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궁녀들은 서슬 시퍼런 금의위 천무의 명령에 감히 말대꾸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은 전각 안에서 침실을 찾아내고 황손을 침대 위에 눕혔다.
이제 겨우 네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
그러나 지체 높게도 그는 명 태조 주원장의 장손(長孫), 주윤문(朱允炆)이었다.
명나라의 제2대 황제가 될 혜종(惠宗) 건문제(建文帝)라는 말이다.
원역사에서도 주원장의 장남이자 황태자인 주표가 일찍 죽는 바람에 황제가 됐었다.
아마 이번에도 비슷하게 주표가 화재로 일찍 사망해서 황제가 될 것이다.
해모수는 잠시 서서 불타는 황궁을 바라봤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맞게 세워진 만세산(萬歲山)!
그 앞에 도도한 모습으로 서있던 궁성!
하지만 지금은 초라하게 불에 타서 시커먼 연기만 피워 올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이거 뒷감당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뒤늦게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해모수였다.
그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서있자 금의위 교위들의 얼굴도 서서히 굳어갔다.
[마루: 해모수! 왜 그래?] [해모수: 지금 현타가 밀려오네요.] [그렌: 현자 타임을 말하는 거야?] [마루: 무념무상의 현실 자각 타임이라는 의미로 최근 많이 쓰이고 있는 말이에요.] [그렌: 내 말은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갑자기 왜 현실 자각을 했냐는 말이야.] [해모수: 모르겠어요.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게 아닌지 걱정이 돼요.]마루는 왠지 해모수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힘없는 민초에서 역사를 바꾼 주인공이 되어버렸으니 괴리감도 엄청났을 것이다.
[마루: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역사를 바꿔버렸으니…….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역사 지식은 크게 도움이 안 될지도 몰라.] [그렌: 그래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일순간에 변하지는 않을 거야. 원역사의 흐름을 이어가려는 귀소 본능 같은 게 생길지도 모르지.] [해모수: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그렌의 심오한 철학적 발언이 해모수에겐 한낱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루: 당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야. 일단 뒷수습부터 하고 나서 고민은 시간 날 때 천천히 하자고.] [그렌: 맞아. 해모수! 정신 바짝 차리고 우리가 세운 계획대로 밀고 나가자.] [마루: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최악의 경우에는 그냥 가족만 데리고 튀어도 한평생 잘 먹고 잘살 수 있잖아.]해모수는 마루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송(宋)나라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에도 삼십육계 주위상책(三十六計 走爲上策)이라 하지 않았던가!
정말 최선을 다해도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해모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이 마치 금의위 교위들을 노려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깜짝 놀란 금의위 교위들은 덜컥 겁을 집어먹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해모수는 더욱 눈에 힘을 주며 묵직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자가 있는가?”
“제가 알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어찌 아느냐?”
“저는 오늘 모양 지휘사를 호종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해모수를 알고 있는 금의위가 존재했다.
그러니 괜한 뻥을 치는 것은 삼가는 게 좋았다.
“그렇구나. 그럼 내가 정식으로 천무의 직위를 받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겠지.”
“예, 모양 지휘사께서 직접 임명하셨다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다.”
“…….”
뜬금없는 그의 말에 흥미라도 동했는지 다들 슬며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제 모두 현실을 직시하라!”
“…….”
“황실은 정체 모를 괴한이 저지른 방화에 몰살을 당했다. 황상께서 승하하시고 황자들도 모두 삼도천을 건넜다고 들었다. 개국공신은 물론이요 공신, 고관대작, 고위 관리, 군부의 실세들까지 전부 유명을 달리하셨다.”
“아!”
누구도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
해모수는 적나라하게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몽땅 까발렸다.
금의위 교위들의 마음이 당장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대로 가면 금의위는 황상과 황실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 모조리 숙청당하게 될 것이다.”
“예에?”
경황이 없어서 미쳐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허나 잠깐만 머리를 굴려봐도 그의 말이 지극히 타당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금의위 교위들의 마음의 동요가 점점 극에 달해갔다.
이건 당연히 해모수가 의도하는 바였다.
“헌데 난 오늘 황손을 불에 타 죽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황태자께서 가장 아끼신다는 장남을 내가 구한 것이다. 이제 누가 다음 보위를 이을 것 같은가?”
쿵!
모두의 마음속에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아찔한 발언이었다.
그제야 금의위 교위들은 다들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역시 다음 보위는 황태자의 차지였다.
그렇게 되면 어린 황손은 당연히 황태자의 위에 오를 것이다.
물론 이들은 황태자 주표가 이미 불에 타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황손인 주윤문이 보위를 물려받게 될 것도 아직은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무튼 앞으로 황태자가 될 황손을 구한 공을 세운 천무가 그들의 눈앞에 서있었다.
세상 어디를 가든, 줄을 잘 서야 출세도 하고 살아남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해모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모든 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나를 돕는 자를 결코 내치지 않을 것이다. 내 모든 힘을 다해 지키고 함께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자! 이제 묻겠다. 누가 나를 돕겠는가?”
“제가 돕겠습니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저를 써주십시오.”
해모수의 말에 모두들 자신이 돕겠다고, 함께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좋다. 나와 함께하고자 하는 자는 이 우편에 서라!”
우르르!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의위 교위는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우편으로 이동했다.
그들도 참수당하지 않고 살아남고 싶은 것이다.
해모수는 금의위 교위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 중에서 누가 믿을 만하오?”
“제가 한번 골라보겠습니다.”
그의 작은 속삭임에 왕지현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수십 명의 금의위 교위 중에 열두 명을 추려냈다.
그나마 가장 카르마가 맑고 깨끗한 편에 속한 자들이었다.
“차례로 이름을 말하라!”
“금의위 교위, 장일평입니다.”
“금의위 교위, 왕서이입니다.”
“금의위 교위, 고진삼입니다.”
“금의위 교위, 남사성입니다.”
“금의위 교위, 오추량입니다.”
“금의위 교위, 육소광입니다.”
…….
열두 명의 이름을 모두 들은 해모수!
그는 일단 이들을 자신의 앞으로 불러 모았다.
“장일평 교위는 지금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든 금의위를 끌어모아 경성을 틀어막아라!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충!”
장일평이 그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미 해모수와 함께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이다.
“만약 명령에 불응하는 자가 있거든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체포해서 구금해 둬! 심문은 나중에 시간 남을 때 하기로 하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했지?”
“충!”
지금부터 그가 금의위를 통째로 접수하겠다는 뜻임을 모를 리 없었다.
해모수는 장일평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고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왕서이 교위는 보옥위로 가서 전 병력을 끌고 경성으로 들어와라!”
“충!”
해모수가 현재 공식적으로 부릴 수 있는 병력은 보옥위가 유일했다.
그러니 일단 그들을 빨리 불러들여 경성 안을 장악해야만 했다.
“고진삼 교위는 금의위의 역사들을 동원하여 금위군(禁衛軍)을 장악하라!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반역죄로 즉참하라.”
“충!”
고진삼이 반역죄라는 말에 손을 벌벌 떨며 대답했다.
“남사성 교위는 황실의 다른 생존자를 찾아서 나에게 보고하라!”
“충!”
남사성은 비교적 쉬운 임무라서 그런지 희색이 만연했다.
하지만 해모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아마 절대 웃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추량 교위는 금의위 역사들을 데리고 오군도독부를 장악하라!”
“추웅!”
오군도독부의 실세들은 이미 전멸한 상태다.
그러니 남은 자들을 구워삶는 정도는 금의위의 교위들에게는 아마 일도 아닐 것이다.
“육소광 교위는 금의위 부속기관인 북진무사 산하의 다섯 개의 위소 중 나머지 네 위소를 총동원하여 경사의 외곽성(外廓城)을 장악하라! 당분간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야 할 것이다.”
“충!”
해모수는 그 뒤로도 나머지 교위들에게 각각 임무를 할당했다.
“황궁의 창고와 비고를 장악해라!”
“환관들을 모아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사망자 명단을 작성해 오라!”
“화재를 진압하고 불온한 자를 색출하라!”
“황성을 폐쇄하고 모든 대신과 관리들을 억류하라!”
“성산일호를 즉시 경사로 불러들이고 산동의 성산백호소에 밀지를 전하라!”
“경사에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허락받지 않은 자의 출입을 금지하라!”
열두 명의 교위가 모두 임무를 할당받자 그는 나머지 교위들을 쳐다봤다.
“너희들에게도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지금 임무를 할당한 열두 명의 교위들에게 협조하고 전력을 다해 도와라! 제일 공이 큰 자에게 천무의 자리를 내릴 것이다.”
“충!”
이번에는 모든 금의위 교위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해모수는 천무의 패와 직인을 내주어 명령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런 후 곧바로 금의위 교위들을 사방으로 내보냈다.
우두두두두!
개미 떼처럼 흩어지는 그들을 보며 해모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대사(大事)가 성공할지 어떨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정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떠나버릴 것이다.
하지만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이 잘 진행된다면, 해모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엄청난 권력과 막강한 세력, 화수분과 같은 재력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를 따르는 금의위 교위가 수십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곧 소식을 전해 들은 금의위 교위들이 그의 밑으로 속속 모여들 것이다.
그리고 해모수가 아직 까지 않은 패 하나가 전각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경사의 사정에 밝고 금의위의 행사에 정통한 이가 누군가?”
“사공명 교위입니다.”
해모수의 말에 모두가 나이가 지긋한 금의위 하나를 추천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린 사공명 교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손수 사공명 교위를 일으켜 주었다.
“내가 많이 부족하니 잘 좀 도와주게.”
“충!”
해모수의 말을 들은 사공명은 이마를 땅에 박고 절을 했다.
“일어나시게!”
사공명이 일어나자 해모수는 곧 그에게 전권을 주어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이내 자신감을 가지고 빠르게 일 처리를 했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이를 알고 있다면 소개시켜 주게.”
“양중달 교위가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찾아올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명령서 한 장만 작성하면 곧바로 튀어올 겁니다.”
“그럼 당장 불러주게.”
사공명은 즉시 명령서 한 장을 작성해 해모수의 인장을 찍었다.
“이걸 삼산문에 있는 양중달 교위에게 전해주게!”
“알겠네!”
금의위 교위 하나가 싫은 내색도 없이 그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해모수의 오른팔이 되었으니 필히 사공명은 승진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사공명은 잠시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해모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 천무께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뭐든지 물어보게.”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궁성의 중앙을 가리켰다.
“불에 타지 않은 중궁(中宮)으로 즉시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여긴 너무 외진 곳이라 황성은 물론이고 궁성도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지.”
해모수가 선뜻 허락을 하자 사공명은 더욱 용기를 내었다.
“황손도 반드시 같이 이동해야 합니다.”
“좋아.”
“위독하다고 들었는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황손이 쉽게 요절할 상은 아니니 너무 걱정 말게.”
“알겠습니다.”
사공명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해모수의 태도에 일단 안심했다.
금의위의 상전들은 하나같이 날카롭고 까탈스러웠다.
게다가 교활하고 잔인하기가 말도 못 할 정도라서 믿고 따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