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42
242화
보화전의 깊숙한 밀실.
금의위의 고위 관료 복장을 한 네 명의 남녀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위국공 전하!”
“고개를 드시오.”
온화한 표정을 한 해모수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들이 모두 고개를 들자 그는 사공명과 양중달을 포함한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
“다들 자리에 앉게.”
“감사합니다. 전하!”
“고맙습니다. 전하!”
사공명과 양중달은 누구보다 깍듯이 고개를 숙인 후, 해모수의 좌우로 각각 나눠 앉았다.
탁자의 건너편에는 이번에 새롭게 금의위 지휘첨사에 오른 네 명의 남녀가 앉아있었다.
그중 얼굴을 면사로 가린 여인이 유독 그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해모수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인사해 오는 왕지현을 향해 마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도 어린 황제는 왕지현을 아주 잘 따랐다.
태후도 그걸 보고는 그녀를 황제의 호위로 삼고 싶어 했다.
물론 결정은 해모수가 내렸다.
그래서 이번 금의위 조직 개편 때, 왕지현은 자연스럽게 금의위 서열 3위인 정3품의 지휘첨사가 될 수 있었다.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그녀에게 황실을 비롯해 고관대작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동안 다들 수고했네.”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전하의 홍복이옵니다.”
“전하께서 위기의 상황에서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부 같았지만 사실 아부만은 아니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어려운 상황에서 빠르게 권력을 장악한 해모수의 신출귀몰한 능력에 두 사람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더불어 자신들이 일개 금의위 교위에서 천무와 지휘첨사를 뛰어넘어 단번에 금의위 권력 순위 2위인 종3품 지휘동지에 임명된 것에 크게 감격했다.
해모수는 양중달을 보자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양중달 교위입니다.”
정치력 만렙이라는 양중달 교위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사공명은 한참 동안 해모수에게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 교위의 말을 들어보니 참모로 쓰기에 참 적합한 인재로군요.”
“해 천무를 위해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오. 양 교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얼굴을 보면 참 평범하다.
허나 눈빛이 아주 예리한 것이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해모수는 양중달 교위와 현재의 사태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결론적으로 그는 역시 발군의 정치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루와 그렌을 통해 대략적인 전략은 세워뒀다.
하지만 구체적인 전술이나 시행 방안은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중달의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의 실타래가 한 올씩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위국공 전하!”
해모수는 사공명이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빛을 빛내며 좌중을 빠르게 한번 훑어봤다.
왼편에 사공명 지휘동지, 오른편에 양중당 지휘동지!
탁자 너머 왼쪽부터 왕지현 지휘첨사, 장일평 지휘첨사, 왕서이 지휘첨사, 고진삼 지휘첨사가 앉아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수족이자 심복으로, 앞으로 명나라의 조정을 감시하고 현재 구축한 권력 구조를 유지할 튼튼한 버팀목이었다.
“우리는 이미 한배에 올라탔다. 서로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
해모수의 뼈를 때리는 말에 다들 숙연해졌다.
그들은 이미 권력투쟁의 중심에 들어와 있었다.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어야 하는 권력의 생리!
아차하면 현재의 자리를 보전하기는커녕 언제 숙청될지 모르는 황궁의 살벌함!
이런 상황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만큼 큰 위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갖은 책략과 속임수로 우리를 분열시키고 이간질하는 책동을 벌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만 명심하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나를 믿고 따르라!”
“예, 위국공 전하를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힘차게 외쳤다.
해모수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사공명을 쳐다봤다.
사공명은 그의 의도대로 회의를 속개했다.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안건부터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직위와 순서에 상관없이 기탄없이 발언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공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왕지현 지휘첨사가 손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왕 첨사(僉事)!”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들은 왕지현이 누군지 잘 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웠다.
“황실의 내밀한 정보가 궁녀와 환관을 통해서 밖으로 새어 나가고 있습니다. 당장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황상과 황태후 폐하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로군요.”
해모수가 뭐라고 답을 하기 전, 양중달 지휘동지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양 동지(同知)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안 그래도 이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뭔가 좋은 생각이 있는 모양이구려.”
“그렇습니다.”
양중달은 전에 없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럼 한번 들어봅시오.”
“예, 전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습니다. 비록 전하가 경사(남경)의 권력을 쥐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경성에 한해섭니다.”
“흐음.”
양중달의 말에 해모수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넓게 잡아도 외곽성(外郭城)까지가 그 한계일 것입니다.”
“…….”
“물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전하의 권력은 공고해질 겁니다. 당장 황제 직속으로 편제되어 있던 열두 개의 친위군이 전부 금의위에 흡수 및 통합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조만간 금의위에서 운영할 수 있는 위소는 마흔여덟 개가 될 전망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지 모르겠군.”
해모수는 범위가 너무 넓어지자 양중달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양중달은 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 말은 바깥일도 중요하지만 궁성 안의 환관과 궁녀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큰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환관 집단을 일소하고 새로운 환관 조직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이거 조만간 피바람이 불겠군.”
“그래도 쳐내야 할 놈은 지금 쳐내는 것이 좋습니다. 나중에 이놈들이 궁성을 장악하고 패악을 부리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겁니다.”
역사적으로 환관이 득세해서 나라가 잘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문제는 해모수가 명나라를 잘 다스려서 부강한 나라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환관과 궁녀들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당장 자신의 권력 기반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게 될지도 모른다.
해모수는 더 이상 피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철퇴를 내리기로 했다.
“황상과 황태후 폐하께 허락을 받아놓을 테니 이 문제는 장일평 지휘첨사가 맡아서 해결하는 게 좋겠소.”
“예, 전하!”
장일평 첨사는 해모수의 명령에 즉각 대답했다.
“현재의 환관 집단을 말끔히 정리하고 새롭게 환관 조직을 만드시오. 이름은 동창(東廠)이 좋겠군.”
“곧바로 시행하겠습니다.”
해모수는 미래에 황제 직속 첩보대 역할을 하는 동창을 한마디 말로 간단히 만들어 버렸다.
“그럼 궁녀들은 어떻게 할 건가?”
“당연히 동창에서 궁녀들을 제어하고 감시하도록 해야지요.”
양중달의 말에 해모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해모수가 장일평 첨사를 바라보자 그는 알았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시는 대로 동창을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전하!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왕서이 지휘첨사가 말을 꺼냈다.
“그게 무엇인가?”
“남옥을 비롯한 개국공신들과 태조의 사남인 연왕(燕王) 주체(朱棣)이옵니다.”
“남옥과 개국공신들은 알겠는데… 연왕 주체라니? 혹시 살아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남사성 천무의 말에 의하면 그 어디에서도 연왕의 시체를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으음.”
이건 저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다른 놈은 몰라도 연왕 주체라니…….
그는 원역사에서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영락제가 되는 자다.
주체는 1370년, 11세 때 연왕에 봉해져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됐다.
실제로 북경 지역으로 간 것은 1380년, 21세 때이다.
7년이 지난 1387년 현재!
정난의 변이 일어나는 해인 1398년처럼 그가 거병을 하여 건문제와 내전을 벌일 힘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뭔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연왕 주체가 살아있다고 가정하고 남옥과 같은 개국공신과 손을 잡는다면 황권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되겠군.”
“그렇습니다. 전하!”
이미 마루를 통해 명나라의 대략적인 역사를 알고 있는 해모수였다.
왕서이 첨사가 우려하는 대로 최악의 경우가 생긴다면… 이건 정난의 변을 능가하는 메가톤급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명나라에 내전이 일어나든 말든 전혀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 막 명나라라는 꿀단지에 빨대를 꽂았는데 제대로 꿀도 빨아먹지 못하고 물러나야 하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마루: 연왕이 살아있다고 가정하고 일단 금의위를 풀어서 찾아내라!] [그렌: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닐까? 시체가 불에 타서 구분을 할 수 없었을 수도 있잖아.] [해모수: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제와 황자들 그리고 개국공신들만큼은 사망 여부를 반드시 확인하도록 했어요.] [마루: 미리 대비를 하는 게 더 큰 환란을 미연에 대비하는 지름길이에요.] [그렌: 그렇게 말하니 일단 조사를 해보지 않을 수는 없겠구나.] [해모수: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요.]해모수는 바로 결단을 내렸다.
“왕서이 첨사가 이 일을 맡는 게 좋겠소. 연왕 주체가 살아있다고 전제하고 그의 뒤를 쫓아가 반드시 후환을 제거하시오.”
“예, 전하!”
“또한 남옥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혹시라도 우환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예, 전하!”
왕서이는 자신에게 두 가지 큰 임무가 떨어진 것에 반색했다.
해모수가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장 남옥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현재 풍승(馮勝)을 따라 원나라의 나하추(納哈出)를 정벌해 대장군이 됐다.
내년에는 원나라 순제(順帝)의 아들 토구스 테무르(脫古思帖木兒)의 몽골로 원정을 떠날 계획이다.
원역사에는 원정에 승리하여 양국공(凉國公)에 책봉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과연 승리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경사에 일어난 참변이 몽골은 물론 어느새 여진과 고려에까지 전해진 상태였다.
벌써부터 북쪽의 초원에서는 명나라를 만만하게 보고 합종연횡을 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와 있었다.
물론 해모수는 이번 원정에 전혀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명 태조 홍무제가 세워놓았던 계획 그대로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둘 예정이다.
다만 내년인 1388년!
고려에 명의 동녕부 반환을 요구하거나 철령위를 설치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건 마루의 작은 부탁(이라고 읽고 강력한 요청이라고 쓴다) 때문이었다.
1388년에 일어난 위화도 회군이 발생할 여지를 없애도 과연 고려가 망할까?
또한 역사 그대로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될지 아주 궁금했다.
조선이 건국된 배경에는 고려의 지배층인 권문세족들의 부정부패가 있다고 했다.
허나 그건 고려를 망하게 만든 장본인인 승자, 조선의 변명일지도 모른다.
꼭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만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918년 왕건이 즉위하고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까지!
무려 474년 동안 고려왕조가 이어진 것은 나름대로 고려만의 강점과 특징이 있어서일 것이다.
물론 왕조가 길다고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새 왕조가 들어선다고 해서 민초들이 모두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한민족이 절대 굶주림에서 벗어난 것은 현재 마루가 살고 있는 시간을 기준으로 겨우 몇십 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 전의 긴 세월 동안 한민족은, 아니 민초들은 굶주림과 가난, 폭정과 수탈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야만 했다.
‘해양군벌을 세워서 우리 민족, 우리 백성이나 제대로 잘 먹고 잘살게 만들 것이다.’
해모수의 작은 바람은 그렇게 자신이 직접 겪은 가난과 굶주림에서 시작됐다.
형제자매와 이웃 친척들이 수탈과 폭정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의외로 명나라의 황궁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