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과거 엘리샤가 만났던 얀의 영주들은 이렇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쥐꼬리만 한 권력을 얻어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도대체 어떻게 된 자인지 욕심이 아예 없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 약속을 합시다. 영주성을 기준으로 반경 10킬로미터 안에 있는 인근 마을까지 전부 나의 직할지요. 대신 나머지 얀 영지 전체는 그대가 알아서 다스리시오.”
“정말 그래도 되겠소?”
엘리샤는 그렌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이오.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지금 얀 영지의 곳곳에는 산적과 마적이 들끓고 있소. 바이칼족을 동원해서 이놈들을 모조리 잡아서 처리해 주시오.”
“잡아오라는 게 아니라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이오?”
“그렇소.”
“그렇게 되면 얀 영지의 사법권까지 나에게 넘어오는 것이잖소. 진짜 그렇게 해도 되겠소?”
“아무 문제 없소. 나는 영주성에서 그저 조용히 마법 연구나 할 것이오.”
“정말 놀라운 일이군.”
안 그래도 얀 영지에 들끓고 있는 산적과 마적을 싹 쓸어버리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이놈들이 마을을 약탈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강간, 납치, 마약, 인신매매 등 온갖 도를 넘는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다.
물론 그들은 바이칼족을 잘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직간접적인 피해는 존재했다.
“혹시 내게 따로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시오.”
“지금 영주성 인근 마을에 십만에 가까운 유민들이 몰려왔소. 바이칼족이 배를 잘 만든다고 하니 이들을 동원해서 어선을 만들어 주시오.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살 수 있게 도와주시면 정말 고맙겠소.”
“그거야 뭐 어렵지 않은 부탁이오. 보급품만 충분히 들어온다면 우리가 비축하고 있는 마른 어포를 내어줄 수도 있소.”
“하하하! 고맙소. 그렇게만 해준다면 난 더 이상 바랄 게 없소이다.”
그렌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불의 여왕을 만나자 고민하던 모든 문제가 바로 해결됐다.
마적과 산적, 유민 문제, 거기다가 귀찮게 보급품을 받아 넘기는 일까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렌은 이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오히려 바이칼족이 엘리샤에게 다가와 자신들이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니냐며 사정을 하고 있는 듯했다.
[마루: 우와! 우리 불의 여왕이 대단하긴 하네요.] [해모수: 그러게요. 그 어려운 일들을 한마디로 다 해결해 버리겠다고 하니 말이에요.] [그렌: 잘됐다. 차라리 이렇게 얀 영지를 엘리샤에게 넘겨버리면 난 영주성만 챙기고 골치 아픈 일에서 벗어나 조용히 살 수 있겠어.]셋은 모두 일이 잘 해결됐다며 좋아했다.
사실 그렌은 부르나 왕국의 암베르 요새 옆에 있는 마나석 광산에 텔레포트 마법으로 들어가, 마나석만 잘 캐내와도 한평생 떵떵거리면서 잘살 수 있었다.
아니 프릴 마탑에서 의뢰하는 아티팩트만 만들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공유 인벤토리를 통해 넘어오는 각종 조미료와 향신료를 판매하면 아마 골드를 가마니로 쓸어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엘리샤와 바이칼족!
오히려 그렌 같은 좋은(?) 영주를 잃을까 봐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말씀하시오.”
엘리샤는 그렌에게 뭔가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망설였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는 바이칼족의 나이 많은 장로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버틀 영지와 렌 영지도 그대가 맡아줬으면 좋겠소.”
“흐음, 그러니까 나보고 버틀과 렌 영지의 영주가 되라는 소리요?”
“맞소!”
그렌은 잠시 머리를 굴려봤다.
피라미 지점장을 통해 들은 얘기로는 버틀과 렌 영지도 얀 영지와 사정이 비슷하다고 했다.
만약 두 영지도 그렌이 원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피라미가 당장이라도 받아서 내어줄 것처럼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한번 알아보겠소. 그런데 만일 성공하면 버틀과 렌 영지도 얀 영지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조건으로 할 것을 약속하겠소?”
“그야 물론이오.”
엘리샤는 그렌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사실 그에게 이런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피라미에게 연통을 넣어 왕실에 한번 물어봐 달라고 하면 그만이다.
“지금 당장 한번 연락을 해보겠소.”
“그렇게 하시오.”
그렌은 마법 수정구를 꺼내 그 자리에서 피라미 지점장을 불렀다.
피라미 지점장에게 그의 호출은 언제나 0순위였다.
그래서 그런지, 피라미는 곧바로 마법 수정구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렌 님!
“급히 상의할 게 있어서 연락했소.”
―저야 대환영이지요.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버틀 영지와 렌 영지도 받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예에? 아니 그렇게 얀 영지가 마음에 드십니까? 아니 바이칼 반도가 그렇게 좋았나요? 간 지 얼마나 되셨다고 벌써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피라미는 그렌의 말이 아주 의외인 듯했다.
“얀 영지를 잘 다스리려면 버틀 영지와 렌 영지를 하나로 묶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오. 그래서 말인데… 왕실에 연락을 해서 한번 좀 물어봐 주지 않겠소?”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연락해 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큰 문제 없이 두 영지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고맙소.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소.”
피라미와 그렌의 대화는 간결했다.
하지만 둘의 대화 내용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시오페라 왕국의 왕실과 귀족 회의에 의해 그렌의 요청은 즉각 받아들여진다.
하루 만에 왕국에서 특사가 찾아와 그렌에게 버틀 영지와 렌 영지의 영주 인장을 준다.
두 영지의 통치권과 징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각종 공문서도 보내온다.
“어떻게 됐소?”
“옆에서 다 들은 것 같소만.”
“그래도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예의가 아니오!”
엘리샤가 달랑 비키니만 입은 민망한 모습으로 저런 말을 해대니 묘하게 시선이 그녀의 굴곡진 몸매로 향했다.
그렌은 속으로 혀를 차며 엘리샤에게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아주 긍정적인 반응이었소.”
“그럼 얀, 버틀, 렌 영지가 하나로 통합될 수도 있겠구려.”
“물론이오. 하지만 약속대로 얀, 버틀, 렌 영지의 세 영주성과 반경 10킬로미터 안에 있는 마을은 모두 내 직할지요. 동의하시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얀, 버틀, 렌 영지의 크기에 비하면 세 개의 영주성과 인근 마을은 그냥 무시해도 될 만한 면적이오.”
“좋소. 그럼 합의한 것으로 간주하겠소.”
“앞으로 잘 부탁하오.”
“우리 서로 잘해봅시다.”
그렌과 엘리샤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서로 손을 마주 잡고 크게 흔들었다.
그녀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품에 안기며 그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뭔가 사심을 채우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그래서 감히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야엘도 그저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온몸 구석구석에 그녀의 짙은 흔적이 남겨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이 야릇한 느낌이 쉽게 지워질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야엘과 뜨거운 밤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마루: 세 개의 영지에 세 개의 영주성을 공짜로 얻게 생겼네요.] [해모수: 나중에 물건을 팔려면 장소가 필요했는데 아주 잘됐어요.] [그렌: 얀 영주성처럼 버틀과 렌 영주성도 크고 넓어야 할 텐데…….]그렌은 버틀 영주성과 렌 영주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척 궁금했다.
줄 사람은 아예 생각도 없는데 미리부터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왠지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루: 그보다 앞으로 영주성과 인근 마을을 어떻게 잘 키우고 성장시킬지 그거나 생각해 봅시다.] [해모수: 아니 그보다 성을 세 개나 먹었으니 야엘과 축하 파티라도 여세요.] [마루: 오우!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그렌보다 마루와 해모수가 더 즐거워했다.
하긴 얀 영주성처럼 크고 넓고 튼튼한 성을 세 개씩이나 얻는다면… 아마 그것만으로도 큰 부를 축적하는 셈이 될 것이다.
“영주님!”
그때 넥슨이 다가와 그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전 경비대장 액티넘과 비리를 저지른 자들이 굵은 밧줄에 꽁꽁 묶여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몸을 덜덜 떨어댔다.
그렌은 엘리샤를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들은 바이칼족에게 가야 할 보급품을 몰래 빼돌리거나 착복한 놈들이오. 원한다면 데려가서 심문을 해보시오.”
“으음.”
엘리샤는 그의 행동에 더 이상 놀랄 힘이 없었다.
바이칼족의 장로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뭐라고 열심히 속닥거렸다.
불의 여왕 엘리샤는 한참 동안 그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데리고 가봐야 목을 베고 머리통을 창에 매달아야 하는 귀찮은 일만 생길 것이오.”
“그래도 내 말이 맞는지 어떤지 확인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엘리샤는 가급적 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했다.
이미 얻을 것을 다 얻었는데 괜히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렌은 자꾸 그녀에게 이들을 데려가서 자신의 말이 맞는지 확인을 해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전 경비대장 액티넘과 비리를 저지른 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아니오. 난 그렌 영주를 믿소. 그러니 그대가 알아서 이들을 처리해 주시오.”
“으음, 정 그렇게 거절하시니 알겠소. 그럼 내가 이들의 죄에 대해 심판을 내리겠소.”
“고맙소.”
둘의 대화가 끝나자 바이칼족 장로들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야엘도 눈치껏 몇 보 뒤로 물러났다.
그렌과 엘리샤가 다시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렌! 오늘 고마웠다. 종종 찾아오겠다.”
“엘리샤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다음에 올 때는 널 위해 선물을 가져오도록 하지.”
“나도 네가 좋아할 만한 요리와 디저트를 준비해 놓을게.”
“호오! 벌써 기대가 되는군. 잘 있어!”
“잘 가!”
그렌과 엘리샤는 마치 친구처럼 편하게 인사를 했다.
불의 여왕 엘리샤는 즐거운 마음으로 얀 영주성을 떠나갔다.
수만 명이나 되는 바이칼족도 썰물이 빠지듯 일제히 영주성을 빠져나갔다.
얀 영주성의 병사들은 혹여 그들이 다시 들어올까 무서워 얼른 성문을 걸어 잠갔다.
“아무래도 새로 병사를 좀 뽑아야겠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그렌과 야엘은 의견 일치를 보이자 곧바로 넥센을 불러들였다.
“넥센!”
“예, 영주님.”
“영주성을 지킬 새로운 병사를 뽑아야겠다. 외성과 주변 마을에 공고를 붙여라!”
“충!”
넥센은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그도 지금의 병사들만으로는 영주성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들은 어찌할까요?”
“철저히 뒤를 파헤쳐서 보급품 비리와 연관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이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가족과 사촌까지 모두 영주성에서 내쫓아라. 이번 기회에 깨끗이 한 번에 털고 간다.”
“충!”
“혹시 얀 영지에 광산이 있나?”
“예, 있습니다.”
“그럼 10년간 광산 중노동형에 처한다.”
“힘이 없어서 일을 잘 못하는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럼 새우잡이 어선에 태워서 일을 시키고 10년간 땅을 밟지 못하게 하라!”
“충!”
그렌은 죄인을 그저 감옥에 가둬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죄를 지었으면 일을 해서 죄지은 사람에게 갚아야 한다.
이놈들은 보급품을 착복했으니 그에 걸맞게 열심히 돈을 벌어서 갚아나가게 할 작정이다.
그것도 비리를 저지른 액수의 두 배로 말이다.
넥센은 액티넘을 비롯해 죄인들을 모조리 감옥으로 끌고 갔다.
“클리오 행정관!”
“네, 영주님.”
“아직 좀 이르기는 하지만 얀, 버틀, 렌 영주성과 인근 마을 개발 계획을 세워주시오.”
“알겠습니다. 영주님!”
행정관 5인방은 그렌의 시원시원한 일 처리에 모두 기뻐했다.
바이칼족을 포기하는 대신 그들은 얀, 버틀, 렌 영지의 영주성과 일대의 마을을 온전히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작은 영지를 세 개나 확보하는 효과가 있었다.
바이칼족에게 세금을 걷을 수는 없지만, 영주성과 인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세금을 걷을 수가 있다.
대충 계산해 봐도 세 영주성과 인근 마을의 주민은 10만을 넘어간다.
상비군을 최대 2,000명은 뽑을 수 있는 적지 않은 숫자였다.
앞으로 그렌이 무리하게 예산만 낭비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들만으로 잘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