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83
283화
“이건 뭔가? 아주 특이하게 차를 우려내는군.”
“오! 녹차인가? 향기가 참 좋군.”
둘은 보성녹차 티백을 보더니 무척 신기해했다.
그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차만 홀짝거렸다.
몇 모금 녹차를 음미한 궁정 마법사 에펠이 은근히 물었다.
“그렌 영주! 아까 무슨 일인가? 비상종을 치는 것 같던데.”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아주 긴급한 사태가 터졌습니다.”
“긴급한 사태라니?”
에펠과 타워는 거의 동시에 반문했다.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렌은 굳이 뜸 들을 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혹시 울트라 웨이브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헉! 울트라 웨이브!”
“울트라 웨이브! 그게 정말인가?”
다행히 에펠과 타워는 모두 울트라 웨이브가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설명할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북해 너머에서 울트라 웨이브가 시작됐습니다.”
“그게 확실한가?”
“네, 확실합니다. 제가 엘리샤, 아니 불의 여왕과 와이번을 타고 북해를 넘어 한기의 토네이도까지 직접 보고 왔습니다.”
“이런 맙소사! 울트라 웨이브라니…….”
“정말 큰일 났군. 한기의 토네이도를 봤다면 십중팔구는 울트라 웨이브가 분명해.”
그렌은 두 사람의 반응에 고무됐다.
그래서 솔직히 마음을 털어놓았다.
“울트라 웨이브가 시작되면 이곳은 물론이고, 카시오페라 왕국이나 코티아르 왕국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두 분이 좀 나서서 얀, 버틀, 렌 영지를 좀 도와주세요.”
“어떻게 말인가? 군수품 지원을 바라는 건가?”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건가?”
“당연히 둘 다입니다. 당장 투입할 수 있는 기사나 마법사가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그렌의 말에 에펠과 타워는 동시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게 쉽지는 않을 거야.”
“울트라 웨이브가 일어난다는 것 자체를 믿어줄지도 의문이고.”
“카시오페라 왕국과 코티아르 왕국은 굳이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자들이라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지켜만 볼 가능성이 커.”
“주변 영지에서 도움을 요청해도 쉽게 허락할지 모르겠군.”
두 사람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렌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두 분의 지혜를 빌려주십시오.”
하지만 에펠과 타워, 그 어느 쪽도 속 시원한 답을 해주진 못했다.
“일단 울트라 웨이브가 시작될 거라는 보고서와 함께 지원 요청서를 써주게. 카시오페라 왕실에 직접 전해주겠네.”
“나도 코티아르 왕국에 선이 있으니 같은 걸 써주면 전해주지. 허나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알겠습니다. 당장은 지원은 없다는 가정하에 최선을 다해 울트라 웨이브를 막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렌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속은 벌써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에펠과 타워도 무안한지 그렌의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지그시 눈을 감은 두 사람에게 남모를 한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렌은 이들의 반응에 실망했지만, 굳이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오히려 밝게 웃으며 긍정적으로 나왔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이렇게 두 분이 도와주시니 큰 힘이 됐습니다.”
“미안하네.”
“이거 참 부끄럽게 됐구먼. 어쨌든 한번 잘해보게. 나도 가서 어찌 도와야 할지 한번 연구해 보겠네.”
그렌은 클리오 수석 행정관을 시켜 울트라 웨이브가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는 보고서와 지원 요청서를 작성하게 했다.
잠시 그렌과 대화를 나누던 둘은 클리오가 가져온 보고서와 지원 요청서를 각각 손에 쥐고 얀 영주성을 떠나갔다.
[해모수: 정말 이상하다. 왜 안 도와줄 거라 확신하는 거지? 다 같이 죽자는 건가?] [마루: 그동안 몬스터 웨이브를 잘 막아냈던 바이칼족이 건재하니 이번에도 잘 막아낼 수 있을 거라 믿는 모양이야.] [해모수: 그래도 좀 너무하네. 와서 같이 힘을 좀 보태주면 좀 좋아.] [그렌: 아냐. 차라리 잘됐어. 싸우기 싫은 놈들 억지로 불러봐야 나중에 손발이 안 맞아서 골치만 아파. 그보다는 어떻게 이 사태를 극복할지 우리 다 같이 연구 좀 해보자!] [마루: 네.] [해모수: 예, 좋아요.]그렌의 전향적인 자세에 마루와 해모수도 더는 같은 얘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본격적인 울트라 웨이브 대책을 논의했다.
[마루: 대책 논의에 앞서 울트라 웨이브를 통해 어떤 몬스터가 오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렌: 맞아. 그게 우선이지. 아무래도 그건 바이칼족 장로들에게 물어봐야겠다.] [마루: 바이칼족 장로들이라면 아마 울트라 웨이브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거예요.] [해모수: 사실 어떤 몬스터가 와도 특별히 상관없는 거 아닌가요? 벼락포를 개발했으니 그걸 쏘면 될 것 같은데.]벼락포는 마루의 도움으로 그렌이 만든 경야포다.
전폭 1.25미터, 전고 1미터, 포신장 1.40미터, 전비중량 600킬로그램.
최대 발사 속도 분당 10발, 최대사거리는 10,000미터나 된다.
[그렌: 좋은 지적이야. 나도 벼락포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사용하려고 했어.] [해모수: 그러고 보니 바이칼 영지에 렌 화약을 만들 재료가 다 있네요.] [마루: 맞다. 유황, 숯, 초석 대신 황 결정체인 얀, 버틀 나무 숯, 대량의 질산칼륨이 포함된 렌 결정체! 이 모든 게 얀, 버틀, 렌 영지 안에 다 있어요.] [해모수: 우와! 이렇게 되면 최소한 화약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처음으로 긍정적인 말이 나왔다.
그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머리를 팽팽 돌렸다.
[그렌: 확실히 이건 강점이군. 당장 얀, 버틀 나무 숯, 렌 결정체를 영지의 전략물자로 지정해서 외부 반출을 금해야겠군.] [마루: 좋은 생각이에요. 이걸로 카시오페라 왕국과 코티아르 왕국에 한 방 먹여줄 수 있겠네요. 물론 그들이 얼마나 아쉬워할지는 잘 모르지만.]말을 하던 마루의 목소리가 점차 늘어졌다.
[해모수: 에헴! 그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당장은 바이칼족을 동원해서 렌 화약의 재료를 더 모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렌: 그래야겠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꽤 많은 양이지만 울트라 웨이브가 시작되면 아마 하루도 버티지 못할 거야.]해모수의 제안에 그렌은 점차 의욕이 생겨났다.
[마루: 용병을 대량으로 고용하면 좋겠는데. 그건 어렵겠죠?] [해모수: 이미 힘들다고 판가름 난 얘기 아니었어요?] [그렌: 그래. 용병은 포기하자. 어차피 이곳으로 올 놈도 없을 거야. 차라리 엘리샤가 이끄는 바이칼족 전사들을 잘 활용하는 게 울트라 웨이브를 막는 데 더 도움이 될 거야.]바이칼(얀, 버틀, 렌) 영지에 대한 소문으로 인해 용병들은 이곳으로 잘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렌은 애초에 용병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대충 상황을 정리하고 영주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느새 다 모였는지 집무실 안, 한쪽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영주님!”
“영주님을 뵙습니다.”
그렌이 들어가자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기엔 엘리샤와 야엘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엘리샤는 바이칼족의 수호신이자 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이 있다.
그래서 굳이 그렌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앞으로 남편인 그렌이 바이칼족을 잘 다스리려면 어느 정도 권위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이 더 정중하게 그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다들 자리에 앉읍시다.”
“예, 영주님.”
“고맙습니다. 영주님.”
모든 이가 자리에 앉자 그렌은 왼쪽부터 한번 쭉 훑어봤다.
엘리샤를 비롯해 바이칼족의 열두 장로가 전부 모여있었다.
오른편에는 야엘과 마르코스 친위대장 그리고 클리오 수석 행정관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얀, 버틀, 렌 영지의 행정관들과 경비대장들이 차례로 앉아있었다.
가히 바이칼 영지의 핵심 인사들이 모두 참석한 중요한 자리였다.
“간단히 말하겠소. 불의 여왕과 같이 북해를 넘어가 본 결과! 조만간 울트라 웨이브가 일어날 것이 확실하오.”
“아!”
“이런!”
“이럴 수가!”
그렌의 말에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사실 이들 중 울트라 웨이브를 실제로 겪어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전설처럼 내려오는 울트라 웨이브의 참혹함에 누구 하나 밝은 표정을 짓는 이가 없었다.
“아무리 우리가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고 해도 어차피 울트라 웨이브가 오는 것을 막을 순 없소. 그렇다고 도망쳐 봐야 딱히 숨을 곳도 마땅치 않고. 그러니 차라리 튼튼한 성에 모두 모여 밀려오는 몬스터를 맞서 싸우는 게 나을 것이오.”
“혹시 울트라 웨이브를 상대할 어떤 복안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소. 몇 가지 생각해 둔 게 있소.”
자신감 넘치는 그렌의 말에 다들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게 무엇입니까?”
“벼락포와 렌 화약이오.”
좌중의 눈은 일제히 의문의 빛을 발했다.
오직 바이칼족 대장로만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영주께서 전에 얀 영주성 북쪽 해안을 향해 마법포를 쏘신 적이 있는데. 혹시 그 마법포가 벼락포 아닙니까?”
“맞소. 그 마법포가 바로 벼락포요.”
“아!”
대장로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면서 감탄했다.
그의 이런 행동에 자리한 모든 이가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법포라고?”
“마법포면 엄청난 거 아니야?”
“뭔가 강력한 무기 같은데.”
“진짜 마법포라면 싸울 만하겠다.”
사실 그렌이 벼락포를 테스트할 당시, 주변에 바이칼족 전사들이 좀 있었다.
그래서 벼락포에 대한 얘기는 곧바로 대장로에게 보고됐다.
덕분에 대장로는 마법포의 위력을 대충이나마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벼락포를 본 적이 없는 이들은 달랐다.
‘마법포’라는 단어 하나에 꽂혀 무작정 희망에 부풀어 댔다.
대장로가 그렌을 향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영주님! 그런데 마법포, 아니 벼락포는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숫자가 많진 않소. 현재 보유한 벼락포의 숫자는 정확히 24문이오.”
“으음.”
수량이 참 애매했다.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사실 이보다 조금 더 많이 만들었지만.
해모수의 해동함대를 위해 매일 벼락포 한 대는 반드시 공용 인벤토리를 통해 보내줘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절대로 포기하거나 멈출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많은 벼락포를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영주님, 방금 렌 화약을 언급하셨는데. 혹시 벼락포를 쓰려면 렌 화약이 필요한 겁니까?”
이번에는 클리오 수석 행정관의 질문이 있었다.
그도 렌 화약이 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소. 다행히 렌 화약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얀, 버틀, 렌은 모두 바이칼 영지에서 많이 나오는 거라 원료 조달에는 딱히 문제가 없소.”
“재료를 얼마나 모아야 하죠?”
“많으면 많을수록 좋소.”
그렌의 대답에 불의 여왕 엘리샤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장로들을 쳐다봤다.
“다들 들었지? 회의 끝나면 당장 부족을 동원해서 얀, 버틀, 렌을 싹 쓸어와!”
“네, 여왕님.”
“예, 알겠습니다.”
엘리샤에 명령에 바이칼족 열두 장로는 꼼짝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바이칼족의 수호신답게 카리스마가 쩌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렌을 쳐다보는 순간!
살벌한 모습은 사라지고 봄바람에 꽃잎 날리듯 하늘하늘한 표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백치미에 장난기를 살짝 버무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불의 여왕의 협조에 감사드리오.”
“천만에요.”
둘은 서로를 향해 아주 정중히 말했다.
그렇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당장 불이라도 붙을 것처럼 뜨겁기만 했다.
“벼락포를 쓰기 위해선 포탄도 많이 필요하오. 포탄을 만드는 일은 바이칼족의 대장간과 영주성 직영지 대장간 가릴 것 없이 대장장이를 모두 동원하고 전력을 다해 서로 도와야 할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불의 여왕 엘리샤의 도움으로 이제 그렌은 바이칼 영지의 진정한 영주가 됐다.
바이칼족, 영주성 직영 마을 주민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렌을 명실상부한 이 땅의 주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회의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그의 말을 순순히 잘 들었다.
“불의 여왕은 울트라 웨이브가 언제 시작될 것 같소?”
“울트라 웨이브는 한기의 토네이도가 북해를 건너와 얀 영주성 북쪽 앞바다를 얼린 이후에 시작될 것입니다.”
“그럼 질문을 바꾸겠소. 한기의 토네이도가 언제쯤 얀 영주성 북쪽 앞바다까지 올 것 같소?”
“빠르면 1주, 늦어도 2주면 북쪽 바다는 꽁꽁 얼어붙을 겁니다.”
엘리샤의 장담에 다들 입을 쩍 벌렸다.
그렇게 빨리 바다가 얼어붙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북해가 얼면 시작되는 게 몬스터 웨이브다.
그러니 바다가 얼면 곧 울트라 웨이브가 시작된다고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