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70
270화
강물이 넘실대는 용강선창(龍江船艙).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망포(蟒袍)에도 불구하고 해모수는 부둣가를 떠날 줄 몰랐다.
하얀 돛을 활짝 편, 범선 세 척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그걸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벌써 그리움이 가득했다.
부두 주변은 해모수를 제외하고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완전무장한 금의위가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히 그 무엇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용담호혈!
뚜벅, 뚜벅, 뚜벅!
하지만 금의위 교위들 사이를 바람처럼 스쳐가는 자가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비어복(飛魚服)에 환도를 찬 여인!
그녀는 바로 왕지현이었다.
“전하!”
해모수는 그녀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왕 첨사!”
왕지현은 그의 목소리에 오늘 유난히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오랜만에 혈육을 만났는데 회포를 풀기에 사흘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알고 있소.”
해모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한 손으로 가만히 팔찌를 쓰다듬었다.
이제 믿을 것은 이 ‘미스릴 팔찌’밖에 없었다.
[마루: 해모수! 너무 슬퍼하지 마!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렌: 그래. 내가 왜 너한테 ‘미스릴 팔찌’를 줬고 네가 또 왜 형제들과 해동연합 간부들한테 ‘팔각동패’를 각각 나눠줬는지 생각해 봐!] [해모수: 알고 있어요. 그들이 팔각동패를 가지고 산동의 집과 여러 거점으로 이동할 것을…….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어요.]마루와 그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명나라의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흔들고 있지만… 해모수는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불과했다.
형제들은 물론이고, 부모님과 어린 여동생 그리고 큰 누나를 그리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마루: 그래도 마음을 굳게 먹고 미리 텔레포트를 할 준비를 해둬!] [그렌: 팔각동패, 아니 좌표를 설정할 수 있는 마법동패를 열두 개나 만들어 줬으니까 앞으로 너 무지하게 바빠질 거다.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을 거야.] [해모수: 예, 알겠어요.]마루와 그렌의 설득에 결국 해모수도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은빛으로 빛나는 미스릴 팔찌를 힐끗 쳐다봤다.
이번에 공유 인벤토리를 통해 새로 넘어온 마법 팔찌다.
디버프, 플라이, 텔레포트 마법진이 각각 새겨진 아티팩트!
해모수는 미스릴 팔찌의 마법을 생각하자 절로 미소가 일었다.
“전하! 이제 좀 마음이 편해지셨습니까?”
“왕 첨사, 미안하오. 내가 오늘따라 좀 감정이 격해졌소.”
“미안하다니요. 그런 말을 들으니 오히려 제가 다 송구하옵니다.”
“하하하! 알겠소. 이만 가도록 합시다.”
“예, 전하!”
그는 장강의 물결을 한번 쳐다보고는 이윽고 몸을 돌렸다.
왕지현이 자연스럽게 그의 반보 뒤에 섰다.
그러자 금의위들도 일제히 대형을 바꾸며 움직였다.
“근데 사 동지와 양 동지는 어디 가고, 왕 첨사가 직접 왔소?”
“두 사람은 지금 여씨 문중과 회서방(淮西幇)의 회합 일로 바쁩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가볍게 묻고 별거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하지만 내용을 알고 들으면 상당히 심각했다.
“여암이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
“여씨 문중에 여암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이번에는 누가 나선 거요?”
“태후의 친부가 움직였습니다.”
“태후의 친부라면 여유고(呂留庫)인가?”
“예, 그렇습니다.”
아들이 말썽을 부려서 혼내줬더니 이제는 아버지가 나섰다.
여씨 문중이 설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이들과 회합을 가진 자들이 개국공신인 이선장과 호유용을 중심으로 이뤄진 회서 출신의 정치 그룹! 회서방이었다.
“황상과 황태후 폐하는 안녕하신가?”
“예, 잘 지내고 계십니다.”
이목이 많아 해모수는 이 정도만 물어보기로 했다.
물론 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얘기했고.
아무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격언처럼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해모수는 왕지현과 준비된 마차에 함께 올라탔다.
“궁성으로 돌아가자.”
“예, 전하!”
마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마부는 무려 금의위의 천무인 육소광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자신이 하는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금의위 교위들이 빠르게 달리며 마차를 호위했다.
뒤쪽으로, 말을 탄 금의위 교위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촤르르륵, 촤르르륵!
시원하게 돌아가는 수레바퀴 소리와 함께 마차는 점차 속도를 높였다.
정진문을 통과해 경성을 가로질렀다.
황성 성문을 통과해 곧바로 궁성 안으로 들어갔다.
해모수가 탄 마차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서거나 검문을 받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가히 무소불위의 권력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자꾸 해모수의 자리를 넘보는 자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중화전을 향해 걸어가자 주변으로 금의위들이 자연스럽게 포진했다.
해모수는 왕지현과 함께 중화전의 밀실로 들어갔다.
“차를 드릴까요?”
“답답한데 우리 탄산음료나 마십시다.”
“좋아요.”
갑자기 그녀의 눈이 마구 반짝였다.
역시 왕지현도 톡 쏘는 맛의 시원하고 달달한 탄산음료를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해모수는 인벤토리에서 시원한 콜라 두 캔을 꺼냈다.
탁, 치이익! 탁, 치이익!
두 사람이 동시에 캔을 따자 거품이 솟구치며 터져나갔다.
해모수와 왕지현은 얼른 입을 가져다 댔다.
결코, 단 한 방울도 흘릴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카아!”
“좋다.”
이건 마셔본 사람만 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빈 캔을 치우자 사공명과 양중달이 두꺼운 책자를 잔뜩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를 뵈옵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두 분 어서 오시오.”
사공명과 양중달은 해모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가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이하자 그들의 굳었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이리 앉으시오.”
“예, 전하.”
해모수와 왕지현이 나란히 앉고 사공명과 양중달이 맞은편 탁자에 앉았다.
네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전하! 여씨 문중과 회서방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태후의 친부와 회서방이 회합을 가졌다는 얘기는 들었소.”
사공명의 무거운 말에 해모수가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양중달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여유고가 지금 황태후 폐하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회서방이 주덕흥을 앞장세워 전하와 해동연합을 노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담담한 해모수의 말에 양중달이 애가 닳은 표정이 됐다.
“지금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전혀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있소.”
“혹시 무슨 대책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이조편법을 전면 시행할까 하오.”
“이조편법이라면? 혹시 세금을 금과 은으로만 내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사공명과 양중달은 퍼뜩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일조편법은 원래 명나라 후기부터 시행된 세금 제도다.
요역을 포함한 잡다한 세금을 토지세와 인두세로 통합해 은으로 내게 하는 조세제도다.
해모수가 말한 이조편법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은과 금으로 세금을 낼 수 있게 한 것이다.
“갑자기 왜 이조편법을 시행하겠다는 것입니까? 세금을 낼 수 있을 정도로 나라에 은과 금이 충분하지 않을 텐데요.”
“성동격서, 만천과해, 차도살인, 혼수무어!”
“아!”
해모수의 말에 양중달은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먹었다.
사공명도 잠시 생각을 하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성동격서는 상대방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란 말이다.
만천과해는 은밀하게 내일을 도모하라는 뜻이다.
차도살인은 직접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적을 찌르게 하는 방법이다.
혼수무어는 혼란을 일으켜 결정타를 가하는 병법이다.
“이조편법으로 저들의 주의를 끌고, 그사이 대처할 방안을 찾으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런데 차도살인은 누구의 손을 빌리실 겁니까?”
“누군가 빌려주지 않겠소?”
해모수는 사공명의 질문에 선문답하듯 말했다.
양중달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럼 마지막 결정타는 누가 합니까?”
“그건 아마 황태후 폐하께서 하게 되실 것이오.”
“내각에 이조편법에 대해 논의를 하라고 말해둬야겠군요.”
“지금부터 의논해 놔야 내년이나 시행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이조편법을 실행하겠다는 의도였습니까?”
“허허실실 몰라요?”
“아! 진심이셨군요.”
사공명과 양중달이 동시에 크게 눈을 떴다.
확실히 명나라는 아직 이조편법을 실행하기에 좀 이른 감이 있었다.
하지만 해모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조편법은 해동연합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유통할 새로운 화폐 발행을 위한 포석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동연합의 화폐는 이 시대의 기축통화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을 모티브 삼아 그도 해동연합은행을 만들 예정이다.
모든 일이 예상대로 순조롭게 흘러간다면… 명나라의 명줄을 잡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동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오. 금, 은, 동, 전표 이 네 가지를 화폐로 쓸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추진해 보겠습니다.”
사공명과 양중달은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넘어갔다.
아무래도 해모수가 나름 무슨 복안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황실의 자금은 다 풀었소?”
“예, 전하! 말씀하신 대로 해동연합에게 전량 넘겨 호광의 옥토에 투자하도록 했습니다.”
“동창은 조직됐습니까?”
“이미 조직이 만들어져 교육에 들어갔습니다.”
“개국공신들과 여씨 문중의 비리는 수집하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워낙 비리가 심하고 뇌물을 많이 받아먹어서 파고 또 파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일차로 모은 자료들을 정리해서 이렇게 책을 만들어 왔습니다.”
해모수는 무게가 꽤 나갈 것 같은 책자를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잘 모아놓으세요. 그게 전부 저들의 목을 조일 칼이 될 테니까 말이오.”
“예, 전하!”
왕지현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해모수는 사공명과 양중달에게 몇 가지 당부와 지시를 내리고 회의를 마쳤다.
두 사람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그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요?”
“말한 그대로요.”
“차도살인의 계책은 혹시 전하가 아니신가요?”
시치미를 뚝 떼려고 했지만.
역시 왕지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핵심을 파악하고는 훅 치고 들어왔다.
해모수는 굳이 그녀에게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맞소. 내가 밤에 나가서 몇 놈 치워버리려고 했소.”
“그런 일이라면 같이 가요.”
“왕 첨사는 황상의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저 없어도 황상을 지킬 사람은 많아요. 그리고 은밀히 교훈을 내리기엔 제가 가지고 있는 천음의 기운이 꼭 필요할 거예요.”
“으음.”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왕지현의 말이 맞았다.
여암을 사고로 위장해서 반신불수로 만들었지만, 사실 그런 일은 천음을 이용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감기나 몸살로 병석에 눕게 만들면 자연히 권력에서 멀어지게 된다.
혹시라도 나아서 한자리하려고 들어도 몸이 약해서 불안하다고 하면 끝이다.
벼슬을 하는데 몸이 아픈 사람을 보내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는 것보다는 천음이 백배 나은 방법이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고맙습니다. 전하!”
왕지현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귀엽게 고개를 숙였다.
해모수는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잠시 그녀가 밀실을 나가 황상을 보러 갔다.
그사이 그는 미니 맵을 열고 지도를 크게 확장했다.
산동에서 경사(남경)까지만 환하고 나머지 지역은 전부 어두웠다.
다만 장강을 타고 바다로 향하는 범선 세 척만큼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모두 그렌이 보내준 팔각동패, 즉 좌표를 설정할 수 있는 마법동패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