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72
272화
“황공하옵니다.”
“어쨌든 지금 이대로 탄핵 정국이 흘러가면 내 아비와 오라비는 죽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요. 형률(刑律)을 어기면 처벌받아야 하는 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태후가 조급해질수록 반대로 그에게는 여유가 생겼다.
속이 탄 태후는 결국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좀 봐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설마 지은 죄를 그냥 덮어주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해모수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여유고와 여암이 형옥(刑獄)에 갇힌 지 벌써 며칠째입니까? 그런데도 아직 국문조차 열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특혜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옵니다. 황태후 폐하의 혈육이 아니었다면 결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옵니다.”
“압니다. 알고말고요. 개국공신인 주덕흥이 국문장에 들어가 만신창이가 됐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죄를 자복했다는 소식도요.”
“여유고와 여암이 지은 죄와 여씨 문중이 그동안 저지른 참담한 비리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미 밝혀진 것만으로도 중벌을 면키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가 닳은 태후는 자신의 긴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위국공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제게 뭘 바라십니까?”
“어떻게든 제 아비와 오라비의 목숨만 살려주세요.”
해모수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동안 태후는 여유고와 여암의 죄를 덮어버리려고만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가벼운 처벌로 대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여씨 문중의 죄도 거액의 벌금을 내는 것만으로 빠르게 봉합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원칙을 강조했다.
그들은 오히려 매일 조금씩 강도를 높여가며 태후를 압박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탄핵의 열기!
태후는 점차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여유고와 여암의 바로 옆에는 비교할 만한 대상까지 있었다.
바로 개국공신인 강하후 주덕흥이다.
이미 국문을 받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
모든 죄를 자복하고 간신히 목숨만 남겨놓은 채 이제 처벌만 남겨놓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직 국문조차 받지 않은 여유고와 여암은 확실히 특혜였다.
“어휴!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약속을 해주세요.”
틈을 보이니 태후가 바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렇다고 해모수가 그렇게 호락호락 당해줄 리 없었다.
“제가 무슨 재주로 조정의 일에 함부로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위국공밖에 없어요.”
“정말 난감한 일이로군요. 만약 여유고와 여암의 죄를 치죄하지 않고 살려준다면 개국공신인 주덕흥도 중형으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태후는 마음이 여렸다.
“그,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로 인해 여씨 문중에 더욱 혹독한 처분이 내려질 수도 있습니다.”
“감수하겠습니다.”
태후는 결국 여씨 문중을 외면했다.
친부와 오라비를 살리기 위해 가문을 버린 셈이다.
이게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정세에 영향을 미칠지…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후폭풍이 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 이조편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고 하더군요.”
해모수는 은근슬쩍 이조편법을 언급했다.
“그렇습니다.”
“황태후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태후는 대신들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자고 하니 자신도 허락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전면 시행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일단 제가 한번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해모수의 애매한 대답에도 황태후 여씨는 반색했다.
“위국공! 고맙습니다.”
“황공하옵니다.”
해모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 일로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이 아니다.
안일한 일 처리로 말미암아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아마 태후 자신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태후에게 쏠렸던 세력과 이목이 급속히 이탈하는 조짐을 보였다.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자들!
그들은 현재 누가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덕분에 해모수는 가만히 앉아서 나라의 권력을 확고히 장악할 수 있었다.
며칠 뒤!
여유고와 여암은 가족들과 함께 산동성(山東省) 등주(登州)로 귀양을 떠났다.
모든 재산은 황실로 귀속됐고 이들의 감시는 금의위가 맡게 됐다.
한마디로 태후의 친부와 오라비를 비롯한 그녀의 혈족들이 모두 해모수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같은 날, 주덕흥도 종신 유배형을 받고 해남(海南)으로 떠났다.
모든 재산은 황실로 귀속됐고 그의 가족과 식솔은 모두 노비가 되어 팔려갔다.
여씨 문중도 거의 초토화됐다.
대부분 노비가 되어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당연히 그 많던 재산도 모조리 황실로 귀속되었다.
이번 탄핵 사건의 승자는 누구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내각의 대신들이었다.
그러나 아는 자들은 다 안다.
명나라의 실권을 잡은 자가 누군지를 말이다.
이번에는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위국공이 가지고 있는 금의위 지휘사라는 직책으로 인해 감히 해모수를 만나겠다고 나서는 이는 거의 없었다.
다만 그와 연줄이 닿아있는 내각대학사와 육부상서! 조정의 핵심 부처 수장들이 청탁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도 금의위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었다.
뇌물을 받는 것까지는 허용됐다.
다만 누구에게 얼마를 받았는지는 반드시 금의위에 보고해야만 했다.
그러니 뇌물을 받으면 받을수록 금의위엔 저절로 비리 보고서가 쌓이게 됐다.
언젠가 이것이 뇌물을 먹인 자들의 숨통을 조일 올가미가 되리라는 것을… 이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경성(京城) 청량산(淸凉山).
황성을 나온 해모수는 청량산에 올랐다.
경성 안에 있는 산이라 그리 높진 않았다.
그래도 답답한 심사를 달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오랜만에 산에 오르자 속이 다 시원했다.
“전하! 청량산에 오르니 얼굴이 많이 밝아지셨사옵니다.”
“하하하! 그렇소?”
남사성 천무의 말에 그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오추량 천무가 장난기 있게 끼어들었다.
“황성이 아무리 좋다 한들 집보다 편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무인들은 가끔 이렇게 바람을 쐬어주지 않으면 답답해서 병이 난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러자 육소광 천무도 소외될 수 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
“저는 산보다 강이 좋습니다.”
“물이 좋다면 바다로 가는 것은 어떤가?”
“파도가 무서워서 배를 못 타니 바다는 제가 살 곳이 아닙니다.”
“천하의 육 천무가 파도를 무서워하다니…….”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해모수와 천무 셋은 오순도순 얘기하며 산길을 걸었다.
워낙 권위의식이 없는 해모수라 그들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주위에는 서른여섯 명의 교위와 일흔두 명의 역사들이 부챗살처럼 퍼져있었다.
그로 인해 감히 그 누구도 위국공의 앞길을 막아설 수 없었다.
“청량위가 보입니다.”
남사성 천무가 손으로 산 중턱을 가리켰다.
해모수는 슬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청량(淸凉) 위지휘사사’라는 편액이 달린 높은 문이 눈에 들어왔다.
해모수와 금의위들이 천천히 다가갔다.
안에서 건장한 체격의 무장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청량위의 지휘사 목칠성이었다.
그는 해모수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위국공 전하를 뵈옵니다.”
목칠성의 뒤로 지휘동지와 지휘첨사, 진무와 천호 등 수십 명의 무장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위국공 전하를 뵙습니다.”
해모수는 가만히 이들을 쳐다봤다.
하나같이 체격이 당당하고 눈에는 정광이 흘렀다.
과연 청량위의 지휘관들다운 모습이었다.
“…….”
숲은 일순 침묵에 휩싸였다.
해모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당연히 분위기는 착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살며시 열렸다.
“다들 반갑소. 모두 일어나시오.”
“고맙습니다. 전하!”
해모수의 말에 목칠성 지휘사가 대표로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무장들까지 모두 일어나자 그는 목칠성의 앞에 섰다.
“그냥 가볍게 바람을 쐬러 왔으니 편하게 대해주시오.”
“예, 전하!”
목칠성은 편하게 대하라는 말에 더욱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 해모수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사성 천무는 해모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난 금의위의 남사성 천무요.”
“청량위 목칠성 지휘사입니다.”
“반갑소. 전하께서 조용히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오.”
“청량각(淸凉閣)으로 오르면 될 것이옵니다.”
“알겠소. 그럼 안내해 줄 사람을 하나 붙여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청량위를 점고하신다고 들었는데…….”
목칠성은 슬며시 말끝을 흐렸다.
해모수는 육소광 천무를 쳐다봤다.
그러자 육소광이 잽싸게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난 금의위의 육소광 천무요. 청량위 점고는 내가 하겠소.”
“예, 잘 부탁드립니다.”
목칠성은 길 안내로 청량위 지휘동지를 한 명 붙여줬다.
육소광을 남기고, 해모수는 바로 옆길로 빠져 올라갔다.
남사성과 오추량이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앞뒤로 교위들이 호위하며 빠르게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이들의 발걸음은 거칠 게 없었다.
순식간에 산비탈을 타고 꼭대기에 닿았다.
절벽 위에 세워진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목칠성이 언급했던 ‘청량각’임을 알 수 있었다.
휘이이잉!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옷자락을 뒤흔들었다.
해모수는 맞바람을 맞으며 청량각에 홀로 올랐다.
청량각에서 바라보는 경성의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알고 전각을 지어놓았을까?
반대편으로 가보니 청량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점고를 받는 병사들의 모습은 마치 개미 떼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마루: 여기 경치가 아주 끝내준다.] [그렌: 이렇게 보니까 청량위가 참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네.] [해모수: 맞아요. 경성 안에 위지휘사사를 둘 만한 곳이 그렇게 많진 않아요.]위지휘사사에는 5,600명의 병사가 배치된다.
청량위도 당연히 그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들은 황성에 문제가 생기면 빠르게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많은 군마까지 가지고 있었다.
[마루: 그나저나 이 작전이 잘 먹힐지 모르겠네요.] [그렌: 미끼를 던졌으니 분명히 받을 거야.] [해모수: 이조편법이 전면 시행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상당히 많아요.]조정 대신들이 이조편법의 전면 시행을 주청하고 태후가 허락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 법이 당장 실행될 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조편법을 제도화하는 일은 전혀 쉽지 않았다.
일조편법만 하더라도 여러 번 좌초됐다.
온갖 시행착오 끝에 간신히 정착된 제도라는 말이다.
이렇게 일조편법 하나도 성공시키기 어려운 판에 당장 이조편법을 전면 시행하는 것엔 큰 무리가 따랐다.
그런데 해모수의 목적은 사실 이조편법이 아니었다.
이조편법의 전면 시행 논의를 계기로 일어날 금과 은의 화폐화(化)!
이거야말로 그가 노리는 궁극적인 목표였다.
당연히 금화와 은화는 해모수가 따로 만들어 해동연합을 통해서 뿌릴 것이다.
처음에는 아마 명, 고려, 왜에서만 통용될 것이다.
하지만 나중엔 동아시아와 인도 및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과 아메리카까지 퍼져 전 세계적인 기축통화로 통용될 것이 틀림없었다.
[마루: 네가 이리 온다는 정보는 확실히 흘렸지?] [해모수: 금의위를 통해 은밀하게 흘려서 개국공신들의 귀에 들어가게 했어요.] [그렌: 개국공신들은 지금도 충분히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데 왜 이렇게 권력에 욕심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해모수: 원래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했어요.]해모수는 그렌의 말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미니 맵을 확대했다.
세상에 그 어떤 지도보다 사실적인 경사(남경)의 지도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