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84
284화
“그럼 일주일 뒤 울트라 웨이브가 시작된다고 가정하고 움직입시다.”
“네, 영주님.”
그렌의 결정에 다들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바이칼족은 일주일 내에 모두 얀 영주성, 버틀 영주성, 렌 영주성으로 모이세요.”
“네에?”
“바이칼 영지의 영주성 세 곳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전부 소개할 것을 명합니다.”
“아아!”
이어지는 그렌의 선언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보다 영주의 조치가 너무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바이칼 영지의 모든 사람은 영주성에 들어와 울트라 웨이브를 대비해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습니다.”
“그래 봐야 일주일 정도일 텐데.”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오합지졸이라도 좋다.
단 하루라도 기초 군사훈련을 받는 게 안 받는 것보다는 낫다.
“각 영주성은 바이칼족의 도움을 받아 최소 세 달은 버틸 수 있는 식량을 비축하세요. 당연히 무기와 갑옷은 물론 화살과 볼트 등 군수물자도 비축해야 합니다.”
“전 바이칼족이 적극적으로 도울 것입니다.”
그렌을 향해 엘리샤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는 고마움의 뜻으로 그녀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명령은 계속 이어졌다.
“영주성이 꽤 넓긴 하지만 백만이 넘는 바이칼족이 들어오면 자리가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아예 외성을 바이칼족에게 넘기고 그것도 부족하다면 외성 성벽 일부를 확대해 거처를 마련하세요.”
“알겠습니다. 새로 성을 쌓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외성을 확장하겠습니다.”
영주의 뜻을 이해한 클리오 수석 행정관이 의욕을 불태웠다.
외성을 확대한다는 의미는 다양했다.
거주 공간을 늘리는 점도 좋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울트라 웨이브가 끝나면 확보할 수 있는 외성 공간의 확대였다.
그렌은 대충 클리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굳이 그걸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건 어차피 바이칼족이나 그렌에게 서로 좋은 일이었으니까!
“울트라 웨이브가 시작되면 현재 보유한 군수품만으론 많이 부족할 겁니다.”
대장로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그렌은 거기에 대고 오히려 질문했다.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소?”
“카시오페라 왕국에서 바이칼족에게 지원 물자를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그러니 더 지원해 달라고 하기보단 차라리 내년에 받을 지원 물자를 미리 좀 앞당겨서 받겠다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거참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다들 대장로의 말에 감탄했다.
조삼모사라는 말처럼, 어차피 내년에 받게 될 걸 미리 좀 당겨 받는다고 해서 카시오페라 왕실이 크게 손해 보는 것은 아니었다.
울트라 웨이브 얘기를 꺼내 봐야 당장은 씨알도 먹힐 것 같지 않고.
욕심 많고 이기적인 귀족들의 반대도 쉽게 무마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이유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건 당장 카시오페라 왕실과 의논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렌의 말에 이어 불의 여왕 엘리샤가 바로 동의했다.
사실상 이걸로 의견 일치를 본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지금까지 합의된 사안을 클리오가 정리해서 바이칼 영지 전체에 나와 불의 여왕의 이름으로 공표하시오.”
“네, 영주님.”
클리오 수석 행정관이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불의 여왕께선 지금 결정된 사안을 차질 없이 이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알았어요. 반드시 결정한 그대로 이뤄지도록 할게요.”
이번에는 불의 여왕이 일어나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회의는 이것으로 마칩시다. 모두 각자 맡은 일을 서둘러 주세요.”
“네, 영주님.”
“예, 영주님.”
그렌의 폐회 선언에 다들 일제히 일어나 영주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차례 좌중을 훑어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어휴! 일복이 터졌네.’
지하의 공방으로 내려가며 그렌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바쁘겠지만 영주이자 고위 마법사인 그가 해야 할 일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어깨를 무겁게 누른 보이지 않는 중압감에 휩싸인 뒷모습.
오늘따라 무척 힘들어 보였는지 야엘이 빠르게 따라가 살짝 감싸주었다.
* * *
휘이이잉!
쩡, 쩌억, 쩌엉!
차가운 한기의 바람이 수면 위를 질주했다.
바다는 삽시간에 꽁꽁 얼어붙었다.
시시각각 남하하는 극한의 한기!
어느새 토러스 대륙의 북쪽 끝, 해안가 절벽을 향해 밀려들었다.
“불을 붙여라!”
휙, 휘익, 휘이익!
절벽 위 높은 성벽에서 아래로 수십, 수백 개의 횃불이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펑! 퍼펑!
화륵, 화르륵, 화르르륵!
동시다발적으로 폭음이 터졌다.
해안 절벽 아래론 커다란 불길이 마구 치솟아 올랐다.
거대한 화염은 불의 띠를 이루며 빠르게 좌우로 퍼져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한기의 침습을 막는 불의 방벽처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극한의 한기는 화염의 장벽에 가로막혀 더는 남하하지 못했다.
와아아아!
이걸 목격한 성벽 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트렸다.
그렌도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렌: 어휴! 다행이다.] [해모수: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마루: 그러게 말이야. 너희들의 말을 듣고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바이칼 영지가 전부 꽁꽁 얼어붙을 뻔했어.]해모수와 마루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했다.
만약 극한의 한기가 계속 남하했더라면!
아마 얀 영주성에 들어온 사십만의 바이칼족과 인근 마을 주민들은 전부 얼어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런 사태를 미리 예상한 해모수와 마루 덕택에 그렌은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고… 결국 큰 위기를 사고 없이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공은 그렌 영주에게 돌아갔다.
바이칼족과 영지의 주민들은 탁월한 영주의 선견지명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우와! 놀랍다.”
“혹시 미래를 알고 계셨던 게 아닐까?”
“역시 그렌 영주님은 탁월하셔!”
“고위 마법사라서 그런지 확실히 다르시네.”
“이제 영주님 말씀대로만 한다면 울트라 웨이브도 잘 넘길 수 있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우리 영주님이 최고야.”
“울트라 웨이브도 문제없이 잘 해결될 거야.”
“그렌 영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이 보낸 천사가 분명해!”
“한 손으로 불길을 쏘시니까 한기의 토네이도가 싹 사라져 버렸어.”
사람들은 너도나도 영주를 찬양했다.
덕분에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렌을 찬양하다 못해 신격화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
다행히 그 방향이 나쁜 쪽은 아니었다.
“불길이 약해진다. 기름을 더 부어라!”
“기름을 더 부어라!”
촤아아악!
펑, 퍼펑, 화르륵, 화르르륵!
북쪽 해안가 절벽 아래로 계속 기름이 쏟아졌다.
그로 인해 약해지던 불길이 다시 거세게 타올랐다.
극한의 한기의 기세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수그러든 것은 아니었다.
키에에에엑!
그때 하늘에서 커다란 와이번이 포효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불의 여왕이 레닌을 타고 얀 영주성을 선회하고 있었다.
치익, 칙!
그렌은 허리에 걸어둔 워키토키를 꺼냈다.
“엘리샤 나와라. 오버!”
―엘리샤 나왔다 오버!
“상황을 보고해라. 오버!”
―한기의 토네이도의 기세가 꺾였다. 오버!
마루가 보내준 생활 무전기 한 쌍!
둘은 이렇게 요긴하게 잘 써먹고 있었다.
“울트라 웨이브의 조짐이 보이는가 오버!”
―북해 너머로 몬스터들의 준동이 시작됐다. 오버!
“여기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오버!”
―빠르면 반나절, 늦어도 하루면 도착할 것으로 보인다. 오버!
“알았다. 수고했다. 오버!”
―한 바퀴 더 둘러보고 내려가겠다. 오버!
“그렇게 해라! 오버!”
그렌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불의 여왕 엘리샤가 한 손을 흔들며 워키토키를 입으로 가져갔다.
―사랑한다. 오버!
돌발적인 엘리샤의 사랑 고백이 터졌다.
“크흠, 나, 나도 그렇다. 오버!”
그렌은 눈을 질끈 감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순간 사방에서 억지로 웃음을 참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크크크!”
“키키키!”
“큭큭큭!”
대번에 얼굴이 벌겋게 변한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야엘이 다가와 그의 등을 살며시 토닥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도 참을 수 없는 웃음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전투준비해라!”
“예이, 영주님.”
“눼에, 영주님.”
그렌은 괜히 전투 준비를 하라고 다그쳤다.
다들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지 잘 아는 터라, 성벽 위의 병사들과 바이칼 전사들은 급히 몸을 움직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놓고 파안대소를 터트린 자들도 있었다.
[해모수: 푸하하하!] [마루: 하하하.]바로 해모수와 마루였다.
[그렌: 재밌냐?] [해모수: 우와! 역시 큰형수님은 대단하시네요.] [마루: 워키토키로 말하면 그렌 형만 들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신 건가?] [해모수: 일부러 다 들으라고 한 거 아니었어?] [마루: 설마 그럴 리가!] [그렌: 아오! 내가 미치겠다.]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렌!
하지만 속마음은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해모수: 창피할 게 뭐 있어요? 엄연히 부부 사인데.] [마루: 그래도 이런 사랑 고백은 둘만 있을 때 하는 거야.] [해모수: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마루: 내 말은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야. 맞죠? 그렌 형!] [그렌: 야! 너희 둘이 제일 나빠. 이게 위로하는 거냐? 더 약 올리는 거지.]해모수와 마루의 대화에 그렌이 펄쩍 뛰었다.
[마루: 하하하!] [해모수: 푸하하하!]결국, 해모수와 마루는 다시 한번 빵 터지고 말았다.
그렌은 해모수와 마루의 웃음에 그만 멘탈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울트라 웨이브를 대비한 최종 점검을 시작했다.
[그렌: 벼락포의 숫자는 충분하겠지?] [마루: 얀 영주성 북쪽 해안 성벽에 깔린 벼락포가 200문이었죠?] [그렌: 응.] [해모수: 버틀 영주성과 렌 영주성에도 벼락포 50문씩을 보냈잖아요.] [그렌: 그렇지.] [마루: 일단 그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문제는 포탄과 렌 화약이죠.] [해모수: 일주일 동안 그렇게 많이 만들었는데도 모자라요?]해모수의 물음에 마루는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루: 네 생각엔 많아 보여도 막상 벼락포 200문으로 일제사격을 하면 포탄과 렌 화약은 금방 동이 날 거야.] [그렌: 나도 포탄과 렌 화약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래서 지금도 공방에서 포탄과 렌 화약을 계속 만들고 있어.]그렌의 말에 해모수가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해모수: 아! 각 영주성 공방에서 말이죠?] [그렌: 맞아.] [해모수: 그런데 포탄과 렌 화약 양산은 누가 관리하고 있어요?] [마루: 그야 당연히 하케보 마법사와 모노테 마법사지. 맞죠?] [그렌: 응, 맞아. 놈들도 이제 밥값은 하고 있어.]하케보와 모노테는 원래 부르나 왕국에서 도망친 현상 수배범이다.
코티아르 해적들과 렌 영지를 털려다가 그렌에게 잡혀 노예 마법사가 됐다.
살인, 강도, 강간, 약탈, 납치, 인신매매, 인체 실험 등 온갖 중범죄를 저지른 놈들의 목을 치는 대신, 노예 인장을 찍고 마법 계약서를 비롯한 각종 금제를 걸었다.
지금은 울트라 웨이브를 막기 위해 매일 코피를 쏟으며 포탄과 렌 화약을 끝도 없이 만들어 대고 있었다.
[마루: 식량은 충분하죠?] [그렌: 3개월 정도 버틸 양은 확보했어.] [해모수: 바이칼족이 가져온 마른 어포 비축분만으로도 일 년은 버티겠던데.]해모수의 말에 마루는 고개를 저었다.
[마루: 매일 어포만 먹고 어떻게 살아? 밥도 먹고 빵도 먹어야지.] [해모수: 그럼 수프도 끓이고 고기도 구워 먹어야죠.] [그렌: 그렇게 하면 좋지. 하지만 전부 그렇게 풍족하게 먹긴 힘들어.] [마루: 생존만 생각하면 어포만 먹고 살 수 있겠죠. 하지만 몬스터와 전투할 생각을 하면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먹여야 해요.]마루의 말도 맞고 해모수의 말도 맞았다.
문제는 얀, 버틀, 렌 영주성에 들어온 바이칼족의 숫자가 워낙 많다는 것이다.
도저히 풍족하게 식량을 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영주성 인근 직영지나 마을 주민들만 잘 먹이는 것도 곤란했다.
[그렌: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고기 좀 사놓으라고 할걸.] [마루: 인제 와서 그런 생각 해봐야 너무 늦었어요.] [해모수: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그렌 형이 조금만 고생하면 돼요.]해모수는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말했다.
마루가 해모수를 보더니 뭔가 뇌리를 스치는 게 있는지 빠른 어조로 물었다.
[마루: 설마 아공간 반지와 마법 주머니를 가지고 그렌 형이 에티오에 텔레포트로 왔다 갔다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해모수: 왜요? 안 되나요?]아니나 다를까!
역시 해모수는 텔레포트 마법을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