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으니 이제 회의를 시작합시다.”
이대근이 진지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약간은 소란스럽던 안채가 일시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오늘 회의를 맡은 김상옥이올시다.”
사전에 교감이 있었는지 대망 슈퍼 오른편 옆집에 사는 김상옥이 일어났다.
“그동안 우리는 생존을 위해 좀비들과 싸워왔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추지 못해서 신속하고 체계적인 대응이 불가능했습니다.”
김상옥의 말에 다들 침중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로 인해 우린 가족들을 잃고 친구들을 잃고 이웃들을 잃었습니다.”
마루는 속으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1차 방벽 안에 살고 있는 13가구!
기적같이 이들 가족 중 그 누구도 아직 피해자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뜩 스치는 생각이 있어 일단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더 이상은 이런 불상사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여기 1차 방벽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가정의 동의를 얻어 새로운 조직인 사신회(四神會)를 조직했습니다.”
짝짝짝짝짝짝!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마루도 얼떨결에 같이 박수를 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얼굴이 상기된 게 정말 반기는 눈치였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김상옥이 다시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사신회의 사신은 동서남북의 방위를 다스리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이렇게 네 마리의 영수(霊獸)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사신도를 보셨을 테니 그 의미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사신회의 목적은 생존과 공동의 번영입니다. 현재 세상은 종말로 치닫고 있습니다. 파이럿 혜성으로 인해 좀비가 창궐했고 당장 우리의 목숨과 재산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힘과 지혜를 겸비한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에 걸맞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바로 이마루 회장입니다.”
짝짝짝짝짝짝!
안채에 모인 사람들이 다시 일제히 박수를 쳤다.
마루는 이게 뭔 일인가 하고 이대근을 쳐다봤다.
마침 이대근도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우리는 이마루 회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이 난국을 지혜롭게 타개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모두가 합의한 대로 사신회의 조직을 공표하겠습니다. 회장 이마루, 고문 이대근…….”
김상옥은 아주 신나서 입에 거품을 물면서 발표를 했다.
마루는 일단 모두에게 한 장씩 나눠준 사신회의 조직도를 참고했다.
조직 자체는 심플했다.
회장 이마루
고문 이대근
동부 1팀: 팀장 김상옥, 부팀장 나석주, 서일
서부 2팀: 팀장 이희영, 부팀장 이상재, 이인영
남부 3팀: 팀장 신규식, 부팀장 윤세주, 오동진
북부 4팀: 팀장 조명하, 부팀장 정인보, 최익현
지원 팀: 팀장 한소신, 부팀장 우성존, 김민정, 서진아, 황병길
네 개의 팀을 만들어 동서남북 사방에 있는 철제 방벽을 보호하는 형태였다.
지원 팀은 황병길을 제외하고 전부 1차 방벽 안에 살지 않는 외지인이었다.
마루는 대충 의도를 짐작할 수 있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회는 회장과 고문, 동서남북 네 개의 팀장과 지원 팀의 팀장이 모여 회의를 진행합니다.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은 특별한 이유 없이 거부될 수 없습니다. 회장이 부재중일 때는 고문이 회장을 대행합니다. 이상입니다.”
김상옥, 아니 이제 동부 1팀 팀장인 김상옥은 깔끔하게 조직 설명을 마쳤다.
곧바로 이대근이 일어나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대근 고문이올시다. 당장 우리 눈앞에 생명의 위협이 존재하는 고로 회의는 최대한 간단히 진행하겠습니다. 이 점 양해해 주세요.”
“…….”
아무도 말이 없자 이대근은 좌중을 살피며 계속 말을 이었다.
“현재 발표한 사신회의 조직 구성에 반대가 있으시면 즉시 일어나서 반론을 제기해 주세요. 아니라면 모두 오른손을 들어 찬성을 표해주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일제히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이대근이 고개를 돌리다가 마루를 보더니 멈춰 섰다.
마루는 아버지가 주는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인해 거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흠, 만장일치로 사신회의 조직 구성이 가결되었습니다. 이제 이마루 회장을 모시고 시급한 현안을 논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짝짝짝짝짝짝!
아까보다 배는 더 큰,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안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루에게 쏠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벅 고개를 한번 숙여 인사를 하고 앉았다.
“회의 진행은 계속해서 동부 1팀장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대근이 바통을 김상옥에게 넘겼다.
김상옥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곧이어 매끄러운 진행과 입담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차 방벽 안의 모든 가정, 아니 이제는 사신회의 회원들이겠군요. 어쨌든 이들에게 가장 시급히 처리해야 할 현안이 뭐냐고 물어봤습니다. 첫 번째가 1차 방벽의 확장이더군요. 두 번째는 2차 방벽 안으로 제발 좀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세 번째가 식량과 식수에 대한 걱정입니다. 이상 세 가지 현안에 대한 이마루 회장님의 고견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상옥의 말이 끝나자 수십 개의 눈동자가 움직여 마루에게 향했다.
마루는 갑작스럽게 조직된 사신회와 원치 않았던 감투에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굳이 돌이키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보다 적극적으로 종말에 대처해 나가는 게 좋을 듯했다.
“부족한 저를 회장으로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왕 회장이 됐으니 한번 잘해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
“1차 방벽의 확장은 저도 진즉에 생각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요청을 해오시니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1차 방벽의 확장은 단순히 철제 방벽과 차단 문을 세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동의가 필요합니다.”
“옳소!”
김상옥이 때맞춰 맞장구를 쳐줬다.
마루는 그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한번 짓고는 말을 이었다.
“기본적으로 사신회는 문원동 주민들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사신회에 들어오게 될 분들은 1차 방벽 확장의 혜택을 가장 먼저 받게 되실 것입니다.”
“아!”
그제야 사신회의 회원이 아닌 1차 방벽 외부의 주민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본적으로 문원동의 모든 골목 사거리에 철제 방벽을 세우는 게 가장 안전합니다. 1차 방벽의 확장에 앞서 사신회 참여에 대한 주민들의 동의를 먼저 구하는 게 우선일 것입니다. 이 일은 아무래도 이대근 고문이 맡아서 처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대근이 마루의 말에 재까닥 대답을 했다.
공적인 자리라는 것을 감안해 그는 정중히 존댓말을 썼다.
마루는 이대근에게 살짝 눈인사를 하고 두 번째 현안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2차 방벽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서남북 4팀은 앞으로 문원동 2차 방벽의 동서남북을 맡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조직을 확대할 필요성이 생깁니다. 이 말은 곧 문원동의 많은 주민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만 하는 참여는 필요 없습니다. 사신회의 4팀은 실질적인 우리의 무력이자 주 전력이니까요.”
“…….”
“앞으로 사신회에 가입하는 주민들은 무조건 가구당 최소 한 명 이상은 반드시 네 개의 팀 중 하나에 들어야 합니다. 이건 사신회의 필수 의무 사항이니 예외는 두지 않겠습니다. 또한 팀원 중에 무력이 뛰어난 자들을 따로 모아서 기동타격대를 조직하려고 합니다. 이 기동타격대는 회장 직속으로 두고 지원 팀을 도와 시급히 처리해야 할 위협에 제일 먼저 대처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루의 시원한 해결책에 모두 은연중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1차 방벽의 확장과 함께 기존 방벽에 대한 보강도 필요합니다. 강화 좀비는 모르지만 구울을 만나게 되면 지금의 높이로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 높게 그리고 더 강하게 보강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 구울!”
구울을 겪어본 사람들은 그 한마디에 방벽을 보강하자는 말에 수긍했다.
“마지막으로 식량은 당분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이대근 고문께서 소명 교회의 창고에 넉넉히 식량을 비축해 놨으니까요.”
“와아아아!”
짝짝짝짝짝짝!
박수와 환호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대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만 식수는 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당장은 전기와 수도가 끊기지 않아 다행입니다만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일단 최대한 집에 물을 많이 받아놓으세요. 주변에 우물이나 지하수가 있는지도 확인해 주시고 만약 없다면 매봉 약수터의 약수라도 파이프로 연결해서 쓸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마루는 이대근을 비롯해 안채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한차례 훑어봤다.
다들 마루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앞으로 주민들의 의견은 일단 팀장들을 통해 수렴하겠습니다. 지금부터 1차 방벽 네 곳의 방어는 동서남북 네 개 팀에서 각각 맡도록 합니다. 더 이상 의논할 현안이 없으면 이만 마치겠습니다.”
이마루의 폐회 선언에 다들 굳었던 얼굴을 펴기 시작했다.
마루는 회의를 마치자 즉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를 붙잡으려는 주민들이 있었지만 이대근과 팀장들에 의해 원천 봉쇄됐다.
마루는 한소신과 우성존을 불러 사신회의 조직도를 넘겼다.
그들은 회의 내용을 전해 듣고는 금방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근데 왜 쟤가 팀장이고 내가 부팀장이야?”
우성존이 살짝 불만을 터트렸다.
허나 한소신이 한마디로 묵살했다.
“형보다 내가 일을 많이 하잖아. 내가 하는 일 형이 다 하면 당장 바꿔줄게.”
“크흠, 아니다. 그냥 내가 양보할게.”
솔직히 감투가 욕심났다.
하지만 한소신이 하는 일을 우성존이 대체할 수는 없었다.
난세에 영웅이 태어난다더니… 다른 건 몰라도 한소신의 업무 처리 능력은 영웅급, 가히 압도적이었다.
마루는 둘이 투덕거리는 것을 보다가 한마디 더 했다.
“앞으로 둘 모두 회의에 참석해! 황 PD님에게도 소식 전하고 과천 공업사 박 사장님에게 연락 좀 해봐!”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 오려고 할까요?”
“과천 공업사는 그렇게 멀지 않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야. 여차하면 빈집 하나 넘기도록 해. 아무튼 너희들이 알아서 잘 해결해라!”
“예.”
“네.”
한소신과 우성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힘없이 대답했다.
마루는 김민정과 서진아도 불러서 사신회의 조직도를 보여줬다.
민정이 당장 그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렸다.
“오빠, 우리 집도 사신회에 가입할게요.”
“부모님에게 물어보고 말하는 거야?”
“네, 아까 메시지 주고받으면서 허락받았어요. 근데 당장 이쪽으로 오고 싶다세요. 좀비들 때문에 집에서 숨어 지내는 게 많이 불안하신가 봐요.”
그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럼 건넛집 1층에 빈방 있으니까 와서 편히 지내시라고 해.”
“정말 그래도 돼요?”
“물론이지.”
마루의 허락에 그녀는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민정은 신이 났는지 그의 팔을 꼭 껴안고는 마구 흔들었다.
전혀 의식하지 않은 그녀의 행동이었지만… 마루는 팔 전체에 느껴지는 몰캉거리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는 진아의 심정은 달랐다.
진아의 가슴은 이미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진아는 결국 마루의 반대편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오빠, 저희도 사신회에 참가하면 안 돼요?”
“너도?”
“네, 어차피 저희 집도 문원1동이고 지금은 뒷집에 살고 있으니까 자격은 되잖아요.”
“그럼 할머니와 같이 가입하도록 해!”
“예, 알겠어요.”
민정은 진아의 행동을 보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입술을 살짝 깨문 민정이 막 뭐라고 따지려고 들자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진아가 잽싸게 떨어져 나갔다.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가는 꼴이 백여우나 다름이 없었다.
한순간에 마루에게 꼬리 치고 섹스어필까지 하며 사라지는 모습이라니……
민정은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