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58
258화
그렌은 아주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클리오는 ‘당신이 시켰잖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안락한 노후 생활을 떠올리고는 절대로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하케보와 모노테!
사실 이 두 마법사는 부르나 왕국에서 도망친 현상 수배범이었다.
왕실의 중요한 보물을 훔쳐 몰래 팔려다가 걸려서 코티아르 왕국으로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부르나 왕국의 추적대가 코티아르 왕국까지 쫓아오자 바로 해적단에 투신해 온갖 중범죄를 저질렀다.
살인, 강도, 강간, 약탈, 납치, 인신매매, 인체 실험 등, 심지어는 흑마법과 키메라까지 손을 대려고 했단다.
물론 그렌은 부르나 왕국이 내린 현상 수배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노예 마법사로 평생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데 고작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다른 나라로 넘기기는 싫었다.
하케보와 모노테는 이제 그렌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신세가 됐다.
몸에 노예 인장이 찍힌 것은 물론이고, 마법 계약서를 비롯한 각종 금제를 당해 그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망친다면 죽을 때까지 고통을 느끼다가 몸이 녹아내릴 것이다.
그래서 둘은 지금 깨끗이 포기하고 그렌의 명령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400명이 넘는 해적들에게 노예 인장을 찍기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렌은 이들을 극한으로 몰고 갔다.
이미 둘이 그동안 무슨 나쁜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로서 해적질까지 하는 막장 인생이었으니 자비는 없었다.
노예 인장 찍는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그렌의 비밀 공방에서 죽을 때까지 아티팩트나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사흘 안으로 노예 인장 다 찍고 렌 영주성으로 끌고 오시오. 내성 청소라도 시켜야겠소.”
“알겠습니다. 영주님!”
클리오는 그렌이 노예 마법사에게 왜 청소를 시키려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보다 훨씬 유용하게 쓸데가 많은데 말이다.
하지만 감히 영주님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한 시간 뒤 회의를 할 테니 넥슨 경비대장과 이지덤 행정관을 부르시오.”
“예, 영주님.”
그렌은 클리오를 뒤로하고 내성 창고로 향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아공간 좀 비우려고 창고로 간다.”
“네, 마스터.”
야엘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내성 창고로 갔다.
그렌은 깨끗이 비어있는 내성 창고에 물건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전부 엘리샤와 같이 갔던 동굴에서 가져온 몬스터 가죽들이었다.
첫 번째 창고가 가득 찼다.
그는 두 번째 창고로 가서 계속 몬스터 가죽을 쏟아부었다.
두 번째 창고도 금방 차고 세 번째 창고에 가서야 겨우 다 비워낼 수 있었다.
몬스터 뼈와 발톱, 이빨은 네 번째 창고와 다섯 번째 창고에 꺼내놓았다.
“양이 엄청나네요.”
“좀 많긴 하지. 미련한 것들이 이걸 계속 모아두기만 했어.”
“혹시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글쎄.”
그렌은 그녀의 물음에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내성 창고를 나와 영주 전용 창고로 향했다.
그는 영주 전용 창고 안에 마정석을 쏟아냈다.
그런 후, 잠시 보관해 놓았던 물건들을 도로 회수했다.
지이잉!
그때 넥슨에게 준 마법 수정구에서 신호가 왔다.
그렌은 즉시 미니 맵을 확인했다.
넥슨은 렌 영주성 성문 앞에 있었다.
‘누가 왔나?’
마법사라면 마법 수정구를 통해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넥슨은 마법사가 아니라 그건 불가능했다.
갑자기 3서클 마법사, 하케보와 모노테가 생각났다.
이들이라면 충분히 마법 수정구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하에 몹쓸 연놈들이니 지하 공방에 가둬놓고 마법 아이템이나 만드는 게 낫다.
[그렌: 이거 은근히 귀찮네.] [마루: 워키토키, 아니 생활용 무전기 세트 몇 개 보내줄까요?] [해모수: 오! 그러면 되겠다.] [그렌: 보내준다면야 나야 고맙지.]마루의 제안에 그렌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야엘! 나 먼저 갈 테니까 외성 성문 앞으로 와!”
“예, 마스터.”
그는 야엘과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마법의 시동어를 외쳤다.
“블링크!”
그렌의 몸이 원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곧바로 영주관저를 나와 외성 성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내성 성문을 통과하고 외성 성문으로 향하는 대로를 질주했다.
엑설런트 최상급 기사답게 야엘의 달리는 속도는 정말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마법으로 공간을 도약해 버린 그렌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마르코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영주님을 뵙습니다.”
렌 영주성 외성 성문 앞에 도착해 보니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모두 일어나게!”
“감사합니다. 영주님.”
정중히 인사를 하고 일어나는 수십 명의 용병!
그들은 바로 미르 용병단이었다.
그렌은 덩치가 산만 한 호남형의 중년 사내, 마르코스와 힘차게 악수를 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영주님, 저희가 좀 늦었습니다.”
“아니야. 잘 왔네.”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걱정해 준 덕분에 난 이렇게 영주가 되었네.”
“얀, 버틀, 렌 영주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마르코스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는 잠시 마르코스를 바라보다 시선을 그의 어깨 너머로 돌렸다.
아까부터 자신을 봐달라고 무진장 애를 쓰는 두 미녀가 보였다.
33파티의 파티장 제니퍼와 힐러인 로즈였다.
“제니퍼! 로즈!”
그렌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자 둘은 냉큼 그렌에게 달려왔다.
“영주님, 보고 싶었어요.”
“영주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제니퍼는 돌직구를 날리며 안겨왔다.
로즈는 어정쩡한 자세로 있다가 뒤늦게 그의 품에 안겼다.
“어? 어!”
처음에는 좀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꼭 안아줬다.
격한 인사를 한 두 여인은 갑자기 뭔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살짝 들자 그렌의 뒤에 누군가 서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야엘의 존재를 발견한 제니퍼와 로즈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야엘의 눈빛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그렌은 제니퍼와 로즈를 살짝 밀어내고 미르 용병단의 부단장 헤론과 악수를 했다.
1부대장 모리스, 2부대장 테일러, 3부대장, 로건, 4부대장 세파라!
각 부대의 파티장과도 인사를 나눴다.
“마르코스 단장!”
“예, 영주님.”
“용병단의 숫자가 좀 줄어든 것 같소.”
“아닙니다. 오히려 더 늘었습니다.”
“그럼 이게 전부가 아닌가?”
“아직 들어오지 못한 용병들이 외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렌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경비대장 넥슨을 쳐다봤다.
넥슨은 화들짝 놀라더니 급히 말했다.
“아직 검문검색이 끝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바로 통과시키겠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소?”
“예에?”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넥슨은 금세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괜히 지레 놀라 혼자 난리를 피운 셈이었다.
그렌은 속으로 혀를 차며 시선을 마르코스에게 돌렸다.
“마르코스,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겠지?”
“예, 영주님. 저희 미르 용병단은 앞으로 영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마르코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르 용병단의 용병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 모습은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이들의 박력에 주변의 병사들과 주민들까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대들을 오늘부터 나의 가신으로 삼을 것이오. 우리 힘을 합쳐 멋진 영지를 만들어 봅시다.”
“예, 영주님.”
“모두 일어나시오.”
“감사합니다. 영주님.”
용병들은 모두 밝은 표정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마르코스 단장의 말만 믿고 카시오페라 왕국에서 오지라고 할 수 있는 얀까지 먼 길을 걸어왔다.
오면서도 일이 뜻대로 잘 안 될까 봐 걱정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영주가 직접 마중을 나와 가신으로 삼아주니 너무 기뻤다.
“넥슨!”
“예, 영주님.”
“이들을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게.”
“예, 알겠습니다.”
넥슨은 부동자세를 취하며 절도 있게 대답했다.
지금이라도 뭔가 보여주려는 의도 같았다.
하지만 미르 용병단의 용병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렌은 마르코스 단장을 비롯해 미르 용병단 간부들을 전부 데리고 내성으로 향했다.
“마르코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아닙니다. 영주님이 얀 영지만이 아닌 버틀과 렌 영지까지 모두 얻었다는 말에 힘든 줄도 모르고 왔습니다.”
마르코스는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밝게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런데 정확히 인원이 얼마나 되지?”
“300명을 꽉 채워서 오려고 했는데… 조금 모자랍니다.”
300명이란 말에 그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거의 300명에 가까운 용병들을 데리고 왔단 말이오?”
“하하하! 아시다시피 제가 좀 발이 넓지 않습니까?”
“…….”
마르코스가 갑자기 자뻑 모드로 들어가자 그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말을 안 믿으시는군요.”
“결과가 눈앞에 있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소.”
“이들 말고도 앞으로 조금 더 올지 모릅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제가 친한 몇몇 중소 용병단에게 제안을 넣어놓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마르코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용병들이 더 올 수도 있다는 말이군.”
“예, 그렇습니다.”
그렌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마르코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을 잘했기 때문이다.
처음 마르코스에게 영입 제안을 했을 때만 해도 미르 용병단을 흡수하여 영지의 치안에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져온 결과물을 보니 점점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마르코스는 상당히 유능한 가신이 될 소양이 엿보였다.
[해모수: 미르 용병단 100명을 기대했는데 세 배를 데려왔네요.] [마루: 그리고도 앞으로 더 올 수도 있다고 하잖아.] [그렌: 얀 영주성 경비대장을 시키려고 했었는데…….] [해모수: 그럼 넥슨은 어쩌고요?] [마루: 버틀이나 렌 영주성으로 보내면 되지.] [그렌: 이렇게 되면 제대로 고민 좀 해봐야겠다. 마르코스 단장이나 헤론 부단장도 쓸 만하지만 각 부대장도 유능한 인재들이거든.]갑작스러운 인재들의 충원에 그렌은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해모수: 용병들을 경비대에 넣으려고 그래요?] [마루: 설마 이들을 영지군에 넣어서 통솔하게 하는 것은 아니겠죠? 용병단과 군대는 좀 다른데…….] [그렌: 아직은 고민 중이야. 같이 의논해 보고 결정을 내리자고.]내성 영빈관에 도착하자 클리오가 보였다.
그의 옆에는 이지덤이 서있었다.
“영주님!”
“클리오! 이지덤! 마침 잘 왔소. 모두 같이 들어갑시다.”
“예, 영주님.”
그렌은 그들을 몽땅 데리고 영빈관의 소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여 적당히 먹을 것과 시원한 맥주를 가져왔다.
연회까지는 아니지만 일단 좀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분위기를 잡았다.
마르코스를 비롯한 용병들은 모두 배가 고팠는지 음식을 보자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사이 그렌은 클리오와 이지덤을 따로 불러서 대화를 나눴다.
불의 여왕의 제안과 바이칼족에게서 받은 것들에 관한 얘기였다.
“양이 그렇게 많다면 당연히 물량을 조절해서 시장에 풀어야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원재료를 팔 게 아니라 완제품으로 만들어서 팔아야 합니다.”
클리오와 이지덤도 생각은 비슷했다.
몬스터 가죽과 뼈를 가공해 무기와 방어구, 장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공방이 필요합니다.”
“외성 대장간 근처에 전문 공방을 만들어야 합니다.”
“판로도 미리 개척해 놓아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영지군의 무기와 방어구 및 장비도 만드는 게 좋겠습니다.”
클리오와 이지덤의 말에 그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이지덤 행정관이 맡아서 한번 잘 추진해 보시오.”
“예, 영주님.”
“물건은 내성 창고와 영주 전용 창고에 보관해 놨으니 일단 수량부터 파악해 놓으시오.”
“알겠습니다.”
“클리오 수석 행정관도 이지덤 행정관을 전폭 지원해 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영주님.”
그렌은 큰 짐을 던 기분이 되어 이지덤을 바라봤다.
이런 일은 혼자 다 하는 것보다 역시 시켜야 제맛이다.
사실 그는 할 일이 참 많았다.
벼락포도 만들어야 하고, 텔레포트 아티팩트도 제작해야 한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열심히 먹고 마시며 떠들고 있는 미르 용병단 단원들을 쳐다봤다.
‘포병으로 쓸까? 아니면 친위대로 쓸까?’
어떻게 하면 잘 써먹을까 고민하는 그렌의 눈은 어느새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