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192
192화
“이기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지지는 않았습니다.”
“양패구상을 당했다는 말이군요.”
“서로 피만 봤습니다.”
“잘했습니다.”
해모수의 말에 임상욱은 눈을 크게 떴다.
“네?”
“잘했다고요. 다음에도 시비 거는 놈이 있으면 다 패버리세요.”
“푸하하하! 이거 말만 들어도 앓던 이가 빠진 기분입니다.”
임상욱은 해모수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파안대소를 하다가 나중에는 배를 잡고 꺼이꺼이 웃기까지 했다.
“상처를 봐드리겠습니다.”
“크흠.”
임상욱은 해모수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할 수 없다는 듯 의자 위에 조심스럽게 다리를 올렸다.
해모수가 왕지현을 쳐다봤다.
그녀는 재빨리 다가와 임상욱의 바지를 위로 걷어 올렸다.
“이런 중상을 입고도 참 잘도 돌아다녔군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치 몽둥이로 찜질을 당한 것처럼 다리 전체가 퉁퉁 부어있었다.
모르긴 해도 뼈도 많이 상한 것 같았다.
이 정도 중상이면 걸어 다니지 못할 정도로 무척 아팠을 것이다.
어떻게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잘 참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모수는 화가 나기도 하고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지금부터 기 치료를 하겠습니다. 내가 가진 내력(內力)을 이용해 치료하는 것이니 절대 소리를 내지마시고 움직이지도 마세요.”
“기 치료 말씀이십니까?”
임상욱은 깜짝 놀랐다.
그의 아버지는 평생 무예를 연마했다.
덕분에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무술을 다 접해봤다.
하지만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흔드는 내력의 고수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기라는 말과 내력이라는 단어에 당연히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해모수: 어째 이거 등골이 쌔한데요.] [그렌: 그냥 고쳐주면 믿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 믿을 수 있게 뭔가 보여줘!] [마루: 차라리 아이언 스킨을 활성화한 다음에 힐 마법을 써봐!] [해모수: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고마워요! 마루 형!]해모수는 마루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음양기를 끌어다 청동 팔찌에 때려 넣었다.
“아이언 스킨!”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작게 혼잣말처럼 시동어를 말했다.
그러자 청동 팔찌에 인챈트된 아이언 스킨 마법진이 발동됐다.
순식간에 그의 몸이 단단해지며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헉! 금강역사(金剛力士)!”
역시 임상욱의 반응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장 금강역사를 말하는 것을 보니 나중에 또 뭐라고 말할지 짐작이 갔다.
그는 못 들은 척하고 임상욱의 다리에 손을 댔다.
“힐!”
작게 속삭이듯 시동어를 말했다.
프릴 반지에 인챈트된 힐 마법진이 즉시 발동했다.
“아!”
임상욱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중상을 입어 통증이 심했던 다리가 시원해졌다.
아니 다리에서 시작된 청량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가 온몸이 다 상쾌해졌다.
기적은 자신의 눈을 통해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시퍼렇게 멍이 들고 잔뜩 부어있던 다리!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갔다.
가만히 보니 어렸을 때 살짝 삐끗했던 허리까지 시원해졌다.
[해모수: 성공이에요.] [그렌: 힐 마법이잖아. 당연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마루: 그래도 가만히 있어라. 너무 쉽게 고쳐주면 약발 안 받는다. 힘든 척하면서 조금 더 인상을 써봐!] [해모수: 이렇게 말이죠?] [마루: 오오! 연기에 소질이 있네. 잘하고 있어. 여기서 땀까지 한 방울 빼주면 딱 좋은데…….]기왕 도와주는 김에 충성심도 좀 올리고… 생명의 은인이라는 부담감도 팍팍 씌워줄 생각이다.
뭐 사기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알아챌 사람도 없고 치료를 해주는 것은 사실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휴우! 이제 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해모수는 일어나면서 일부러 비틀거렸다.
임상욱이 얼른 일어나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굳이 냄새나는 사내 품에 안길 이유가 없었다.
왕지현이 다가오자 바로 그녀에게 몸을 기댔다.
“괜찮아요?”
“난 괜찮소!”
해모수는 왕지현의 등에 손을 대고 살짝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의 신호를 알아채고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렇다고 왕지현이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좀 이상하다는 것은 진즉에 눈치챘다.
뭔가 신기한 물건도 잘 가져오고, 상상도 하지 못할 일도 척척 해낸다.
자신도 보통 사람들과 많이 다른 기이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보니 해모수도 만만치 않게 비밀이 많은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임상욱은 기절할 듯 놀랐다.
손으로 다리를 만져보다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어봤다.
바지를 걷어서 다시 한번 다리를 살펴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기도 했다.
‘완치됐다. 이건 기적이야.’
또 하나의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금강역사! 금강신!”
미신이 팽배한 사회라서 그런지 이런 기적은 사람을 신격화해 버린다.
하지만 해모수는 일단 그냥 내버려 뒀다.
“오랜만에 내력을 써서 힘 조절에 실패했소. 조금 쉬었다가 다친 관도들을 치료해 주겠소.”
“태사부! 아니 해 도방! 정말 은혜가 하해(河海)와 같습니다.”
“뭐 은혜랄 것까지야…….”
그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굳이 은혜를 강조하는데 거기에다 초를 칠 필요는 없었다.
얼마나 감동했으면 숨겨야 할 도방이란 직책까지 언급했겠는가!
시비들이 차를 가져오다 해모수의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 소동에 해모수가 벌떡 일어나 차는 물렸다.
“차는 됐으니 어서 다친 환자들을 보러 갑시다.”
“예, 태사부!”
처음에는 그냥 해모수를 존중해 주는 의미로 도방이라는 것을 밝힐 수 없어서 태사부라는 직책을 부여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속은 완전히 해모수를 태사부로 모시고 있었다.
원래 운동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의리가 있고 충성심이 강하다.
단점이라면 이렇게 쉽게 홀라당 넘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임상욱은 해모수를 모시고 내원으로 들어갔다.
중간에 문이 하나 있었다.
봉을 든 장정들이 물샐틈없이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해모수는 그들의 눈이 하나같이 커다랗게 변하는 모습을 보고도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여깁니다.”
내원의 별채 한 곳에 약 냄새가 진동했다.
“도대체 몇 대 몇으로 싸웠던 겁니까?”
“이백 대 백입니다.”
“두 배로 싸웠는데도 이렇게 됐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우리가 백이었습니다.”
“아!”
듣고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반대였다면 아마 짜증이 많이 났을 것이다.
“모두 나오라고 하세요!”
“예!”
반론은 없었다.
임상욱은 직계제자들을 불러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무려 팔십여 명의 관도들이 몸 곳곳에 붕대를 감은 채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이들이야말로 현재 해동무관의 정예이자 주축이었다.
“금강역사다!”
“금강신이 재림했다.”
그들의 반응도 역시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분은 우리 해동무관의 태사부시다. 오늘 너희를 치료해 주시기 위해 특별히 왕림하셨다.”
와아아아!
임상욱의 말에 해동무관이 떠나갈 듯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참 말이라는 게 무섭다.
해모수는 그냥 가다가 들렀을 뿐인데… 지금은 그들을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어 왕림한 게 되어버렸다.
“나를 봐라! 태사부의 기 치료를 받고 이렇게 다 나아버렸다.”
폴짝폴짝!
채신머리없이 임상욱은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자신의 바지 한쪽을 걷어서 털이 복슬복슬한 맨다리를 보여줬다.
“우아아아!”
그의 다리가 퉁퉁 붓고 새파랗게 멍이 들었다는 것을 많은 관도들이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부터 상처를 입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다.
“너희도 곧 나처럼 될 것이다. 그러니 한 명씩 줄을 서거라!”
눈치 빠른 관도 하나가 잽싸게 의자를 가져왔다.
해모수는 눈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때부터 그는 해동무관의 관도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나았다. 나았어. 내가 나았다고…….”
대부분 골절상이었다.
“어라? 진짜 다 나았다.”
하지만 그중에는 몽둥이에 맞아 심각한 내상을 입은 자도 있었다.
“이건 기적이야.”
힐 마법은 외상에 직빵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상도 잘 치료한다.
“태사부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반응은 격렬해졌다.
다들 두 손을 들고 천세를 외쳤다.
“태사부님! 천세!”
“금강역사 천세!”
“금강신 천세!”
해모수는 신이 나서 힐 마법을 난사했다.
더 이상 연기는 필요 없었다.
아무도 별채를 떠나지 않았다.
치료를 받은 이들은 전부 그의 제자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내외원에 있던 관도들까지 모두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
기적을 체험한 자들은 전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중급 마나석을 동력으로 삼은 프릴 반지였다.
그런데 얼마나 난사를 해댔는지 중간에 상급 마나석으로 마나를 보충해 줘야 했다.
“한 말씀 하시죠!”
안 그래도 입이 간질간질했는데 임상욱이 멍석을 깔아줬다.
해모수는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나는 해동무관의 태사부다!”
“…….”
“우리 해동무관을 대적한 놈들을 전부 부숴버린다.”
“와아아아!”
불이 났는데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중상에서 단번에 완치된 그들의 눈에 투기가 솟구쳤다.
임상욱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서 속삭였다.
“당장 중화무관으로 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이대로 가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니… 도복 두 벌만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임상욱은 신이 나서 제자들과 관도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나름 치밀하게 지시를 했다.
잠시 후, 해모수와 왕지현은 내원의 본채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임상욱이 가져다준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일반 관도의 도복은 아니었다.
해모수의 것은 태사부 전용 도복이라 근엄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왕지현의 몫으로는 여제자의 도복을 가져왔는데, 너무 잘 맞아서 몸매가 훤히 드러난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있었다.
“상공! 관도들을 어떻게 치료하신 겁니까?”
“음양기와 오러를 섞어서 사용했소. 나만의 비법이라고나 할까!”
“그렇군요.”
그녀는 금세 납득했다.
음양기와 오러를 섞어서 썼다는 말에 자신은 쓸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쩌려고 이러세요?”
“우리 애들을 때렸으니 내가 가서 패줘야지.”
“아니 태사부가 애들 싸움에 나선다고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왕지현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온몸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해모수!
만약 사람들의 눈에 띈다면 주의를 너무 끌게 된다.
그의 활약은 이 정도로 적당히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차라리 제가 나서겠어요.”
“지현이?”
“태사부의 사매로 나선다면 체면을 구기지 않아도 될 거예요. 무엇보다 저는 여자가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 기가 막힌 방법이 있었네.”
여자한테 처맞은 중화무관이라는 소문을 낸다면… 아마 놈들은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그럼 얼굴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오다가 보니까 복도에 곤곡(崑曲)에 쓰는 가면이 있었어요.”
“아! 그 고전 희극에 쓰는 가면!”
해모수는 그제야 왕지현이 어떻게 차려입고 가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임상욱의 제자들을 불러 복도에 걸린 가면을 전부 가져오라고 했다.
탁자 위에 갖가지 색깔과 모양의 가면을 올려놓았다.
사천(四川)의 전통극인 천극(川劇)에서 볼 수 있는 가면술!
변검(變瞼)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마루: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것은 좀 과한데.] [그렌: 내 생각도 그래. 차라리 눈만 가리든가.] [해모수: 그럼 입은 드러내 놓고 얼굴의 상단만 가리게 자를게요.] [그렌: 그게 좋겠다.]해모수는 마루와 그렌과 의논한 결과 가면을 잘라서 쓰기로 했다.
“난 노란 가면, 지현은 저 하얀 가면이 좋겠소.”
“저도 하얀 게 마음에 드네요.”
“이대로는 너무 많이 가리는 것 같으니 요렇게 자르는 게 좋겠소.”
해모수가 손가락으로 가면 위를 만졌다.
왕지현이 바로 알아듣고 품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스슥, 스스슥, 사각사각!
비수를 가볍게 잡고 흔들자 가면이 자연스럽게 잘렸다.
“난 눈만 가려도 될 것 같소.”
“그래요. 그럼.”
스스슥, 스슥, 사각사각!
다시 한번 왕지현의 비수가 가면을 스쳤다.
그러자 눈만 가려지는 멋진 가면이 만들어졌다.
얼핏 보면 서양의 가장무도회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가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