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24
224화
행정관 중에서 가장 선임인 수석 행정관이 바로 그였다.
그들은 모두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사실 영주가 식사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물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행정관들도 식사를 할 수 있는 공용 식당으로 장소를 잡았다.
전망이 좋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 영주성에서 유일한 주방장이 밖으로 나와 인사를 올렸다.
“샤프랑이 영주님을 뵙습니다.”
샤프랑은 풍채가 아주 좋았다.
하지만 주방장은 겉모습이 아니라 음식 맛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그렌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주방장이 물러가고 곧이어 하녀들이 준비된 각종 요리와 포도주를 가져왔다.
나름 힘을 잔뜩 줬는지 요리는 하나같이 그럴싸해 보였다.
포크를 들고 하나씩 돌아가며 맛을 봤다.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그러나 그렌과 야엘은 절대 이 정도로 만족할 순 없었다.
“이거라도 좀 뿌려서 먹읍시다.”
그렌은 인벤토리에서 조미료 세트와 향신료 세트가 담긴 작은 상자를 꺼냈다.
다섯 명의 행정관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오오! 귀한 후추를…….”
“조미료가 종류별로 다 있네요.”
“비싼 향신료를 이렇게 모아놓다니.”
그들은 신이 난 표정으로 하나씩 원하는 것을 마음껏 뿌리고 맛봤다.
그렌과 야엘은 이 모습에 서로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맛있다.”
“훨씬 좋네요.”
“고기의 잡냄새와 비린내가 완전히 사라졌어요.”
“소금으로 간을 맞추니 참 고기 맛이 좋군요.”
“영주님 덕분에 이런 호사를 다 누려봅니다.”
행정관 5인방은 너무 좋아했다.
확실히 샤프랑 주방장은 영주성에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다.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포도주를 마셨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얀 영지의 상황에 대해 물어봤다.
“이제 얀 영지의 실정에 대해 알고 싶소. 누가 말해주겠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시 제일 먼저 나선 것은 클리오 수석 행정관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얀 영지는 현재 영지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음!”
이미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현지의 수석 행정관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아니 실망감이 크다고나 할까?
“영지는 영주가 다스려야 하는데 통치행위 자체가 전혀 먹히지 않고 있습니다.”
“바이칼족이 거부를 하는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섬기는 여왕이 있습니다.”
“불의 여왕이겠군.”
그렌은 불의 여왕을 생각하며 꼭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예, 그렇습니다. 영주님도 이미 듣고 오셨군요.”
“소문만 들었을 뿐이오.”
“이건 얀 영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버틀과 렌 영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클리오 수석 행정관과 피라미 지점장의 말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그럼 치안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소?”
“카시오페라 왕국에서 보낸 병력은 이미 다 돌아갔습니다. 그러니 얀 영지는 사실 무법천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그저 영주성과 인근 마을에만 작게나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불의 여왕도 그런 상황을 원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는 모양입니다.”
이건 좀 심각했다.
어느 곳이건 치안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그곳은 더 이상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것이다.
“그래도 바이칼족의 마을은 자체적으로 자경대가 있어서 괜찮습니다. 하지만 토러스 대륙 곳곳에서 흘러 들어온 산적과 마적들이 끊임없이 얀 영지 곳곳의 마을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바이칼족은 그들을 토벌하지 않는 건가?”
“산적과 마적들은 바이칼족의 마을을 잘 건들지 않습니다. 자경대가 있고 무력도 만만치 않아서 상대적으로 손쉬운 산간 마을이나 어촌 그리고 기타 이민족이 세운 마을 등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요새는 코티아르 해적들까지 설쳐대는 통에 분위기가 상당히 안 좋습니다.”
듣고 보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
도적은 들끓고 치안은 개판이었다.
그나마 힘을 가지고 있는 불의 여왕은 그저 나 몰라라 하는 상태였다.
“세금은 어떤가?”
“당연히 거둘 세금이 없습니다. 바이칼족은 평소에 들판에 곡물의 씨앗을 뿌려놓고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다. 수확할 때만 나타나서 필요한 만큼 베어가는 거죠. 대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래서 거둘 세금이 아예 없다?”
“예, 영주님! 오히려 카시오페라 왕국의 왕실에서 매년 막대한 양의 식량과 무기 및 장비를 보내주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매년 겨울에 일어나는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데 사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뭔가 좀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다.
“지원해 준다는 식량과 무기 및 장비는 바이칼족에게 잘 전달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전 영주, 크흠! 경비대와 수송대부터 창고지기와 병사들까지 모두 이리저리 보급품을 빼먹고 있습니다.”
“그럼 바이칼족의 불만이 아주 높겠는데…….”
“안 그래도 그 문제로 몇 번이나 거센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도 고쳐지지 않았단 말이군.”
“해먹는 놈이 많으니 당연한 결과지요.”
클리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렌은 넥슨을 쳐다봤다.
“이쯤 되면 넥슨도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액티넘 경비대장이 보급품을 빼돌리고 착복하는 비리에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어디 진술서 좀 볼까?”
“여기 있습니다.”
넥슨이 피가 몇 방울 묻어있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보고서를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오우! 정말 많이도 해먹었군. 경비대, 수송대, 귀족과 담당 관리들, 버틀 영지와 렌 영지 그리고 발다 영지까지 아주 골고루 해 처먹었네.”
그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얀 영지는 바다가 얼어붙는 겨울이 되면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최전선이 된다.
얀 영지뿐만 아니라 버틀 영지와 렌 영지에서도 바이칼족이 올라온다.
그들이 사용할 식량과 무기 및 장비가 엉뚱한 곳으로 새고 있었다.
특히 발다 영지를 지나면서 꽤 많은 양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렌은 바이칼족이 왜 화를 내며 항의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넥슨은 지금 당장 나가서 액티넘 전 경비대장과 함께 비리를 저지른 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충!”
그의 명령에 넥슨은 즉각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엘이 잠시 넥슨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클리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렌이 다시 질문을 했다.
“바이칼족은 어떤가?”
“착하고 온순한 편입니다. 하지만 남녀노소 모두 전투에 능하고 용맹합니다. 말도 잘 타고 배를 만드는 데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거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상당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저도 그게 의문이긴 합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몬스터와 자신들은 양립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또한 바이칼족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몬스터의 박멸에 있답니다.”
“아아! 이건 마치 영주가 전혀 필요 없는 영지 같군.”
“송구합니다.”
그렌의 말에 클리오가 대신 사과했다.
하지만 그가 사과한다고 변하는 일은 없었다.
“자네들의 잘못이 아니야. 그럼 영주성과 인근 마을은 어떻소?”
“산적과 마적에게 마을이 약탈당해 도망쳐 온 유민의 숫자가 장난이 아닙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아들을 삶아 먹는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숫자는?”
“벌써 몇만을 넘겼습니다. 개중에는 십만도 더 될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왜 이렇게 숫자가 많지? 이 정도면 그냥 남작령 하나가 통째로 이사를 온 셈이지 않은가?”
“얀 영지는 현재 그 정도로 살기 힘든 곳입니다.”
“으음!”
클리오 수석 행정관이 끝내 일말의 기대마저 꺾어버렸다.
그렌은 얀 영지에 괜히 온 게 아닌지 후회가 됐다.
이건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얀 영지의 인구는 얼마나 되는가?”
“누구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이칼족의 말로는 얀, 버틀, 렌 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족이 최소한 백만은 된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면 후작령에 가까운 인구로군. 그럼 바이칼족을 제외한 얀 영지의 인구는?”
“그것도 확실치는 않습니다. 허나 대략 20만에서 30만 사이로 보고 있습니다.”
오차가 무려 10만이나 났다.
바이칼족의 말대로 100만 명이 사실이라면… 얀, 버틀, 렌으로 삼등분을 해도 33만 명이다.
그럼 얀의 인구는 대략 53만 명에서 63만 명 사이가 된다.
이 정도면 백작령의 기준 인구 50만을 넘는 숫자다.
물론 이 숫자도 확실한 게 아니니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저 예상일 뿐이다.
“영주성에 상주하고 있는 인구는 얼마나 되지?”
“내성에 100명, 외성에 대략 500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병사는 얼마나 되나?”
“내성과 외성을 합쳐 100명이 조금 못 될 것입니다.”
“어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남작령만 해도 기준 인구 8만에 2퍼센트의 상비군을 가질 수 있다.
그럼 병사만 1,600명이다.
그런데 백작령의 기준 인구 50만이 넘는 얀 영지에 병사가 100명도 안 된다니…….
정말 눈물을 흘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해모수: 이거 완전히 똥 밟았네요.] [마루: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에요.] [그렌: 포기할까?]그렌은 처음으로 포기할 마음이 생겼다.
[마루: 일단 조금 더 상황을 파악해 보죠.] [해모수: 그게 좋겠어요. 언제든지 반납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하루 만에 포기하는 것은 좀 이른 것 같아요.] [마루: 정 안 되면 우리 그냥 영주성만 먹고 떨어지죠.] [그렌: 영주성만 먹으라니?]마루의 제안에 그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루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나쁜 생각이 아니었다.
골치 아픈 일은 전부 불의 여왕에게 넘기고 자신은 영주성과 인근 마을, 즉 직할지만 신경을 쓰면 된다.
[해모수: 나중에 불의 여왕보고 산적과 마적이나 좀 잡아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여력이 되면 그때 나서서 주변 마을을 싹 정리하면 되겠네요.] [마루: 얀 영지를 다 먹으려고 하지 말고, 그저 영주성과 인근 마을만 접수하면 일이 엄청 줄어들 거예요.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작게 먹으면 남부럽지 않게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잖아요. 어차피 형이 원하는 삶이 그런 거 아니었어요?] [그렌: 맞아.]둘의 얘기를 들어보니 귀가 솔깃해졌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했다.
얀 영지를 포기하려고 하자 오히려 새로운 길이 보이는 듯했다.
솔직히 이렇게 개판인 얀 영지를 잘 다스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영주성 정도는 얼마든지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근 마을이야 아직 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여차하면 그것까지 다 넘겨도 된다.
어찌 됐든 일단 불의 여왕은 한번 만나서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쾅!
“으악!”
“와이번이다.”
“불의 여왕이 나타났다.”
영주성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때마침 불의 여왕이 나타난 모양이다.
“불의 여왕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같이 나가보자.”
그렌은 야엘과 함께 내성의 발코니로 향했다.
“와아아아!”
발코니에 서니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격한 함성이 들려왔다.
내성은 아니고 외성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눈에 힘을 주고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수천, 아니 수만 명의 장정들이 영주성을 에워싸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마스터, 저기 와이번이에요.”
야엘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크게 선회를 하는 거대한 와이번의 모습이 보였다.
와이번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라 꽤나 흥미로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격이 무지하게 더럽다는 그 와이번 위에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금발을 멋지게 휘날리는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