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1
21화
“막내 처남, 안사람이 밖에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와서는 그동안 참 많이도 울었다네. 내가 옆에서 달래느라 무지 고생했어. 이제 이렇게 막내 처남의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기뻐서 춤이라도 추게 될 게야.”
“큰누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안채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네.”
“알겠습니다.”
“넌 먼저 안채로 들어가 보아라. 난 잠시 네 매형과 얘기 좀 하고 들어가겠다.”
“네, 아버지.”
해모수가 큰누나를 보려고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해태영은 같이 따라 들어가려는 매형의 큼지막한 팔뚝을 부여잡고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가 매형과 형들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려는 것을 보며 해모수는 발걸음을 재촉해 안채로 뛰어갔다.
“누나! 나 왔어. 해모수가 왔다고.”
“어머, 막둥아! 이게 웬일이니? 너 살아있었구나?”
방에서 조카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던 큰누나 해지인!
해모수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해모수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봤다.
그러더니 이내 덥석 끌어안고는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해모수가 살아 돌아왔구나. 하느님!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감사합니다. 으흐흐흑!”
“누나! 엉엉엉!”
해지인과 해모수는 서로를 부여안고는 마당에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천지가 떠나가라 울던 해지인과 해모수의 난리굿은 해태영의 등장으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아버지?”
“지인아, 잘 지냈느냐?”
“네, 아버지. 아니 어쩐 일로 여기를 다 찾아오셨어요?”
“허어! 장인이 사위 얼굴 좀 보러 왔는데 오히려 큰딸이 문전 박대를 하는구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잘 오셨어요. 어서 안방으로 들어가세요.”
정신을 차린 해지인이 서둘러 아버지 해태영을 안방으로 모셨다.
그러자 해모수도 눈물을 닦고는 그의 뒤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장인어른, 전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아 조금 이따가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식사부터 하시고 푹 쉬고 계십시오.”
“알겠네. 내 걱정하지 말고 자네는 어서 가서 일 보시게.”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
매형인 장은철이 해태영을 향해 넙죽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해지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절부터 받으세요.”
“오냐! 오랜만에 우리 큰딸 절 한번 받아보자꾸나.”
해지인은 두 손을 곱게 모으더니 사뿐히 절을 올렸다.
해태영이 흐뭇한 미소를 짓자 해지인도 발그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돌연 얼굴을 옆으로 확 돌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너희들은 지금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니? 할아버지 오셨는데 인사도 드리지 않고?”
“할아버지!”
“하라부지!”
조카 둘은 어머니의 호통 소리에 놀라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그러곤 해태영의 품에 안기며 온갖 애교를 부려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해태영은 헤벌쭉 웃기 바빴다.
해모수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시장하시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금방 저녁밥 지어올게요.”
“아니다. 난 괜찮다. 천천히 하도록 해라.”
해태영은 괜찮다고, 천천히 하라고 했지만 사실은 몹시 시장했다.
해모수의 배 속에서도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니 굳이 더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해지인은 간만에 솜씨를 부려 맛있는 요리도 하고 닭도 한 마리 삶아서 들어왔다.
거한 상을 받게 된 해태영은 반가워하는 자신의 위장과는 달리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너무 무리를 하는 게 아니냐? 나중에 사위한테 한 소리 듣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호호호, 아버지도 참 별걱정을 다 하시네요. 아들 둘 낳고 이렇게 살림까지 알차게 잘하는 저 같은 부인을 그이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어요? 걱정 딱 붙들어 매시고 어서 맛있게 드시기나 하세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해태영은 해지인의 당돌한 말에 그만 피식 웃음을 흘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누나, 잘 먹을게.”
“그래. 우리 막둥이 많이 먹고 쑥쑥 커라.”
“에이, 누나도 참!”
해모수는 해지인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으며 정말 배 터지도록 밥을 먹었다.
옆에서 먹고 싶어서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 조카들의 강렬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해지인의 해모수 사랑은 상 위에 닭 뼈가 무수히 쌓일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결국 조카 둘은 닭 뼈만 남은 상을 보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걸 본 누나는 결국 회초리를 들고 나서야 아이들의 울음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 모습에 해태영은 그저 흐뭇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뒤늦게 매형이 들어와 안방을 내주겠다고 했다.
단칼에 거절한 해태영은 건넌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배가 불러서 그런지 졸음이 살살 파리처럼 꼬이고 있었다.
해모수도 살짝 졸려서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대기 시작했다.
그즈음 안방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친 매형이 슬그머니 건넌방으로 들어왔다.
“장인어른, 아까 말씀하신 것 알아봤습니다.”
해태영은 장은철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곤 바로 정신을 차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벌써? 용케도 금세 알아냈군.”
“운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금가락지를 팔아 은자로 바꿔서 여기저기 조금씩 뿌린 것이 주효했습니다.”
해태영과 해모수는 매형인 장은철의 입을 쳐다보며 눈을 빛냈다.
“들어보니 대충 답이 나오더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처남은 완벽하게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사기를 당했다고?”
“그렇습니다. 북현에 사는 한 지역 유지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군역을 갈 나이가 되어서 고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때 꾀가 많은 북현 촌장의 권유를 받고 동현의 촌장을 소개받아 곧바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동현의 촌장은 고려의 유민으로 호적에도 올라가지 않은 세 처남을 끌고 가서 그 지역 유지의 세 아들로 둔갑시켜 군적에 올려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세 아들이 지금 남을 대신해 군역을 살고 있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이런 쳐 죽일 놈의 새끼들!”
해태영은 그제야 왜 자신과 가족들이 동현 마을에서 그렇게 억울하게 쫓겨나야만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결국 모든 일은 북현과 동현의 촌장 그리고 이름 모를 지역 유지의 음모에 기인한 것이었다.
아니 해씨 일가가 고려의 유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발생한 사건인지도 몰랐다.
해모수는 일의 전모를 파악하자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러나 이내 불같은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 두고 보자. 내 반드시 이 원한은 백배 천배로 갚아주겠다.’
해모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부르르 떨었다.
얼마나 그의 분노가 컸는지 그의 몸에 빙의된 마루와 그렌마저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그렌: 해모수, 정신 차려!] [마루: 원한은 가슴에 차곡차곡 잘 쌓아두도록 해! 하지만 지금 아무리 이를 갈아봤자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복수를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해. 그러니까 지금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먼저 형들을 군역에서 빼낼 생각부터 하자.] [해모수: 으으으으, 네.]다행히 해모수는 그렌과 마루로 인해 금세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마루가 해준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원한을 갚는 것도, 복수를 하는 것도 전부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당장은 힘이 생길 때까지… 그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이었다.
“매형, 그럼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겠네요?”
“그렇지. 일단 이 일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서 이뤄진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잘 얘기하면 곧 풀려날 수도 있어.”
장은철의 말에 해모수가 반색을 하자 해태영이 옆에서 고개를 모로 저었다.
“북현과 동현의 촌장 그리고 지역 유지가 개입된 일이니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게야. 마음 같아서는 그놈들의 비리를 만천하에 폭로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오히려 일이 틀어질 가능성이 높아. 차라리 뇌물을 써서 은밀하게 일을 해결하도록 해보세.”
“예, 알겠습니다.”
장은철은 해태영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나이 먹은 어른의 말은 오랜 삶의 경험을 통해 나오는 지혜다.
장은철은 해태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보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해태영과 해모수 그리고 장은철 셋이 머리를 맞대고 머리를 굴렸다.
궁리 끝에 찾은 방법은… 역시 담당관을 은자로 구워삶아서 조용하게 일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세 처남이 배속된 곳은 위해위(威海衛)라고 합니다. 일단 위해위 지휘첨사(指揮僉事) 밑에서 일하고 있는 담당관이 누군지 알아보겠습니다.”
“고맙네.”
“천만에요. 세 처남이 억울하게 군역을 지고 있으니 이 일은 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 지금 당장 나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시간에?”
“차라리 지금이 일을 알아보는 데 적당한 시간입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다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주루에서 술 한 잔씩 걸치고 있을 겁니다.”
“음, 그렇다면 지금 나가봐야겠군.”
“네, 장인어른!”
“그럼 잘 좀 부탁함세.”
“저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장은철은 생각보다 행동파였다.
그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방으로 건너가 아내 해지인에게 뭔가 당부를 하는 것 같더니 금세 겉옷 하나만 들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마루: 일이 쉽게 풀렸으면 좋겠네요.] [그렌: 그러게 말이야. 두 촌장과 지역 유지가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려고 손을 쓰기 시작하면 오히려 해모수의 형제들의 명줄이 짧아질 수 있어.] [마루: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고 보니 일단 해모수의 아버지가 지혜롭게 대처를 잘했네요.] [해모수: 얘기가 그렇게 돌아가는 거예요?]마루와 그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해모수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루: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이라잖아.] [해모수: 나도 그 말 들어봤어요.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려있다는 말이잖아요.] [마루: 그래 맞아. 아직은 뭐라고 단정할 수 없으니 좀 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자.]군역에 끌려간 세 형을 데려오려는 일이 잘못되어 죽기라도 하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은 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루의 마지막 말에 해모수는 뛰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길을 걷느라 피곤했나 보다.
해태영은 벌써 잠에 빠져 낮게 코까지 골고 있었다.
[그렌: 그것보다 난 해모수가 군역을 지어야 할 나이가 됐다는 게 걱정이야.] [마루: 고려의 유민은 호적에도 올리지 않는다던데 왜 군역을 지는지 모르겠네요.] [그렌: 그러게 말이야.] [해모수: 제가 알기로는 군역을 지면 고려의 유민도 이 나라에 호적을 올릴 수 있대요.] [마루: 그래? 그럼 어찌 됐든 해모수는 곧 군역을 지겠구나.] [해모수: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마루: 그럼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잖아.] [그렌: 대책? 무슨 대책?]그렌이 되묻자 마루는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마루: 이 시대에 군역을 진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마찬가지예요. 게다가 지금은 왜구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시기입니다. 잘못돼서 왜구들과 전투라도 벌이게 되면 해모수는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겁니다.] [그렌: 뭐야? 그럼 이거 큰일 났구먼!] [마루: 큰일은 확실히 큰일이죠.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빨리 좋은 수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렌: 마루! 혹시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해모수: 마루 형은 머리가 좋으니까 분명히 좋은 수를 생각해 낼 거예요.] [마루: 내가 머리가 좋다고? 하하하! 살다 보니 별말을 다 듣겠네. 어쨌든 지금 당장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무기와 갑옷이라도 좋은 것을 챙겨주는 것밖에는 없어요.] [그렌: 무기와 갑옷? 갑자기 무슨 무구(武具) 타령이야?] [마루: 인명경시(人命輕視) 풍조(風潮)가 만연한 이 땅에서 해모수가 군에 들어왔다고 누가 병장기와 갑옷을 착착 챙겨준답니까? 천만의 말씀! 모르긴 해도 다 낡은 군복 한 벌과 죽창 하나 던져주고 말 겁니다. 그걸 들고 왜구와 싸우면 백전백패(百戰百敗)! 아니 그냥 100퍼센트 죽은 목숨입니다.]그렌은 마루의 말을 듣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살고 있는 마탑 주위의 영지들도 이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영지전이나 전쟁이 일어나면… 징집한 병사들에게 병장기와 방어구를 챙겨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죽창이나 나무 방패 하나 던져주고 돌격하라고 명령을 내리기 일쑤였다.
병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소모품인 고기 방패로 여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