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145
145화
“이래서는 답이 없겠어.”
“아무래도 여긴 미로인가 봐요.”
그렌과 야엘은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대신 다크를 보내 한번 길을 찾아보라고 했다.
마법 주머니에서 의자 두 개와 간이 테이블을 꺼내고 앉았다.
육포와 물을 꺼내 씹고 마셨다.
빛 무리에 반짝이는 하얀 통로 안이라 기분이 참 요상했다.
한편 다크는 어둠의 정령이라 하얀 동혈 벽을 뚫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냥 목적 없이 가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흐름을 쫓아가는 것이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다크가 희소식을 가져오자 둘은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법 주머니에 의자와 테이블을 접어 넣고 속보로 걸어갔다.
“어휴! 이거 길이 끝이 없네.”
“그러게 말이에요.”
그렌과 야엘은 한참을 걸어야 했다.
벽을 뚫고 다니는 다크와 달리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통로를 따라 이리저리 헤매고 돌아다녀야 했다.
“어! 뭔가 이리로 다가오고 있어요.”
야엘이 롱 소드를 꺼내며 멈춰 섰다.
미리 앞에서 정찰을 하고 있는 다크가 뭔가 신호라도 보내준 모양이었다.
그렌은 말없이 그녀의 뒤에 서서 뭔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츠츠츳, 츳츳츳…….
하얀 동혈을 따라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극도로 긴장했다.
점점 소리가 커지며 뭔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마침내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하얀 뼈대만 남아있는 흰개미 떼였다.
야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흰개미예요.”
“아냐. 저건 흰개미 언데드야.”
그렌은 바로 고개를 흔들며 마법을 일으켰다.
“스트렝스, 실드, 샤프니스, 헤이스트!”
야엘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비롯해서 롱 소드와 방패에서 빛이 번쩍였다.
스트렝스 마법은 그녀의 힘을 높여줬고 실드 마법은 방어력을 올려줬다.
샤프니스 마법은 롱 소드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고, 헤이스트 마법은 민첩, 특히 속도를 증가시켰다.
야엘의 전신에 힘이 솟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그렌 님, 고마워요.”
“천만에.”
그녀는 뒤를 힐끗 돌아보며 귀엽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순간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얏!”
야엘은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깡! 우두둑, 뿌득!
그녀는 자신의 무게를 방패에 싣고 차지(charge) 스킬을 썼다.
방패를 이용한 강력한 어택!
전면에 오던 흰개미 언데드 한 마리가 통째로 박살 났다.
서걱서걱, 서걱서걱…….
이어지는 눈부신 검광!
뒤따라오던 흰개미 언데드들이 두 조각, 네 조각으로 잘려나갔다.
하지만 언데드라서 그런지 몸이 잘리고도 계속 꿈틀댔다.
그 모습에 그렌이 서둘러 외쳤다.
“머리를 노려! 코어나 핵이 보이면 그것부터 파괴하고.”
“예스, 마이 로드!”
전투에 들어가자 더 이상 귀엽고 예쁜 야엘은 없었다.
용맹과 투지가 넘치는 한 명의 여기사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녀는 건틀렛과 마찬가지로 신발 위에 덧씌운 사바톤(sabaton)으로 쓰러진 흰개미 머리통을 걷어찼다.
와드득, 뻐걱!
단숨에 머리통이 박살 나며 안에 들어있던 검은 구슬이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흰개미 언데드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침묵했다.
야엘은 실드가 쳐진 방패로 놈들의 공격을 막았다.
틈이 보이면 즉시 롱 소드로 흰개미 언데드의 목을 쳤다.
무릎을 보호하는 폴린(poleyn)으로 달려드는 놈을 찍었다.
정강이와 종아리를 방어하는 그리브(greave)로 로우 킥을 날렸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 바로 사커 킥을 선보였다.
그렌은 뒤에서 야엘을 도와주려다 그만 감탄사만 터트리고 말았다.
그동안 기사는 소드와 방패만 좋아하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달랐다.
롱 소드와 방패는 기본이고 풀 플레이트 아머 자체를 무기로 전신을 전천후로 사용하며 흰개미 언데드를 작살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비단 그렌만이 아니었다.
[마루: 야엘의 전투력이 엄청나네요.] [해모수: 무거운 풀 플레이트 아머를 왜 입나 했더니… 이제야 이유를 알았어요.] [그렌: 엑설런트 중급에서 상급으로 올랐다더니… 정말 장난 아니네.] [마루: 저 정도 능력이면 어지간한 기사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겠어요.] [해모수: 그동안 야엘을 통해 람소드와 최상급 오러 연공법을 배워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는데… 실전에서 쓰는 것을 보니까 저절로 깨달아지네요.]마루와 해모수의 감탄에 그렌은 괜히 자신의 가슴이 다 뿌듯해졌다.
아니 야엘이 자랑스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동안 잘 먹여서 살과 근육을 키운 보람이 있었다.
마나석 광산에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오러도 늘려줬다.
거기에다 나름 깨달음까지 얻자 그녀는 어느새 호랑이의 등에 날개를 단 격이 됐다.
그로 인해 흰개미 언데드 떼는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사세가 기울면 퇴각을 해야 하는데, 확실히 언데드라서 그런지 그저 무조건 달려들기만 했다.
그렌은 이 전투에서 야엘에게 보조 마법을 걸어준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그녀가 앞에서 단 한 놈도 통과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가히 철벽이라고나 할까!
“이놈들은 전리품 하나를 안 주네요.”
“그러게 말이야. 정말 개털인 놈들이군.”
“그냥 갈까요?”
“계속 가보자.”
“예스, 마이 로드!”
굳이 저렇게 깍듯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녀는 자신이 기사라는 것을 잊지 않겠다는 양 계속해서 ‘마이 로드’를 외치며, 주먹을 가슴에 대는 전형적인 기사의 약식 인사를 해댔다.
흰개미 언데드를 통해 여기가 거대 흰개미의 굴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렌과 야엘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미 소문이라도 났는지 흰개미 언데드는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야엘과는 상성이 좋지 않아서 나오는 족족 모조리 박살 나버렸다.
간혹 앞뒤로 동시에 달려들기도 했다.
그럴 때는 그렌이 어스 월(Earth wall) 마법을 써서 한쪽 통로를 아예 막아버렸다.
정상적인 놈이라면 옆으로 굴을 뚫고 들어오면 될 텐데… 역시 언데드라 그런 생각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렌과 야엘은 흰개미 언데드를 수백 마리나 처치하며 진군을 거듭했다.
동혈이 끝나자 매끈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저쪽이에요.”
다크가 알려준 곳은 광장의 반대편 절벽 꼭대기였다.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크가 그렇다고 하니 분명히 가보면 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곳은 흰개미 언데드가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물병을 꺼내 물을 나눠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저게 뭐지?”
그렌은 물을 마시다가 문뜩 한쪽 벽에 새겨진 묘한 문양을 보게 됐다.
얼핏 보니 무슨 시계를 그려놓은 것 같았다.
호기심이 동한 그들은 문양에 가까이 다가갔다.
“모양이 참 희한하게 생겼네요.”
야엘은 시계를 본 적이 없는지 전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마루와 해모수는 문양의 모습을 바로 알아챘다.
[마루: 이건 확실히 시계 모양이에요.] [해모수: 문제는 뭘 뜻하는지 모른다는 거죠.] [그렌: 특별히 뭔가 장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그렌은 자신의 마나를 뿌려서 뭔가 걸리는지 탐색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저건 그냥 누군가가 벽에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야엘이 시장기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앉은 김에 누워 간다고, 가볍게 요리 몇 접시를 꺼내 나눠 먹었다.
물론 그렌은 1인분, 야엘은 3인분을 먹었다.
싸우느라 고생했다고 그녀가 좋아하는 코티아르산 명품 포도주도 한 병 꺼내 마셨다.
배가 부르자 야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이만 갈까요?”
“좋아. 그런데 풀 플레이트 아머는 좀 벗고 가자.”
그렌의 지적에 그녀는 곧바로 풀 플레이트 아머를 해체했다.
그런 후 그에게 선물 받은 마법 주머니 안에 담았다.
그렌이 두 팔을 활짝 벌리자 야엘이 얼른 안겨왔다.
그녀의 두 발이 그의 두 발 위로 올라가고 양팔은 그렌의 몸을 꼭 껴안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는 마법을 펼쳤다.
“레비테이션, 윈드!”
레비테이션 마법과 윈드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자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허공을 날아올랐다.
절벽 꼭대기에 도착한 그들은 바닥에 가뿐히 내려섰다.
“근데 어디로 가지?”
“잠깐만요.”
그렌의 질문에 야엘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둘의 앞에는 벽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저쪽에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요.”
“가보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다크의 말대로 경사진 길을 따라 조금 옆으로 내려가자 개구멍 같은 게 하나 나타났다.
정말 어둠의 정령인 다크가 없었다면 절대로 찾지 못했을 것이다.
“안에 뭐가 있는지 보여?”
“다른 동굴로 이어지는 통로라고 하는데요.”
말대로라면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개구멍, 아니 동혈은 너무 작아서 절대로 걸어갈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동혈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좁은 동혈을 이십여 미터쯤 가자 야엘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로 인해 그렌은 그녀의 엉덩이에 머리를 박았다.
탄력이 넘치는 부분이라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에 뭐가 있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왜 갑자기 멈춰?”
“앞은 절벽이에요.”
“절벽?”
“네, 발광석의 불빛으로는 얼마나 깊은지 알 수가 없어요. 다크를 보냈으니 잠깐 기다려 주세요.”
그렌은 그 자리에 엎드려 쉬기로 했다.
잠시 그 상태로 기다리자 다크가 돌아왔다.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된다고 하네요.”
“그럼 레비테이션 마법을 걸고 내려가면 되겠네.”
“그러려면 먼저 밖으로 나가셔야 해요.”
“그런가?”
야엘이 몸을 뒤집어 눕자 그렌이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그런데 발광석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쪼옥!
그는 야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런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그렌의 입술을 씹어 삼킬 듯 빨아댔다.
장난을 치려다 왠지 완전히 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특이한 상황에서 잠시 블링블링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레비테이션! 윈드!”
그렌의 마법에 두 사람은 가볍게 허공을 떠올랐다.
그러곤 그의 의지대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주위에 뭐가 있는지 몰라서 발광석의 불빛에만 의지해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 문제 없이 두 발이 바닥에 닿았다.
야엘은 풀 플레이트 아머를 꺼내 장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렌이 그녀의 행동을 급히 막았다.
“은밀히 활동할 수 있게 풀 플레이트 아머 말고 레더 아머를 장비해!”
“예스, 마이 로드!”
야엘은 즉시 풀 플레이트 아머를 마법 주머니에 넣었다.
대신 웨어울프 가죽으로 만든 레더 아머를 입었다.
발광석의 불빛만으로 이곳의 크기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굉장히 넓고 큰 광장 같은 곳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서치!”
그렌은 서치(search) 마법으로 자신의 마나를 얇고 넓게 퍼트렸다.
그러다 급히 마법을 멈추고 바위 뒤로 얼른 숨었다.
야엘은 갑자기 자신의 손을 끌고 가는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무슨 이유가 있으려니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어.”
“사람이에요?”
“응, 그런데 마법사도 있는 것 같아.”
일단 사람이 있다니 반가웠다.
동굴에서 평생 갇혀 지내는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는 벗어났다.
하지만 이곳이 적진인지 아닌지 우선 그것부터 살펴봐야 했다.
괜히 반갑다고 적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나가봐야 죽거나 포로밖에 될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은 바위 뒤에 완전히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소리만 들어봐도 다가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발걸음이 경쾌하면서도 절도가 있는 것을 보니 기사나 정예병인 게 틀림없었다.
마법사도 있는지 허공에 환한 빛의 구체들이 둥둥 떠서 날아왔다.
그렌과 야엘은 조심스럽게 바위 사이에 난 작은 틈으로 광장을 엿봤다.
“여기서 잠시 쉬어간다.”
“예, 안토니오 자작님.”
명령을 내린 안토니오 자작이 바위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뒤를 초로의 마법사 하나가 졸졸 따라왔다.
그들의 뒤로 기사들이 따라오고 병사들이 주변으로 넓게 포진했다.
‘이런 제길, 하필이면 이쪽으로 오다니…….’
그렌은 속으로 욕을 했다.
여기서 들키면 최소한 사망이다.
야엘도 그걸 아는지 눈에 힘을 주며 롱 소드의 손잡이를 잡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