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28
228화
얀 영주성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어젯밤 유난히 치열했던 사랑 때문에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났다.
원래 귀족들은 일찍 일어나는 법이 없다.
그러니 큰 흠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공간 반지에서 카시오페라 왕실 요리를 꺼냈다.
카시오페라 왕실의 주방장이었던 자가 만든 카시오페라 왕실 요리 100선!
언제나 만족도 최고의 요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아점을 먹고 나자 카시오페라 왕국에서 보낸 특사가 찾아왔다.
왕실과 귀족 회의에서 그렌의 요청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특사는 그렌에게 버틀 영지와 렌 영지의 영주 인장을 주고, 통치권과 징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공문서도 건네주고 갔다.
“영주님!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넥슨 임시 경비대장과 클리오 수석 행정관이 동시에 그렌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고맙소!”
뒤이어 나머지 네 명의 행정관도 차례로 축하 인사를 올렸다.
야엘도 그의 뒤에서 속으로 축하 인사를 하며 남몰래 기쁨을 누렸다.
[마루: 형, 축하해요. 드디어 세 영지의 영주님이 되셨네요.] [해모수: 그렌 형, 바이칼 반도의 지배자가 되신 것 축하해요.] [그렌: 고맙다.]마루와 해모수의 축하 인사를 받고 그렌은 싱글벙글했다.
[마루: 바이칼 반도의 지배자! 그거 괜찮다. 앞으로 얀, 버틀, 렌 영지를 바이칼로 통칭하면 되겠다.] [해모수: 와우! 그럼 나 한 건 한 거예요?] [마루: 네가 새로운 지명을 지은 거나 마찬가지야.] [그렌: 바이칼 영지라……. 바이칼족이 들으면 아주 좋아하겠군.]생각해 보니 정말 이름이 괜찮았다.
특히 바이칼족이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히 좋아할 것이다.
그렌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즉시 이를 현실에 반영했다.
“앞으로 얀, 버틀, 렌 영지를 바이칼 영지로 통칭하겠소.”
“외부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내부적으로 우리끼리 부를 때만 사용할 것이오.”
“그렇다면야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클리오 수석 행정관은 역시 노련했다.
하지만 이미 그 정도는 그렌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범주 안이었다.
“넥슨! 보급품 비리 사건은 어떻게 됐지?”
“액티넘과 그 일당을 심문한 결과 내성에 살고 있는 귀족들과 작당을 했다는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그렌은 솔직히 놀랐다.
일을 시킨 지 하루 만에 이런 괄목할 만한 성과를 가져오다니…….
넥슨의 얼굴은 언제부터인지 자신감에 가득 차있었다.
그 모습에 ‘임시’라는 단어가 곧 떨어져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잡아들이고 비리가 발견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광산에 처넣도록 해!”
“충!”
그렌의 명령에 넥슨은 곧바로 군례를 올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영주님, 하지만 그들은 귀족입니다.”
“얀, 버틀, 렌 영지에… 아니 바이칼 영지에 무슨 귀족이 있단 말인가?”
“아! 제가 단어 선택을 잘못했군요. 그들은 귀족가의 일원입니다.”
“어쨌든 그들이 귀족은 아니지 않는가?”
“맞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다른 귀족들이 항의를 해오거나 문제를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벌주시는 것은 저도 찬성이지만 그래도 신중하셔야 합니다.”
클리오는 나름 정치적인 감각도 뛰어났다.
하지만 상대는 일반 귀족이 아니라 마법사, 그것도 고위 마법사인 그렌이었다.
그는 카시오페라 왕국의 귀족계에 이름을 날리거나 왕국에서 더 높은 작위를 받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
이미 세 영지가 하나로 뭉친 바이칼 영지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귀족이라면 당연히 수도 에티오로 보내라고 명령했을 것이오. 하지만 귀족가의 일원이라는 것 때문에 죄를 감해주거나 벌을 차등 적용할 수는 없소. 내가 바이칼의 영주로 있는 동안은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없소.”
“아! 무전유죄 유전무죄! 정말 놀라운 말씀이십니다.”
“영주님! 존경합니다. 어떻게 그런 단어를 만들어 내실 수 있습니까?”
“마법사는 정말 다르군요. 천재를 왜 천재라고 하는지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영주님의 혜안을 저희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정말 지금의 세태를 정확히 꼬집는 단어입니다. 대단하십니다.”
클리오를 비롯해 행정관들은 모두 앞다투어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들은 엄지를 치켜들며 그렌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렌은 그저 뉴스에서 보고 들었던 단어를 적당히 대륙 공용어로 바꿨을 뿐이다.
그런데 행정관 5인방의 눈에는 깊은 경외심이 떠올라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뜨거운 반응에 오히려 그의 낯이 살짝 붉어졌다.
“영주님, 저 넥슨은 앞으로 영주님의 그 크신 뜻을 받들어 공을 세운 자에게는 공정하게 상을 내리고 죄를 지은 자들에게는 신분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벌을 적용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러게.”
넥슨까지 무슨 광신도의 눈빛을 하고 나자 이제는 괜히 양심이 찔리기 시작했다.
“영주님, 앞으로 귀족가의 일원이라도 비리가 드러나면 무조건 영주성에서 내쫓을까요?”
“그렇게 하게.”
“그럼 아마 내성이 텅텅 비게 될 것입니다.”
“내성이 텅텅 빈다고…….”
넥슨의 말에 그렌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럼 이참에 아예 내성에 살고 있는 자들을 전부 외성으로 이주시키도록 하게!”
“충!”
넥슨은 군례를 올리고 즉시 영주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깐! 병사를 모집한다고 공고를 붙여놓았나?”
“예, 영주님. 인근 마을에 모두 공고를 붙였습니다. 오늘 오후부터 외성 경비대 연무장에서 모병을 시작할 것입니다.”
“모병은 열여섯 살에서 서른세 살의 신체 건강한 남녀로 한다. 출신은 상관없지만 범죄자는 부적격자로 넣고 절대 뽑지 말게.”
“예, 영주님.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뽑아야 합니까?”
“2,000명을 채울 때까지 진행하지.”
“충!”
넥슨은 그렌의 말에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즉시 군례를 올렸다.
“영주님, 숫자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얀, 버틀, 렌 영주성을 지키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하오.”
“얀 영주성만을 위한 게 아니었군요. 그렇다면 버틀과 렌에도 공평하게 모병 공고를 붙이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오.”
“예, 영주님. 즉시 말씀하신 대로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확실히 행정관들이 여럿 있으니 깜빡 놓치고 갈 수 있는 부분도 잘 집어냈다.
탄력을 받기 시작하자 행정관들이 너도나도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카시오페라 왕국에 앞으로 바이칼족 지원 물품 인수를 발다 영지와 렌 영지의 경계에서 우리가 아니라 바이칼족이 직접 인수한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합니다.”
“공문을 작성해서 에티오로 보내시오.”
“예, 영주님.”
해리엇 행정관이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레종도 얼른 입을 열었다.
“영주님, 우리에게도 상단이 필요합니다.”
“바이칼족은 자급자족을 하는 종족이 아니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이칼 영지에 바이칼족만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니 레종 행정관의 말도 맞았다.
100만 명이 넘어가는 바이칼족만큼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얀, 버틀, 렌 영지에도 각각 20만에서 30만 명 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물론 불의 여왕 엘리샤와의 약속으로 영주성과 주변 마을에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필요한 물건을 사러 주민들은 영주성과 마을을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바이칼 영지에서 직접 운영하는 상단이 있다면 큰 이득을 볼 수 있다.
“괜찮은 생각이군.”
“지금부터라도 바이칼 영지를 위해 자체적으로 상단을 조직해야 합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당장 바이칼 상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레종의 말에 클리오까지 합세했다.
행정관들을 보니 모두 그 말에 찬성을 하는 눈빛이었다.
그렌은 기꺼이 이 제안에 동의했다.
“좋소. 즉시 바이칼 영지 직영 상단을 만들어 보시오.”
“예, 영주님.”
아마 이게 기폭제가 됐을 것이다.
행정관들은 그동안 머릿속에 담아뒀던 생각들을 너 나 할 것 없이 쏟아냈다.
“인근 마을에 목책을 세웁시다.”
“우물을 팝시다.”
“저수지를 파고 수로를 확충합시다.”
“버려지는 물고기 내장과 찌꺼기를 모아 비료를 만듭시다.”
“새로 농지를 개간합시다.”
“구황작물을 더 재배합시다.”
“부두를 증축합시다.”
“전투선과 무역선을 건조합시다.”
“원양어선을 건조합시다.”
“공방을 세웁시다.”
“바이칼 영지를 관통하는 도로를 닦읍시다.”
“산적과 마적 및 해적을 토벌합시다.”
“용병을 고용해 영주성과 인근 마을을 지킵시다.”
“자경대를 조직합시다.”
“식량을 비축합시다.”
그렌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점점 입을 딱 벌렸다.
한꺼번에 진행하자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형 사업은 바이칼족의 협조 없이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것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해야 할 일로 나눴다.
“영주성 인근 마을에 촌장을 불러서 자체적으로 자경단을 조직하고 목책을 세우라고 하시오.”
“예, 영주님.”
“우물을 파고 새 농지를 개간하는 것도 허락하겠소.”
“감사합니다. 영주님.”
“저수지를 파고 수로를 만드는 일은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이 아니니 일단 각 마을별로 한번 계획을 세워보시오.”
“알겠습니다.”
행정관 5인방은 열심히 그렌의 명령을 적고 메모를 해뒀다.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용병을 고용해서 마을을 지키는 일은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으니 용병 길드와 시급히 상의해서 데려오시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공방을 만드는 계획도 세워보고 식량을 사들여 비축하는 것도 한번 알아봅시다.”
“예, 영주님.”
“그런데 구황작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그렌의 질문에 클리오가 나서서 자세히 설명해 줬다.
바이칼족이 대대로 산과 들에서 뿌리고 거두는 보라색 작물이라고 했다.
이름이 ‘포티’와 ‘스위티’라고 하는데… 가만히 말을 들어보니 감자와 고구마가 아닌가 싶었다.
그는 하도 궁금해서 한번 가져와 보라고 했다.
그러자 클리오가 하녀 하나를 시켜 포티와 스위티를 쪄오게 했다.
보라색이 선명한 모습에 처음에는 거부반응이 들었다.
하지만 직접 맛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자와 고구마보다 훨씬 맛이 괜찮았던 것이다.
“생각보다 맛이 좋군.”
“처음에는 색깔과 생김새가 이상해서 기피하는 작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이칼 영지 안에 사는 주민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포티와 스위티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구황작물이 아니라 그냥 식량으로 삼아도 되겠군.”
“포티와 스위티는 산과 들에 뿌려만 놓으면 별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자랍니다. 이걸 모아서 겨울철에 식량으로 삼는 유민들이 많습니다.”
포티와 스위티가 없었다면 당장 영주성과 인근 마을에 모여든 수많은 유민들은 모두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고 한다.
비맥스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유민들이 정말 걱정입니다.”
그렌은 동시에 안색이 변해가는 행정관 5인방을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유민들은 그리 걱정할 것 없소. 이미 불의 여왕에게 도움을 청해 그들을 전부 데려가기로 했소.”
“그럼 반발이 클 텐데요.”
“죽이러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어선을 같이 만들고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줄 겁니다. 비축해 놓은 식량도 일부 푼다고 했으니 기다려 봅시다.”
“불의 여왕이 과연 그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하겠습니까?”
이지덤 행정관이 좀 회의적인 의견을 냈다.
하지만 그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 방법 외에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소. 기왕 기다리는 것 긍정적인 마인드로 좋은 소식이 올 것을 기대해 봅시다.”
“예, 영주님.”
“산적과 마적도 직접 토벌한다고 했으니 당분간 좀 시끄러울 것이오. 전투선, 무역선, 원양어선 그리고 비료 문제도 조만간 불의 여왕을 만나서 협조를 구해보겠소. 정 안 되면 원하는 것을 주고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겠지.”
“영주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바이칼 영지의 핵심이오. 그리고 이곳은 앞으로 바이칼 영지를 이끌어 나갈 중심지요. 그러니 모두 주인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영지의 일을 보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합시다.”
“예, 영주님.”
넥슨과 행정관 5인방은 그렌의 일 처리에 모두 만족했다.
이제 나머지 후속 조치는 그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