽) 상원수(上元帥)의 숙장인 척대광 장군을 만나 군문에 투신했죠.”
“그때 나이가?”
“열넷이었어요.”
이거 참! 어려도 너무 어렸다.
그것도 소녀의 몸으로 군문에 투신했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다행히 척대광 장군은 저를 무척 어여삐 여겨주셨어요. 끝내 저를 수양딸로 삼으시고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유명한 곡산 척씨(谷山拓氏)의 검술도 전해주셨지요.”
왕지현은 말을 하면서 그의 안색을 살폈다.
해모수는 전혀 놀라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저 잘됐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는 굳이 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나중에 마루를 통해 알게 되어 깜짝 놀란 일이지만…….
조봉대부와 곡산 척씨!
고려의 소드 마스터, 척준경(拓俊京)과 그의 가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럼 지금도 군문에 적을 두고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요동 정벌에서 공을 세운 양부가 억울한 모함을 당해 파직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개경으로 내려와 지냈습니다.”
“그럼 어쩌다 바다에 빠지게 됐어요?”
“하아!”
땅이 꺼져라 짓는 한숨!
해모수도 괜히 어깨가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군문을 나온 양부는 개경에서 상단을 하는 아우 척중광에게 몸을 의탁했어요.”
“…….”
“그래서 저도 무역선이 뜰 때면 가끔 일을 도와주곤 했죠.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제 어미를 때려죽인 군대부인이 양부를 찾아와 협박을 하고 척중광을 압박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견디다 못한 척중광은 결국 양부의 이름을 팔아 저에게 독수(毒手)를 가했고 장산군도의 해적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렸답니다.”
“아아!”
이제는 더 이상 놀랄 힘도 없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에 순위를 매긴다면… 이건 상위 0.1퍼센트 안에 들어갈 게 확실했다.
“하지만 이렇게 은공을 만날 인연이었는지… 해적들은 도중에 고려의 수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어요. 타고 있던 해적선이 반파되며 부서졌고, 전 그길로 탈출에 성공했어요. 바다에 빠졌는데 눈앞에 통나무가 보이기에 그걸 붙잡고 일주일을 버텼어요. 하지만 은공이 절 구하러 나타나기 전까지… 끝내 그 어떤 배도 만나지 못했어요.”
정말 더럽게 기구한 팔자였다.
해모수 자신도 참 불쌍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왕지현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 처절함에는 비교조차 불가였다.
“상공! 죄송해요.”
“아, 아니…….”
해모수는 그녀가 자신을 상공이라 부르자 심쿵했다.
하지만 지금 어떤 심정인지 알 것도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제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바치고 싶지만 이런 비천한 몸이라 그럴 수 없다는 게 한입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서 낭군은 오직 상공 한 분뿐이십니다. 앞으로 저는 평생 상공만 바라보며 상공의 그림자로 상공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해모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마구 도리질했다.
아니 멀쩡한 처녀가 왜 자신의 그림자로 산단 말인가?
혹시 자신이 그녀의 청백지신을 손댔다고 결혼을 포기한 걸까?
물론 합방을 할 수 없으니 자식도 낳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인생을 포기하듯 말하는 것은 정말 아니었다.
진짜 그렇게 산다면 그녀가 너무 가엾고 불쌍했다.
“낭자! 그게 무슨 말이오. 어떻게든 몸을 고칠 생각을 해야지. 어찌 이대로 미래를 포기하려 하십니까?”
“상공, 고칠 방법이 없어요.”
“정말로 방도가 전혀 없다는 말이오?”
“…….”
그때였다.
해모수는 왕지현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아예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군요.”
“방법이 있기는 하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게 무엇이오. 되든 안 되든 일단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뭔가 결심을 했는지… 눈을 뜨고 차분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만약 방법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상공입니다.”
“나라고요?”
“예, 상공은 이미 천음으로 가득 차 동사(凍死)의 위기에 처한 제 몸을 녹여주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말입니까?”
해모수는 반문을 하면서 자신의 퓨즈 오러 연공법을 떠올렸다.
“상공은 저를 두 번 구했습니다. 첫 번째는 바다에서 표류 중인 저를 구하셨고, 두 번째는 전신에 퍼진 극음지기로 얼어 죽을 뻔한 저의 몸을 녹여주셨어요.”
“아! 그래서 내가 낭자를 두 번 구했다고 말했군요.”
이제야 그녀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갔다.
“그런데 영선단이 천형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그동안 천음은 영선단의 공능에 묶여있었어요. 하지만 양부의 동생인 척중광이 칠보단장산(七步斷腸散)이라는 극독이 담긴 독단을 먹여, 죽어가는 저를 지키기 위해서 천음 대신 극독을 선택해 봉인했어요.”
“그러니까 낭자가 당장 극독에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영선단이 천음을 묶어놓는 것을 포기했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한 줌의 독수(毒水)로 변해서 죽었을 겁니다.”
그는 크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정도라면 몇 번이고 낭자의 몸을 녹여드리겠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예?”
“겉을 녹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속을 녹여야 합니다. 특히 여기를…….”
왕지현은 말을 하면서 그의 손을 강하게 눌렀다.
아까부터 그녀의 아랫배에 대고 있던 해모수의 손에는 전혀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새 왕지현의 천음에 당해 손이 얼어버린 것이다.
놀란 해모수는 급히 마루와 그렌을 찾았다.
[해모수: 형, 이거 어떻게 해요?] [마루: 뭐야? 동상이라도 걸린 거야?] [해모수: 손이 다 얼어버렸어요. 아무런 느낌도 없어요.] [그렌: 와우!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세상에 별일이 다 있네.]해모수가 깜짝 놀라자 마루와 그렌이 덩달아 난리 블루스를 췄다.
[해모수: 설마 제 손을 잘라야 하는 건 아니겠죠?] [마루: 헛소리 말고 정신 차려!] [그렌: 너 지금 뭐 하고 있냐? 왕지현이 한 말 귀로 안 듣고 코로 들었어? 퓨즈 오러 연공법은 왜 안 쓰고 있는데…….] [해모수: 아 참! 그게 있었지.]그제야 해모수는 퓨즈 오러 연공법을 사용했다.
살짝 겁을 먹은 주인의 의지가 전해졌는지 그가 오러를 일으키자마자 전신에서 오러가 벌 떼처럼 들끓었다.
치이익!
온몸에 열이 나고 특히 얼어붙은 손에서 뭔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났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제야 해모수는 안색을 펴며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해모수: 어휴! 다행이다.] [마루: 이 녀석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나.] [그렌: 그러게 말이야. 아까는 여자 앞이라서 그런지 듬직하더니…….] [마루: 우리한테는 와서는 어린아이처럼 징징대네요.] [해모수: 아이 참, 그런 거 아녜요.] [그렌: 하하하! 농담이야. 어쨌든 잘해봐라.] [해모수: 잘해보긴 뭘 잘해봐요.]해모수는 마루와 그렌이 자신을 놀리자 삐진 척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둘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었던 손이 금세 풀리자 왕지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공,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다행히 내가 수련한 연공법이 날 지켜주는 모양이오.”
“아까 굉장히 강한 양기가 상공의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솟구쳤어요.”
“그게 눈에 보인단 말이요?”
“사부님께 무예를 배워서 그런지, 아니면 영선단 때문인지 모르지만… 제가 기운에 아주 민감해요.”
해모수는 오러와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엄청났다.
한마디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헌데 알고 보니 왕지현도 그에 못지않은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작고 미미하긴 하지만 상공의 이곳, 아랫배에 축기가 이뤄지고 있어요.”
“축기?”
“그러니까 단전에 양기가 모여서 집을 짓고 있다는 뜻이에요.”
“아! 오러 홀!”
그는 당장 오러 홀을 떠올렸다.
해모수는 그녀의 말에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동안 열심히 수련했던 노력이 빛을 보는지 드디어 자신의 몸에도 오러 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오러 홀이 없으면 몸 안에서만 오러를 돌려야 한다.
그렇지만 오러 홀이 생기면 오러를 몸 밖으로까지 내보낼 수가 있다.
쉽게 말해 손에 잡은 무기에 오러를 입힐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오러를 쓰면 오러 유저, 무기에 오러를 입힐 수 있으면 엑설런트 기사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위에는 너무도 유명한 소드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의 단계가 존재한다.
해모수는 마루와 그렌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왕지현은 크게 고무된 해모수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슬그머니 해모수의 손을 다시 잡았다.
“상공!”
“아! 미안해요. 잠깐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랬어요.”
“괜찮으신 거죠?”
“물론이오. 참, 어디까지 얘기를 했더라?”
본론으로 다시 돌아오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안에 있는 것을 녹여야 한다고 했어요.”
“아랫배를 가리키는 거라면 단전을 말하는 건가요?”
해모수가 그녀의 단전에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맞아요. 단전에 자리한 영선단이 천음의 발호로 인해 꽁꽁 얼어붙었어요.”
“가만, 그럼 겉에는 얼음이, 안에는 영선단이, 그 안에는 지금 극독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요.”
“그럼 얼음을 녹이면 영선단이 나오겠네요.”
“그렇죠.”
“영선단을 녹이면 극독이 나오는데 그럼 중독돼서 죽는 거 아니에요?”
그로서는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얼음을 녹인 후에 영선단이 나오고 다시 극독이 흘러나오면 태워서 없애야 해요.”
“배 속에 있는 놈을 뭐로 태워요?”
해모수가 눈을 깜빡이자 왕지현은 누나처럼 그의 손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