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79
279화
“영주님께서는 저희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음.”
가만히 보면 저 대장로도 엘리샤 못지않은 돌직구였다.
제안한 지 얼마나 됐다고 대답을 내놓으라고 성화란 말인가!
그렌은 잠시 고민하다가 마루와 해모수의 조언부터 듣기로 했다.
[그렌: 어떡하지?] [마루: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계획대로 하세요.] [해모수: 불의 여왕과의 혼인은 그렌 형에게 손해될 게 전혀 없어요.]그렌의 물음에 마루와 해모수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렌: 정말 그래도 될까? 저들이 내 제안을 받아들일까?] [마루: 물론이죠. 더 사랑하는 게 약자라고 했어요. 이미 형한테 푹 빠져있는 엘리샤예요. 그러니 야엘 하나 끌어안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을 거예요.] [해모수: 나도 마루 형과 생각이 같아요.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당당하게 말하세요. 당연히 그렇게 돼야만 한다는 듯 말이에요.] [그렌: 알았어.]그렌은 마루와 해모수의 말에 큰 용기를 얻었다.
크게 숨을 한번 들이켜고 그는 담대하게 말했다.
“제안은 기쁘게 받아들이겠소.”
“아!”
“감사합니다. 영주님!”
“오오! 잘됐습니다. 영주님!”
“이런 경사가 있나! 하하하!”
여기저기에서 각기 다른 반응들이 쏟아져 나왔다.
뒤에서는 절망의 한숨이.
수석 행정관에겐 묘한 기대감이.
대장로를 비롯한 바이칼족 장로들에게서는 환호성이.
그리고 메인 홀의 행정관들에게선 기쁨의 웃음이.
하지만 당사자인 그렌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뒤에서 들려오는 한숨!
그게 마치 자신의 심장을 칼로 찌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단! 조건이 있소.”
“네에? 조건이라고요?”
대장로를 비롯한 바이칼족 장로들의 얼굴이 급변했다.
그동안 카시오페라 왕국에 당해온 게 있어서 그런지 반응이 아주 날카로웠다.
“그렇소. 내 조건은 단 하나요. 바로 여기 뒤에 있는 내 수호 기사 야엘을 정실부인이 될 불의 여왕과 함께 둘째 부인으로 맞고 싶소.”
“으에!”
“예에?”
“부인을 한 번에 둘이나 얻겠다고요?”
“불의 여왕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부인을 한 명 더 얻겠다고요?”
“허허! 이것 참!”
이번에도 반응은 참 다양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것은 기쁨과 놀람의 감탄사였다.
앞에서 들리는 것은 당황과 놀라움의 콤비네이션이었다.
그렌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불의 여왕과 결혼하는 것은 찬성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한 내 호위 기사 야엘을 버릴 수는 없소. 만약 이 조건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오늘 한 제안은 아예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그렌은 단호하게 자신의 조건을 거듭 강조했다.
“영주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오랫동안 정이 든 여자를 내칠 수는 없으시겠죠. 그렇다고 부인을 둘이나 둔다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차라리 귀족의 애첩인 미스트리스의 지위를 정식으로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대장로는 이참에 통 크게 양보했다.
상대가 일반 귀족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협상 상대를 잘못 골랐다.
겉보기와는 달리, 의외로 정이 많고 자상한 그렌!
그는 보통 고집쟁이가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못 얻는다면! 차라리 쪽박을 깨버리는 타입의 지랄맞은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은 불의 여왕 엘리샤와도 아주 흡사했다.
“대장로!”
“네, 영주님.”
비릿한 미소를 짓는 그렌의 표정에 대장로는 한껏 긴장했다.
“지금 뭔가 크게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이 건에 관한 한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소. 더구나 내 여자를 두고 남들이 왈가왈부하는 것도 딱 질색이오. 그러니 인제 그만 돌아가시오.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알겠소.”
쿵!
경악의 연속이었다.
대장로는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쳐다봤다.
바이칼족 장로들도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고위 마법사이자 귀족인 그렌 영주가, 애인인 호위 기사 한 명 때문에 불의 여왕과의 혼사를 이렇게 파토 낼 줄은 몰랐다.
저벅, 저벅, 저벅!
그렌은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메인 홀을 벗어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야엘!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 그의 뒤를 마구 쫓아 달려갔다.
너무 놀라 잠시 말문이 막혔던 바이칼족 장로들이 서서히 정신을 찾았다.
그제야 지금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아차! 이거 큰일 났군.”
“대장로! 이 일을 어쩌시렵니까?”
“여왕께서 알았다간 우린 모두 죽은 목숨입니다.”
“한번 까탈을 부리면 당할 재주가 없는 여왕입니다.”
“오기 전에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키라고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소.”
“이 일에 전권까지 내주셨는데, 이대로 돌아간다면 아마 내일쯤 우린 와이번의 똥이 될 겁니다.”
“난 도저히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소.”
“정실을 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하셨소.”
그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댔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대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혼인을 성사시키는 게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대장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과연 이게 잘한 일인가?
답은 금세 나왔다.
‘생각해 보니 내가 미쳤었군. 우리 부족이 언제부터 토러스 대륙의 법을 따랐다고 그렌 영주의 조건을 뿌리쳤단 말인가! 그냥 여왕께 이 소식을 전하고 가부만 들으면 됐을 것을……. 내 좁은 안목에 영주의 자존심을 건드렸구나.’
대장로는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했다.
마음을 정하자 눈을 번쩍 떴다.
“갑시다. 가서 여왕께 의향을 묻고 다시 옵시다.”
“가긴 어딜 갑니까? 그냥 마법 수정구로 묻는 게 빠릅니다.”
“아! 마법 수정구!”
장로들의 말에 대장로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문질렀다.
‘내가 물러날 때가 다 됐군. 늙으면 죽어야 한다더니. 어떻게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지.’
대장로는 자조의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장 물어봅시다.”
“좋습니다.”
장로 중 하나가 품에서 마법 수정구를 꺼냈다.
그러고는 급히 여왕에게 연락했다.
―어떻게 됐어?
마법 수정구가 활성화되자마자 불쑥 불의 여왕의 얼굴이 나타났다.
볼은 긴장으로 상기되었고, 눈엔 기대가 벌써 한가득했다.
“크흠.”
“대장로가 말씀드릴 겁니다.”
장로들은 ‘앗! 뜨거워라!’ 하고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괜히 저 상태에서 잘못 건드리면! 여왕의 더러운 성질이 폭발한다는 것을 모를 자들이 아니었다.
―어라! 이거 뭐야?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여왕께 아룁니다.”
불의 여왕의 눈빛이 가늘어지자 결국 대장로가 총대를 맸다.
―오오! 대장로! 그래 말해봐! 어떻게 됐어?
크리스마스에 산타의 선물 한 보따리를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
그게 지금 마법 수정구에 비친 여왕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대장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겉으로는 손녀를 대할 때 쓰는 은은한 할아버지 미소를 지었다.
“일단 바이칼 영주께서 우리의 제안을 승낙하셨습니다.”
―이야호!
대장로의 말에 불의 여왕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 천진한 모습에 대장로가 짓던 가식의 가면이 바로 깨졌다.
하지만 신이 난 불의 여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사이 대장로는 급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바이칼 영주께서 조건을 하나 거셨습니다.”
―호호호호! 그게 뭔데?
환호성을 지르고 있던 여왕이 용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물었다.
대장로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신의 호위 기사인 야엘도 같이 부인으로 삼고 싶다고 했습니다.”
―뭐야? 설마 정실 자리를 달라고 한 건 아니겠지?
불의 여왕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싸늘해졌다.
대장로는 당황해서 급히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애첩이 아닌 제2부인으로 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으래? 알았어.
불의 여왕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장로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예에? 여왕께선 영주의 호위 기사가 제2부인이 돼도 좋다는 겁니까?”
―좋긴 누가 좋대? 하지만 어쩌겠어. 나보다 먼저 만나서 좋아하던 사인데.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정실 자리를 가로챈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미안한 일이지.
엘리샤는 쿨내를 풀풀 풍겼다.
“아니 그래도 이건 좀…….”
―그만! 미리 경고하는데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해서 우리 그렌 영주님 심기 사납게 만들지 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납작 엎드려서 비위 잘 맞춰줘! 나중에 문제 생기면 나 정말 가만히 안 있을 거야. 그러니까 좋게 마무리 잘하고 와! 어지간한 것은 그냥 다 들어주고. 알았지?
“아! 눼에에!”
대장로는 불의 여왕의 협박에 가까운 말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잠시 깜빡했었다.
우리 여왕이 어떤 호구인지를 말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바이칼 영주에게 간과 쓸개를 다 빼줘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눈앞을 가리는 대장로였다.
그 모습에 다른 장로들이 다가와 가만히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힘내라고 말이다.
한편, 메인 홀을 나와 영주관저로 향한 그렌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우!”
그는 대충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한 것 같아 안심했다.
다다다다다!
그때 그렌의 뒤로 야엘이 달려왔다.
몸을 돌리자 그녀는 눈물을 뿌리며 안겨 들었다.
“어이쿠!”
전신을 갑주로 무장한 야엘의 몸무게는 가볍지 않다.
거기에다 전력으로 달려와 안기니 꽤 충격이 있었다.
그래도 아프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나오려던 입도 쏙 들어갔다.
“으흐흑! 죄송해요. 전 이런 마스터의 마음도 모르고 그동안 원망만 해댔어요.”
“아니야. 내가 미안해!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불의 여왕보다 먼저 야엘과 결혼식을 올려버릴 걸 그랬어.”
“안 돼요. 그건 정말 안 되는 일이에요. 귀족에게 결혼은 인생을 바꿀 큰 무기이자 기회예요. 저같이 보잘것없는 여자 하나 때문에 영주님에게 큰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제발 참아주세요.”
“알았어. 그러니 이제 제발 그만 좀 울어. 누가 보면 내가 때린 줄 알겠다.”
“헤헤!”
그렌의 말에 그제야 야엘은 귀엽게 미소를 지었다.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귀여웠다.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야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입을 살짝 벌렸다.
그렌은 손으로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러곤 자신의 품에 꼭 안았다.
“야엘! 너는 절대 보잘것없는 여자가 아니야. 항상 나를 봐주고 지켜주잖아. 세상에 그런 사람이 야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마스터!”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야엘은 그렌의 이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감격해서 또다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렌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야엘을 꼭 안아주었다.
도도도도도!
그때 클리오 수석 행정관이 빠르게 달려왔다.
그는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그렌에게 다가가 귀에다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그렌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그럼 오늘은 나 피곤하다고 보내고 내일 오라고 해!”
“네, 영주님.”
클리오 수석 행정관은 올 때보다 더 빠르게 신나게 달려갔다.
도도한 바이칼 장로들을 애태울 생각을 하니 절로 신이 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야엘이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도 눈치가 빨라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걸 바로 알아챘다.
그렌은 좀 놀려줄까 하다가 그녀의 눈물을 보고는 바로 마음을 바꿨다.
“엘리샤가 내 조건을 받아들였대.”
“네에? 정말요?”
“응.”
“그럼 저 진짜로 마스터의 아내가 되는 거예요?”
“맞아. 정부인은 아니고 제2부인이야. 미안해!”
“미안하다니요? 그게 어때서요? 내 처지에 귀족의 부인이 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에요.”
야엘은 지금 그렌이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정말 일이 잘 풀려야 귀족의 애첩인 미스트리스가 될까 말까였다.
그런데 귀족가의 영애도 아닌 자신이 무려 자작의 아내가 되게 생겼다.
이건 정실이건 아니건 간에 엄청난 신분 상승이었다.
비록 그녀가 그렌의 호위 기사라고는 하지만.
세상에 그 누가 그걸 알아주겠는가!
다들 그렌이 데리고 다니는 애첩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정식으로 귀족의 부인이 될 길이 열렸다.
앞으로 그렌의 아이를 낳게 되면!
자기 자식은 어엿한 귀족이 될 것이다.
야엘은 그런 생각을 하자 절로 몸이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었다.
“야엘! 왜 그래?”
“아, 아니에요. 너무 좋아서 그래요.”
“하하하! 그렇다면 다행이야. 오늘은 우리 그만 들어가 쉬자.”
“네, 좋아요.”
그렌은 야엘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에게 팔짱을 끼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울다가 웃는 야엘의 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섹시했다.
꿀꺽!
참 묘한 시점에 사람을 불끈거리게 만드는 여자였다.
그렌은 잠시 욕망을 누르고 그녀와 함께 영주관저로 들어갔다.
주변에서 누가 쳐다보든 말든 이제 야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을 써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이제 주변의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영주의 침실로 들어갔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리고 미약한 교성이 밤새도록 흘러나왔다.
참 생기발랄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