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그런데 어린 천무는 보기와는 달리 대범하고 화통했다.
일 처리도 시원시원했고 부하들에게 일을 주면 믿고 맡기고 있었다.
사공명은 이런 해모수가 마음에 들었다.
원래 그는 조언을 잘 하지 않았다.
상사가 기분 나빠 하면 자신만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모시게 된 웃전은 그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 따라와라!”
해모수는 결정을 내리자 곧바로 움직였다.
침실로 들어가자 궁녀들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어의도 찾아와서 황손을 진맥하고 있었다.
“어떻소?”
“크흠, 아무래도 폐가 크게 상한 듯싶습니다.”
어린 금의위가 들어와서 대뜸 물어보니 기분이 좀 상했나 보다.
하지만 눈치가 전혀 없는 어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허리에 찬 천무의 패만 보고도 그는 금세 감을 잡고 정중히 존댓말을 했다.
“중궁으로 황손을 모시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으음, 조심히 옮기면 괜찮을 겁니다.”
당연히 환자를 함부로 옮기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어의는 감히 반대를 하지 못했다.
궁녀를 통해 대충 그가 누구이며 무슨 공을 세웠는지 들었던 것이다.
“너희들은 황손을 중궁으로 모실 준비를 하거라!”
해모수는 궁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즉시 들것을 가져와 황손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궁녀들을 뒤따라가며 그는 어의에게 슬쩍 물어봤다.
“오늘밤 궁성에 큰 흉사가 난 것은 알고 계시죠?”
“그렇습니다.”
어의는 해모수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황상이 승하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어의의 대답에 한쪽 가슴이 쑥 내려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단 시작은 순조로웠다.
“그럼 다음 보위를 이을 황자들은 생존해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전부 변을 당하셨습니다.”
“그럼 한 분도 생존하신 황자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현재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소문을 낼 수는 없으니 누군가의 입으로 이런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런데 발 빠르게도 황궁의 어의들이 이런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줬다.
“이거 큰일 났군요.”
해모수는 마음과는 달리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와중에 어의가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을 전해줬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황손의 친모이신 황태자비 여씨가 살아계신다는 점입니다.”
“그건 정말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이제까지 들은 얘기 중에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어차피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황제가 된다고 해도 당장 정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년이 될 때까지 누군가는 황제를 대신해 명나라를 통치해야만 한다.
그 일 순위가 바로 황태자비 여씨였다.
“당장 궁녀를 보내 중궁으로 모시고 와야겠습니다.”
“네, 그러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 다치진 않았습니까?”
“황태자비께서도 갑작스러운 화재에 그만 팔에 화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런!”
해모수는 정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마루: 우와! 이거 아주 제대로 판을 깔아주네.] [그렌: 힐 마법 두 방이면 탄탄대로가 열리겠다.]마루와 그렌도 두 손을 번쩍 들며 좋아했다.
사실 말이 쉽지 이런 절호의 찬스가 맨날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해모수: 정말 좋은 기회가 찾아왔어요.] [마루: 일단 황태자비부터 치료해 줘야겠다.] [그렌: 맞아. 어머니를 치료해 주면 아들을 위해서 매달리지 않고는 못 버틸 거야.] [해모수: 그때 어렵게 황손을 치료해 준다면 당연히 생명의 은인이 되겠지요.]마루와 그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루: 퍼펙트한 시나리오야!] [그렌: 하지만 해모수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기적이기도 하지.] [해모수: 그런데… 우리 이거 너무 사악한 거 아니에요?]해모수의 말에 마루와 그렌은 너무도 쉽게 그 말을 인정을 했다.
[마루: 맞아. 알고 보면 참 사악한 방법이지. 병 주고 약 주고 말이야.] [그렌: 그래도 어떡하겠어? 해모수와 왕지현 빼고는 아무도 모를 텐데…….] [마루: 사소한 감정은 나중에 챙기도록 하자. 지금은 빨리 황제가 될 황손과 여씨의 마음을 공략해야 해!] [그렌: 일단 두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권력이든 뭐든 손에 쥘 수 있는 거야.]해모수는 지금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명 태조 주원장이 죽었으니 다음 보위를 이을 자는 당연히 황태자 주표다.
하지만 주표도 이미 이승을 떠났다.
이제는 주원장의 장손이자 주표의 장남인 주윤문이 황제가 될 차례였다.
그러나 주윤문은 네 살짜리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당장 황태자비 여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거나 섭정(攝政)을 둬야 한다.
여씨가 어느 쪽을 선택한다고 해도, 금의위를 통해 금위군을 장악하게 될 해모수 천무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명나라의 수도, 경사(남경)의 금위군이 관할하는 위와 소는 모두 마흔여덟 곳이다.
최소 5만 명에서 최대 24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병력이다.
[해모수: 당장은 무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마루: 그렇겠지. 하지만 황제를 힘으로 억압하는 짓은 하수나 하는 수작이야. 어떻게든 견제를 하려는 놈이 나오기 마련이거든.]역사적으로 수많은 역모와 찬탈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렌: 우리처럼 금의위를 통해 금위군을 장악하는 게 정석이야.] [해모수: 거기에다 황태자비, 아니 이제는 황제의 모후가 될 여씨를 고쳐주고 황제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라는 타이틀이 걸리게 되면 권력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이제는 해모수의 머리도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루: 아무래도 당장은 지지 기반이 약한 여씨와 주윤문이 해모수를 의지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렌: 그러다 힘이 생기면 내치거나 죽이려고 들지도 몰라.] [해모수: 그럼 어떡하죠?]그렌의 말에 해모수는 서서히 긴장했다.
[마루: 당연히 그런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지.] [해모수: 어떻게 하란 소리예요?]해모수는 구체적인 방법을 듣길 원했다.
마루와 그렌은 그에게 가장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바로 역사라는 교과서를 인용해서 말이다.
[그렌: 금의위를 완전히 사조직처럼 만들어 틀어쥐고 금위군을 모두 하나로 통합해서 단일 군단으로 만들어야지.] [마루: 청나라의 북양군벌 같은 것을 만들라는 말이야.] [해모수: 그럼 산동군벌이 되겠네요.] [마루: 그게 뭔 소리야? 당연히 해양군벌이 돼야지.]마루가 거친 말투로 외쳤다.
이제 간덩이가 좀 커질 때도 됐는데 해모수는 아직도 산동이란 땅덩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해모수: 해양군벌요?] [그렌: 마루의 말은 요동, 산동, 대만, 해남, 연해, 북해도, 사할린, 유구, 말라카를 잇는 해양 대제국을 건설하라는 말이야. 그것도 명나라를 이용해서 말이지.]그렌은 역시 마루의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사실 이미 전에 한번 얘기했던 내용이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해모수가 뜬금없이 명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되게 생긴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해모수: 엄청 거창하네요.] [마루: 제2의 장보고가 되겠다는 녀석이 할 소리는 아닌데…….] [그렌: 해모수, 넌 할 수 있어. 지금의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얼마든지 사략 함대를 동원해서 왜구를 쳐부수고 동아시아의 대양을 활보할 수 있을 거야.] [마루: 그래야 나중에 토사구팽을 당하더라도 억울하지가 않지.] [해모수: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다 뜨거워지네요.]해모수는 점점 흥분되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작은 어촌에서 태어나 별로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자라왔던 인생이다.
그런데 어느새 아시아 최강, 아니 어쩌면 현재는 세계 최강일지도 모르는 명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덜컥 오르게 됐다.
그러니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해모수에겐 정말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처럼 느껴졌다.
“확실히 중궁으로 옮기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넓고 쾌적하네요.”
어의는 중궁으로 들어오자 반색했다.
황손이 누워있던 건물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었다.
앞으로 황제가 될 황손이 그런 곳에 머무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다.
황제의 권위가 서야 어의도 나름 힘을 받는 법이다.
“중궁을 철통같이 경비하라!”
“충!”
해모수는 금의위 교위들을 불러 중궁의 경비를 강화시켰다.
다른 곳은 어찌 돼도 상관없다.
지금은 황손과 그의 친모인 여씨만 무사하면 만사가 오케이다.
궁녀들이 그사이 중궁을 빠르게 청소하고 중앙의 방 하나에 황손을 모셨다.
침대에 누워있는 주윤문의 안색은 당장 그가 보기에도 딱해 보였다.
해모수는 마음이 약해지려는 것을 다잡고 아예 못 본 척했다.
어의가 다가가 황손의 환후를 살폈다.
“황태자비께서 납시었습니다.”
초로의 환관 하나가 나타나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고했다.
금의위 교위들이 어디 가서 한 놈을 잡아온 모양이었다.
“안으로 뫼셔라!”
“예. 해 천무!”
환관은 해모수의 성을 알고 있었다.
생존 본능이 탁월한 자들이라서 그런지 벌써 그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다 알고 있는 듯했다.
“황태자비 듭시옵니다.”
환관의 가냘픈 목소리가 은은하게 방을 울렸다.
해모수는 복장을 가다듬고 한쪽 옆에 서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드르륵!
궁녀들이 문을 열자 옷에 그을음이 잔뜩 묻은 중년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바로 주윤문의 친모인 여씨였다.
여씨는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주윤문을 보자마자 만사를 제치고 달려갔다.
“황태손!”
여씨는 아들의 안색이 심상치 않자 대성통곡이라도 할 기세였다.
하지만 눈물을 꾹 참고 고개를 돌려 어의를 쳐다봤다.
“어의!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황손, 아니 황태손께서는 독한 연기와 뜨거운 화기로 인해 폐가 상했습니다.”
“그럼 중상이 아닙니까?”
“당장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단기간에 회복하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장기간의 치료와 요양으로만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이럴 수가!”
결국 여씨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자식이 아프다는데 어미가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냉정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사내들도 있었다.
[마루: 이 여자 보통이 아니에요.] [그렌: 그러게 말이야. 황손이라고 안 부르고 황태손이라고 불렀어.] [해모수: 그게 뭔가 의미가 있는 말인가요?] [마루: 당연하지. 주윤문은 아직 황태손이 아니야. 그의 아버지이자 황태자인 주표는 상우춘의 딸이자 후일 효강황후로 추존된 상씨로부터 장남인 주웅영을 얻었어.] [그렌: 주윤문은 주표의 차남이야. 그러니 여씨는 공식적으로 주윤문을 앞세워 황권에 도전하겠다고 선포한 셈이지.] [해모수: 그걸 어의가 또 받아줬고요?]마루와 그렌의 친절한 설명에 해모수는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여려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황실의 일원이 된 여씨는 절대 권력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
[마루: 맞아. 아무래도 장남인 주웅영이 변을 당한 모양이야.] [그렌: 그래서 더욱 슬펐을지도 모르겠군. 당장 황제의 자리가 눈앞에 놓여있는데 아들이 저렇게 누워있어야만 하다니…….] [해모수: 속이 많이 타겠군요. 여러 가지 이유로요.]셋은 차가운 눈동자로 여씨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무안했던 어의가 약을 지어온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해모수가 대뜸 여씨 뒤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혹시 팔에 화상을 입지 않으셨습니까?”
“그대는 누구인가?”
갑자기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자 여씨가 고개를 돌리며 물어봤다.
“전 금의위 천무 해모수라고 합니다.”
“아! 그대가 황태손의 목숨을 구했다는 은인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여씨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그녀는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탁자를 가리켰다.
“이리 앉으시게!”
“아닙니다. 제가 어찌 황태자비와 함께 좌정할 수 있겠습니까?”
“공적으로는 황태손을 구했고 사적으로는 내 아들을 구했으니 이제는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어서 앉으시게. 내 긴히 할 말이 있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말은 실례한다고 했지만 해모수는 당당히 탁자의 반대편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여씨는 탁자에 앉으며 그를 살펴봤다.
잘생긴 얼굴은 둘째 치고 어깨가 떡 벌어진 헌헌장부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