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20
220화
“5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라면… 마탑을 제외하고, 카시오페라 왕국의 6서클의 궁정 마법사 에펠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틴틴산에 5서클의 고위 마법사가 한 분 더 계십니다.”
“아! 라울 고위 마법사를 말하는 거군요.”
이콜 백작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자신이 아는 정보를 풀었다.
그제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에펠은 6서클의 고위 마법사로 카시오페라 왕국을 대표하는 궁정 마법사다.
그런 그를 일개 영지전에 참여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현재 틴틴산에는 5서클의 고위 마법사 라울이 있었다.
그러나 발다 백작은 두 팔과 고개를 마구 흔들며 악을 쓰듯 외쳤다.
“라울 마법사가 아닙니다. 우리 왕국엔 5서클의 고위 마법사가 한 명 더 있습니다.”
“그게 누구요?”
포루탈 후작의 질문에 다들 호기심을 느끼고 쳐다봤다.
“이번에 5서클의 고위 마법사가 된 그렌 자작입니다.”
“그렌 자작? 우리 왕국에 그런 자가 있었소?”
포루탈은 금시초문이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국의 시종장이 재빠르게 케페우스 국왕에게 다가왔다.
그는 귓속말로 국왕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케페우스는 시종장의 말을 다 듣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의 눈이 일제히 국왕을 향했다.
케페우스는 할 수 없이 시종장에게 눈짓을 했다.
“그렌 자작께서는 올해 나이 33세로 프릴 마탑 출신의 고위 마법사입니다. 현재 수도에 머물고 계십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시사하는 바는 컸다.
“서른세 살!”
“5서클의 고위 마법사치곤 너무 젊은 거 아냐?”
“미래가 촉망되는 천재로군!”
“그런 자를 영지전에 투입하자고?”
“프릴 마탑이면 요즘 한창 떠오르고 있는 마탑 아닌가!”
“너무 무리한 계획 같은데…….”
장내는 금방 귀족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목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카시오페라의 왕 케페우스는 굳이 이걸 말리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뒀다.
그도 속으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건 국왕파의 거두 포루탈 후작이나 귀족파의 수장인 욘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5서클의 고위 마법사가 된 프릴 마탑 출신의 자작이라! 이거 잘못하면 난리가 나겠는데…….’
포루탈과 욘은 당장 영입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케페우스 국왕도 가능하면 그렌을 자신의 그늘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허나 프릴 마탑 출신이라는 말에 조금은 망설여졌다.
프릴 마탑은 카시오페라 왕국의 왕립 마탑이 아니다.
토러스 대륙 마탑 연합회에 등록된 사설 마탑이었다.
그런데 최근 카시오페라 왕국을 비롯한 토러스 대륙 곳곳에 지부를 만들고 공격적인 영업을 하면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발다 백작은 그렌 자작을 베른 영지로 보내 영지전을 지원하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이콜 백작의 시기적절한 질문은 모두의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어주었다.
“혹시 그렌 자작께 영지전에 참석하겠다는 확답을 받아오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그냥 의견만 내신 거로군요.”
“네, 맞습니다.”
발다 백작은 이콜 백작이 계속 질문을 해대자 뭔가 쌔한 느낌이 들었다.
“발다 백작께서 직접 그렌 자작을 만나서 설득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은 의견입니다.”
“의견을 낸 자가 제일 잘할 것입니다.”
“기가 막힌 해결책입니다.”
이콜 백작의 의견에 욘 후작과 포루탈 후작이 제일 먼저 찬성했다.
뒤이어 귀족들이 너도나도 찬성을 표했다.
“아! 아닙니다. 제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중요한 일은 당연히 국왕 폐하의 재가를 받아 협상의 귀재들을 투입시켜야 될 것입니다.”
발다 백작은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콜 백작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그를 몰아붙였다.
“그렌 자작께서는 프릴 마탑 출신이라고 하셨으니 당연히 먼저 프릴 마탑를 통해 의뢰를 넣어야 할 것입니다. 발다 백작을 발기인으로 하고 의뢰서를 제출하는 게 좋겠습니다.”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이어지는 이콜 백작의 말에 발다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의 이름을 발기인으로 넣어 의뢰서를 제출한다면… 차도살인의 계책을 꾸민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그렌 자작이 당장 알게 될 것이다.
이래서는 지금까지 노력했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저는 발기인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럼 본인의 의견을 철회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그렇습니다.”
귀족들은 일제히 발다 백작을 벌레 보듯 쳐다봤다.
자신이 낸 의견을 다시 철회한다는 것은 명예를 중요시하는 귀족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능히 감수하고 자신의 말을 지키는 자가 명예로운 귀족이다.
그러니 발다는 한순간에 귀족들 사이에서 귀족의 명예를 더럽힌 놈이 되어버렸다.
허나 이런 자충수를 감수했는데도 불구하고 발다는 결국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발다 백작은 지금 자신이 낸 의견을 철회한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했습니다. 이로써 발기인의 이름에서 발다 백작의 이름을 빼겠습니다. 다만 의뢰서의 비고란에 아이디어 제공자로 이름을 올리겠습니다.”
“그, 그게.”
발다 백작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공식적으로 발기인에서 이름을 빼냈다.
하지만 비고란에 아이디어 제공자로 들어가 버리면 결국 그게 그거였다.
일이 만사휴의,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린 것이다.
발다 백작은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앞으로 일어날 후폭풍을 생각해 보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다른 귀족들은 발다 백작, 아니 그의 여동생이 처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발다 백작의 행동을 아주 어리석고 한심하게만 생각했다.
“차라리 카시오페라 왕국 귀족 회의의 이름으로 의뢰서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소?”
“그게 좋겠습니다. 허나 프릴 마탑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예의와 격식을 잘 갖춰서 정중하게 의뢰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욘 후작의 말에 포루탈 후작이 찬성을 하여 분위기를 상기시켰다.
“만약 그렌 자작이 거절하면 어찌하겠소?”
“그럼 당연히 물러서야지요. 프릴 마탑과 척을 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군요. 혹시 영지전에 참여한다고 하면 의뢰비로 무엇을 내줄 생각이오?”
“그거야 당연히 베른 영지에서 해결해야 되지 않겠소이까?”
“타당한 말이오.”
욘과 포루탈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빠르게 의견 일치를 봤다.
실질적인 이득이 없는 일이라서 무언중에 빨리 처리하자고 합의를 한 것이다.
“그럼 베른 영지전을 지원하기 위해 그렌 자작을 청하는 일은 카시오페라 왕국 귀족 회의 명의로 먼저 프릴 마탑에 의뢰하겠습니다.”
“…….”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이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이콜 백작이 깔끔히 의제를 마무리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 명의 영주가 손을 들었다.
“얀, 버틀, 렌 영지의 영주들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요?”
“들어보나 마나입니다. 또 그만두겠다는 소리겠지요.”
귀족들은 작게 속삭인다고 했지만 대부분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허나 누구 하나 그들에게 뭐라고 하는 자가 없었다.
그만큼 얀, 버틀, 렌 세 영지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 명의 영주가 계속 손을 들고 있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얀 영주, 말씀하세요.”
이콜 백작이 얀 영지의 영주를 콕 짚어 발언 기회를 줬다.
얼굴에 다크서클이 가득한 귀족 한 명이 일어나 케페우스 국왕을 쳐다봤다.
“카시오페라 왕국의 태양 케페우스 국왕 폐하! 그리고 존경하는 귀족 여러분! 본인은 오늘 안타깝게도 스스로의 역량의 한계로 도저히 얀 영지를 책임질 수 없음을 통감하고 영지를 반납하려고 합니다.”
“그만!”
얀 영주의 말을 케페우스는 중간에서 냉정하게 잘라버렸다.
“혹시 버틀 영지와 렌 영지도 반납하겠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송구합니다. 폐하!”
케페우스는 한 손으로 자신의 뒷목을 잡았다.
“아이고, 이걸 어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의 말에 신기하게도 모든 귀족들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벌써 수십 번째 반복에 반복을 더하고 있었다.
“폐하! 얀, 버틀, 렌 영지에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무슨 특단의 조치를 말인가?”
욘 후작의 말에 케페우스는 혹시나 했다.
“그건 지금부터 모두 지혜를 모아봐야 할 것입니다.”
“탁상공론이나 말장난을 하려면 나중에 하시오. 지금은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오.”
잠시 기대를 걸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역시 욘 후작은 아가리 배틀만 강한 놈이었다.
얀, 버틀, 렌은 세 개의 영지다.
하지만 사실 하나의 영지나 마찬가지였다.
카시오페라 왕국의 최북단에 위치한 바이칼 반도!
바란츠 바다와 보포틀 바다 사이를 툭 뚫고 나오는 듯한 지형!
그런데 이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토러스 대륙인이 아니었다.
겨울만 되면 북쪽의 바다가 얼어버리는 통에 바다를 건너 이주해 온 거친 바이칼족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얼음 왕국의 후손이라고 했다.
온 세상이 하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는 전설의 왕국!
지금은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한때는 광활한 북극의 대지를 통치한 강력한 제국이라는 말도 있다.
물론 모두 믿거나 말거나 본인의 자유다.
중요한 것은 겨울만 되면 얼어붙는 바다로 인해 몬스터 웨이브가 밀려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카시오페라 왕국의 정예병은 얀, 버틀, 렌으로 쳐들어갔다.
아예 저항 자체를 하지 않는 바람에 순식간에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악몽은 점령 후부터 시작됐다.
거칠고 강인한 바이칼족은 전혀 이들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춥고 척박한 땅에서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뭔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대한 침엽수림에서 나오는 질 좋은 목재!
드넓은 바다에서 잡히는 각종 물고기들뿐이었다.
세금을 걷으려고 해도 걷을 것이 없었다.
병사로 쓰려고 징용을 해도 싸우려 들지 않았다.
노역을 시키면 일을 망쳐버리기 일쑤였다.
오히려 해마다 잦아지는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카시오페라 왕국에서는 이들에게 막대한 식량과 무기를 제공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이칼족이 몬스터 웨이브를 아주 잘 막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것이 마치 이들의 천명이라도 되는 듯했다.
덕분에 카시오페라 왕국과 코티아르 왕국은 몬스터 웨이브로부터 아직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있었다.
계륵.
버리기는 아깝고 먹을 수는 없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세 영지였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때 발다 백작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케페우스 국왕과 모든 귀족들은 그 모습에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이콜 백작만 냉정을 유지하고 발언권을 부여했다.
“말씀해 보세요.”
“크흠, 그렌 자작이 장원이나 영지를 얻으려고 노력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베른 영지전의 참전 대가로 얀, 버틀, 렌 영지 중 하나를 그렌 자작에게 주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냥 줘도 저렇게 반납하는 판국에 목숨을 걸고 싸운 대가를 그따위 허접한 영지로 대신하자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포루탈 후작은 대뜸 호통을 쳤다.
“맞소. 그건 발다 백작이 너무 경솔하게 얘기한 것 같소. 차라리 베른 영지전과는 상관없이 영지가 필요하면 그냥 주겠다고 권하는 게 좋겠소.”
케페우스 국왕은 이제 발다 백작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앞으로 발다 백작은 귀족 사회에서 크게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만약 싫다고 하면 그만이고, 혹시라도 영지를 받고 잘 다스리면 그것도 좋습니다. 세금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얀, 버틀, 렌 영지에 매년 들어가는 식량과 무기라도 조금 절약할 수 있다면 대성공일 겁니다.”
포루탈 후작은 국왕의 생각에 첨언을 했다.
케페우스는 포루탈 후작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콜 백작이 앞으로 나섰다.
“그럼 지금 결정한 대로 일을 진행시키면 되겠습니까?”
“찬성합니다.”
“동의합니다.”
“제청합니다.”
이득이 나올 곳이라곤 쥐똥만큼도 없는 영지들이었다.
귀족들은 하품을 하며 서둘러 찬성표를 던지고 마무리를 지었다.
이렇게 그렌 당사자도 모르는 가운데… 그는 카시오페라 왕국 정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