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71
271화
해모수는 잠시 멍하니 미니 맵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문뜩 책상 위에 놓인 책자로 눈이 갔다.
개국공신들과 여씨 문중의 비리가 모두 담겨있는 만큼 상당히 두껍고 무거웠다.
“으음.”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원장이 왜 그렇게 개국공신들을 갈아댔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부정부패도 정도가 있고 뇌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이놈의 개국공신들의 파렴치한 행태에는 그 한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뇌물을 받아 관직을 매매하고, 부녀자를 납치해 강간하고 팔아버렸다.
남의 재산을 가로채는 것은 다반사다.
마음에 들지 않는 관리를 폭행하거나 심지어는 때려죽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무도 이들이 저지른 범죄 사실을 고발하거나 탄핵하지 않았다.
여씨 문중의 비리도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
뇌물을 받거나 매관매직을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황제와 황태후의 이름을 팔아 각종 이권과 사업에 개입해 거액을 챙겼다.
심지어는 육부의 상서들을 협박하고 국정을 농단하려고 들었다.
도대체 황태후 여씨가 수렴청정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루: 아무래도 슬슬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겠다.] [그렌: 주원장을 죽이지 말고 그냥 살려둘 걸 그랬어. 잘못하면 괜히 해모수의 손에 피만 묻히겠어.] [해모수: 작전을 좀 바꿔야겠어요.] [마루: 어떻게?] [그렌: 혹시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해모수: 그냥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너무 만만하게 보이나 봐요.]마루와 그렌은 해모수의 말에 진득한 살기를 느꼈다.
[마루: 난 해모수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반대야. 자기들끼리 싸움을 붙이든가, 조회에서 개국공신과 여씨 문중을 탄핵하도록 분위기를 몰아가자.] [그렌: 그래. 그게 좋겠어.] [해모수: 그건 그것대로 실행할 거예요.]해모수는 마루와 그렌의 우려를 가볍게 일축했다.
아무래도 그는 오늘 손에 잔뜩 피를 묻히려는 것 같았다.
마침 왕지현이 밀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해모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상공!”
왕지현은 조심스럽게 뒤로 다가와 해모수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잔뜩 날이 서있던 그의 기세가 한풀 누그러졌다.
“슬슬 잔가지를 쳐내야겠어.”
“개국공신과 여씨 문중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소.”
“사공명과 양중달 동지에게 지시하면 알아서 잘할 거예요.”
“그렇겠지.”
해모수는 생각보다 일찍 칼을 뽑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될 수 있으면 좀 천천히 느긋하게 정리하려고 했는데, 온갖 잡것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한동안 그렇게 꼼짝하지 않고 서있었다.
* * *
궁성(宮城) 보화전(保和殿).
“폐하! 강하후(江夏侯) 주덕흥을 엄벌에 처하셔야 하옵니다.”
도찰원 도어사(都御司) 구준이 무거운 목소리로 간언했다.
그러자 이부상서 소하와 호부상서 조참이 뒤를 이었다.
“맞습니다. 태조께서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관해서만큼은 일벌백계로 다스렸습니다.”
“아무리 개국공신이라고는 하나 이처럼 극악무도한 범죄를 지은 자가 백주, 대낮에 경성을 마음껏 활보하게 내버려 둬서는 아니 되옵니다.”
황태후 여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옆의 탁자 위를 쳐다봤다.
두껍게 쌓여있는 고발장과 비리 사실을 조사한 보고서!
그 양이 보는 자로 하여금 기가 질리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려 금의위 지휘사 해모수를 찾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화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왜 자꾸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를 먼저 찾게 되는지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주덕흥은 태조께서 임명하신 호광(湖廣)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의 지휘사(指揮使)라는 막중한 임무를 팽개치고, 경사로 올라와 온갖 비리에 관여한 죄가 실로 막중하옵니다. 철저히 조사하여 죄가 드러나면 엄벌에 처해 이 땅에 황실의 지엄함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소서!”
“폐하! 통촉하여 주옵소서.”
한림원의 추기 학사의 조리 있는 말에 모든 대신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강하후 주덕흥을 탄핵하기 시작한 지 벌써 이레나 지났다.
개국공신이라 좀 봐주려고 해도 이렇게 명백하게 죄가 드러나면 답이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황실의 위엄에 손상이 갈 것이다.
태후는 옆에 앉아있는 어린 황제를 쳐다봤다.
처음에는 큰 소리에 깜짝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제 이력이라도 생겼는지 대신들이 아무리 난리 블루스를 춰도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
대신들은 조용히 태후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침묵을 하는 게 얼마나 큰 압박인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결국 황태후 여씨는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금의위는 강하우 주덕흥을 추포하고 비리 사실이 있는지 명명백백히 밝혀내도록 하라! 만약 죄가 드러난다면 일벌백계로 다스릴 것이다.”
“예, 황태후 폐하!”
사공명 금의위 지휘동지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태후의 결단에 대신들은 마음속으로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남몰래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태후의 모습이 편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각대학사 관중이 앞으로 나섰다.
태후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내각대학사는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가?”
“예, 폐하! 먼저 이렇게 결단을 내려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먼저 얼굴에 금칠부터 하는지 모르겠구려.”
이제는 태후도 눈치라는 게 생겼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하지만 관중은 조금도 신색이 변하지 않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개국공신들이 비록 이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옵니다. 하지만 태조께서 내리신 부귀영화로 만족하지 않고 강하후 주덕흥처럼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정작 청렴결백한 공신들까지 한꺼번에 매도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태후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차제에 개국공신들을 전수 조사하시어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야 할 것이옵니다.”
태후는 생각했던 것보다 별일 아니자 굳었던 얼굴을 폈다.
“맞는 말이오. 금의위는 개국공신들을 전수 조사하여 비리가 있는 자들을 철저히 색출하도록 하라!”
“예, 폐하!”
그녀는 개국공신의 비리를 늘 하던 대로 금의위에 떠넘겨 버리고 얘기를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일찍 긴장을 풀었다.
지금 이것은 끝이 아니라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내각대학사 관중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목청을 높였다.
“폐하! 이번 기회에 국정을 농단하고 온갖 비리를 저지른 자와 세력들을 엄벌에 처하시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거야 당연한 것이 아니요?”
“그렇습니다. 이 당연한 것을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감히 언급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태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개국공신의 죄를 묻고 탄핵을 언급한 것은 대신들이지 않소?”
“그래서 저도 용기를 내서 그들의 죄를 묻고 탄핵을 하려고 합니다.”
내각대학사 관중이 시원하게 얘기하지 않고 물을 뱅글뱅글 돌리자, 태후는 살짝 짜증 난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그들이 누구이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구려.”
그러자 보화전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설마!’
이상하게도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태후의 예상대로 기어코 듣고 싶지 않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폐하! 여유고와 여암을 탄핵하소서!”
“탄핵하소서!”
“온갖 비리에 연루된 여유고와 여암을 엄벌에 처하소서!”
“엄벌에 처하소서!”
그제야 태후는 대신들이 누구를 노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정조준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친부와 오라비였다.
태후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런 그녀를 향해 대신들의 본격적인 탄핵이 시작됐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여유고는 뇌물을 받아 관직을 매매했고, 조정의 관리를 폭행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감히 황상과 황태후 폐하의 이름을 들먹이며 육부의 상서들을 압박하고 국정을 농단하려고 들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옵니다. 그의 아들 여암은 부녀자를 납치하여 희롱을 일삼았고 노비로 만들어 멀리 팔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황실을 들먹이며 각종 이권과 사업에 개입해 거액을 착복했습니다.”
국자감 제주(祭州) 안영을 시작으로 통정사(通政司)의 통정사(通政使) 왕단이 뒤를 이었다.
“여유고와 여암이 이처럼 참담한 범죄를 저지르자 말려야 하는 처지인 여씨 문중도 부화뇌동하여 온갖 비리를 저지르기를 서슴지 않고 황태후 폐하의 위엄에 오물을 뿌리고 있사옵니다.”
“폐하! 즉시 여유고와 여암을 잡아들여 단죄하소서!”
“단죄하소서!”
“여씨 문중을 철저히 조사하여 여죄를 추궁하시고 죄가 드러나면 엄벌에 처하시옵소서!”
“엄벌에 처하시옵소서!”
육부의 상서들과 도찰원, 국자감, 통정원의 수장, 심지어는 오군도독부 도독까지 합세해 탄핵을 부르짖었다.
쾅!
“오늘 조회는 여기까지만 하겠소.”
화가 난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태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화전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뒤늦게 내관이 황제를 데리고 태후의 뒤를 쫓아갔다.
보화전은 일순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하지만 대신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시작된 탄핵 정국이 곧 태풍의 핵으로 변해 거대한 피바람을 불러들일 것을 말이다.
* * *
궁성 건청궁(乾淸宮).
“위국공(衛國公)! 도와주세요.”
“황공하옵니다.”
해모수는 정중하게 태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옥좌에 앉은 황태후 여씨의 안색이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지금 대신들이 하나같이 내 아비와 오라버니의 탄핵을 외치고 있습니다.”
“황태후 폐하! 그들이 왜 탄핵 상소를 올렸는지 이유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태후는 슬쩍 옆에 놓인 탁자 위를 쳐다봤다.
거기에는 고발장과 탄핵 상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친부와 오라버니가 저지른 비리와 관련이 있었다.
물론 그동안 금의위가 조사한 ‘비리 조사 보고서’도 책으로 만들어져 한쪽에 얌전히 쌓여있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나도 눈이 있는데 어찌 올라온 상소와 보고서를 읽지 않았겠습니까?”
“폐하,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길 원하고 계십니까?”
해모수가 슬쩍 고개를 들고 황태후 여씨를 쳐다봤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조정의 권력이 위국공의 손에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시옵니까? 이 나라의 권력은 엄연히 황상과 황태후 폐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해모수는 안색도 바꾸지 않고 그냥 딱 잡아뗐다.
이건 절대로 인정을 해선 안 되는 말이다.
공공연한 비밀도 엄연히 비밀이었다.
그게 공식화되면 한순간에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다.
“난 조정의 대신들을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아니에요. 위국공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제 조정의 대사에 참견한 적이 있습니까?”
그는 아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태후도 지금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강하게 해모수를 압박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해모수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조정의 일에 끼어들거나 참견한 적이 없었다.
“없지요. 없었습니다. 그래도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위국공의 눈치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굉장히 참람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군요.”
해모수는 강하게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다.
“저는 일개 금의위 지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어찌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럼 내가 비약이 조금 지나쳤다고 합시다. 아녀자의 실수로 생각하시고 그냥 잊어주세요.”
황태후 여씨는 아녀자 드립까지 쳐가며 해모수를 설득하려고 했다.
물론 그는 절대 쉽게 넘어가지도 않았고 또한 오만방자하게 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