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292
292화
달그락달그락!
성벽 일대는 주발(놋쇠로 만든 밥그릇) 긁는 소리로 가득했다.
다들 입맛을 다시며 취사병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이미 커다란 솥은 텅 비워진 상태였다.
어포에다 포티와 스위티를 쑹덩쑹덩 잘라 넣고 푹 끓인 수프!
맛은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양은 좀 모자랐던 모양이다.
저녁은 좀 넉넉히 준비하라고 당부해 둬야 할 것 같다.
“그렌 영주!”
그의 상념은 에펠의 부름으로 끊기고 말았다.
창가에서 고개를 돌린 그렌은 가만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끼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같은 수프를 벌써 사흘 동안 계속 먹었다.
배는 좀 고팠지만, 입맛이 뚝 떨어졌다.
“입맛이 없는 모양이오?”
“그런 것 같습니다.”
“이거라도 같이 듭시다.”
에펠은 사람 좋은 얼굴로 테이블 위의 요리를 가리켰다.
통돼지 바비큐, 클램차우더 수프, 각종 해물 요리, 부드러운 빵과 과일 등,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한가득했다.
이게 모두 수도에서 날아온 에티오 왕실 주방장의 솜씨였다.
물론 바이칼 전사나 영지병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귀족과 마법사들을 위한 왕실의 배려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많이 드세요.”
“허허, 참 고집도.”
에펠은 그렌을 향해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타워가 끼어들었다.
“난 그렌 영주의 결정에 경의를 표하네.”
“타워 대마법사님, 저렇게 사서 고생하는 게 안쓰럽지도 않습니까?”
“부하들과 같은 걸 먹고 마시겠다는 건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되는 일일세.”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귀족의 품위 유지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요.”
에펠과 타워는 그렌을 주제로 한동안 격론을 벌였다.
당사자인 그렌의 존재는 이미 두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슬쩍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수도의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에펠과 타워가 그렌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좋은 마법사들이라서 그런지 둘은 그렌이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는 의도를 바로 간파했다.
“에티오는 무사하네.”
“왕궁엔 왕실 기사단도 있고 근위대와 친위대를 비롯해 국왕의 정예병이 지키고 있으니 별일 없을 걸세.”
“다행이군요.”
에펠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에 힘을 줬다.
“사실 수도가 문제는 아니지요.”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카시오페라 왕국과 코티아르 왕국의 북부 영지들이지.”
타워가 에펠의 말을 이었다.
“에티오의 북쪽에 있는 발다 영지는 이미 초토화됐다고 하더군.”
“어디 거기뿐입니까! 에티오를 기준으로 서쪽의 욘 영지와 동쪽의 베른 영지도 큰 피해를 보았답니다.”
“코티아르 왕국의 북부 세 영지도 울트라 웨이브로 이미 다 쓸려갔다고 하더군.”
에펠과 타워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그렌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사사건건 미운 짓만 골라 하던 원수 같은 발다 영지!
울트라 웨이브로 인해 완전히 망해버렸으니 속이 다 후련했다.
하지만 죄 없는 발다 영지의 주민들을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통쾌한 일은 또 있었다.
해적들의 소굴로 악명이 자자한 코티아르 왕국의 북부 세 영지인 맥커리, 카이스, 오토 영지가 울트라 웨이브로 인해 회생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보포틀해 해적들을 은근히 부추겨 카시오페라 왕국의 북부 영지를 약탈하게 만든 놈들이 끝내 천벌을 받은 것이다.
“한기의 토네이도가 설마 거기까지 세력을 떨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발다 영지는 몬스터들이 얀, 버틀, 렌 영지의 해안가를 따라 내려갔지만 코티아르 왕국의 북부 세 영지는 얼어붙은 보포틀해를 타고 울트라 웨이브가 곧바로 내려갔네.”
“그래서 피해도 훨씬 더 컸구요.”
“코티아르 왕국은 울트라 웨이브를 막는 것보다 피해 규모를 감추려고 혈안이지. 하지만 프릴 마탑의 지부가 존재하는 이상, 애초에 속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그렌은 전적으로 타워 대마법사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가 지원해 달라고 했을 때 지원해 줬다면 피해를 좀 줄일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자업자득이지.”
타워 대마법사는 코티아르 왕국의 피해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프릴 마탑이 토러스 대륙을 아우르는 전국구 마탑이라지만, 엄연히 그 뿌리는 카시오페라 왕국의 이튼 영지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혜택과 차별이 은근히 존재했다.
“혹시 바이칼 영지로 지원을 보낸다는 소식은 없습니까?”
“안타깝게도 카시오페라 왕국이나 코티아르 왕국이나 바이칼 영지를 지원할 여력이 없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타워 대마법사의 말에 그렌은 크게 실망했다.
[해모수: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마루: 애초에 바이칼 영지 방어에 초점을 둔 작전이 현명한 결정이었어.] [그렌: 울트라 웨이브가 일어나면 좀 더 지원해 줄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 밖이야.] [해모수: 원래 귀족들은 이기적이잖아요.] [마루: 차라리 잘됐어요. 카시오페라 왕국과 코티아르 왕국이 어떻게 되든 상관 말고 형은 계속 바이칼 영지 방어에만 총력을 기울이세요.] [그렌: 그래야지.]해모수와 마루는 귀족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줄 예상했다.
그래서 얀 영주성 북쪽 해안가 절벽을 중심으로 세워진 성벽 방어에만 전력을 기울이라고 조언했다.
솔직히 그렌이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북부 성벽을 기준으로, 좌우로 흐르는 몬스터 웨이브를 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버틀 영주성이나 렌 영주성에 가서 한 손 거드는 게 더 낫다.
에티오의 카시오페라 왕궁이라면 모를까, 전혀 도움을 준 적도 없는 남의 나라와 남의 영지를 위해 쓸데없이 기운을 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렌 영주는 울트라 웨이브가 앞으로 얼마나 더 갈 것 같은가?”
에펠 궁정 마법사가 그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양쪽 어깨를 살짝 들고 두 손을 옆으로 펴면서 말했다.
“저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바이칼족 장로들의 얘기로는 보통 한 달에서 많게는 석 달까지 간다고 합니다.”
“석 달이나!”
“석 달 동안!”
에펠과 타워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울트라 웨이브가 설마 그렇게까지 길게 늘어질 줄은 몰랐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군.”
“난 최대 한 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계획을 다시 짜야겠어.”
에펠과 타워는 그제야 울트라 웨이브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잘못하면 카시오페라 왕국과 코티아르 왕국이 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토러스 대륙의 인류가 멸망할지도 몰랐다.
물론 이건 최악의 경우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큰 피해 없이 울트라 웨이브를 막아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와아아아!
그때 성벽에서 커다란 함성이 일어났다.
에펠과 타워가 한숨을 내쉬며 나이프와 포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렌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시작한 모양이군요.”
“밥 먹을 때는 좀 놔두지.”
“어서 가보세.”
에펠과 타워는 그렌의 뒤를 따라 북쪽 성벽으로 갔다.
그들의 뒤를 오십 명의 마법사가 부지런히 따라갔다.
키헤에에에에!
불의 여왕 엘리샤를 태운 레닌이 길게 포효를 터트렸다.
그렌이 성벽 위로 올라가 북해를 바라보자, 아울베어 떼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에펠 궁정 마법사님! 타워 대마법사님! 뒤를 부탁합니다.”
“알았네.”
“걱정하지 말게!”
그렌의 당부에 에펠과 타워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울트라 웨이브가 시작한 지도 어느새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마나가 바닥이 날 때까지 마법을 펼친 게 몇 번인지 몰랐다.
처음엔 버벅거리던 마법사들도 실전을 겪고 나자 이젠 제법 전투 마법사 같은 분위기를 솔솔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렌은 만족한 눈빛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바이칼족의 대전사 포스탄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포스탄 대전사!”
“네, 영주님.”
“전투를 부탁한다.”
“영주님도 조심하십시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내의 눈에는 신뢰가 담겨있었다.
그렌과 포스탄은 사흘 만에 피를 나눈 전우가 된 것이다.
그렌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마법의 시동어를 속삭였다.
“블링크!”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성벽 상공에 나타난 그렌은 플라이 마법으로 하늘을 날았다.
휘익!
어느새 그의 뒤를 잡은 와이번!
레닌은 속도를 확 줄이더니 그렌의 아래로 내려가 날개를 쫙 펴고 활공했다.
“그렌!”
“엘리샤!”
엘라샤가 손을 뻗자 그도 손을 쭉 뻗었다.
두 개의 손이 곧바로 하나가 됐다.
그렌은 플라이 마법을 캔슬하고 레닌의 몸 위에 내려섰다.
그는 엘리샤의 뒷좌석에 앉아 재빨리 안전벨트를 맸다.
“그렌!”
기다렸다는 듯이 엘라샤가 몸을 뒤로 눕혔다.
커다란 그녀의 가슴이 크게 출렁이며 그렌의 눈을 유혹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쪽!
둘은 거꾸로 서로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몸을 세웠다.
“밥은 먹었어?”
“응, 먹었어.”
엘리샤는 대답하면서도 그의 한 손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의 볼을 손등에 대고 마구 비비며 좋아했다.
누가 보면 자신의 손이 사람 손이 아니라 무슨 곰 인형의 손이라고 오해를 할 법한 모습이었다.
그렌은 그녀의 어린아이와도 같은 행동에 그만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정찰은 했지?”
“물론이지. 아울베어 웨이브 다음은 라미아 웨이브, 그다음은 미노타우로스 웨이브야.”
“제길, 산 넘어 산이네.”
그는 엘리샤의 뒤에서 대놓고 투덜거렸다.
아울베어는 곰의 몸에 부엉이 얼굴을 한 몬스터다.
힘도 세고 체력이 좋아서 전투력이 꽤 높았다.
고블린이나 오크를 주식으로 삼는 잡식성 몬스터라 난전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라미아는 상반신은 여자, 하반신은 뱀의 형상을 띤 비스트 몬스터다.
치명적인 독에다 미혹의 페로몬을 내뿜는 몬스터!
반드시 원거리에서 타격해야지, 난전으로 치달으면 끔찍한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다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몸을 하고 얼굴과 꼬리는 황소의 모습을 한 중대형 몬스터다.
힘은 오우거에 맞먹고 후퇴를 모르는 용맹으로 돌파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울베어는 보내고 우리는 라미아와 미노타우로스를 잡자.”
“좋아.”
엘리샤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손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렌은 그녀가 라미아와 미노타우로스를 잡자는 게 좋다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손등이 좋다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차가운 바람에 세차게 휘날렸다.
“실드!”
실드 마법을 펼치자 투명한 구체의 방어벽이 생겨났다.
“오오! 좋네.”
엘리샤는 실드 마법이 마음에 드는지 이제는 그의 손등을 핥기까지 했다.
그 황당한 모습에 그렌은 혹시 그녀가 전생에 강아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닌!”
키에에에엑!
펄럭펄럭!
엘리샤가 레닌의 이름을 부르자 레닌이 포효를 터트리며 날개를 펄럭였다.
가속도가 붙자 와이번의 동체는 마치 전투기가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쐐애액!
그들은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북해를 가로질러 북으로 향했다.
엘리샤가 손으로 몇 번 두드리자 레닌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크게 왼쪽으로 선회했다.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북해로부터 밀려오는 거대한 몬스터의 물결이 한눈에 들어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몬스터 떼의 남하!
이건 그저 보기만 해도 질려버리는, 아주 끔찍한 광경이었다.
[해모수: 우와! 징그럽게 많다.] [마루: 도대체 저렇게 많은 몬스터가 다 어디서 오는 거지?] [그렌: 어휴! 죽여도 죽여도 끝이 나질 않겠구나.]이 거대한 몬스터의 물결에 그렌은 절로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동시에 혼돈 마법을 펼쳐 카오스 볼을 강하게 회전시켰다.
온몸으로 카오스 마력이 짜릿하게 퍼져나갔다.
전신이 시원해지더니 머리도 차가워지고 한결 맑아졌다.
냉정을 회복하자 그렌은 곧바로 아공간 반지를 열었다.
[그렌: 대형 소이탄 세 개면 충분하겠지?] [해모수: 너무 많지 않아요?] [마루: 아니야. 거리상 네 개는 터트려야 해!]세 개는 적고 네 개는 좀 많아 보였다.
그렌은 일단 마루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성벽으로부터 충분한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마법사들이 볼 염려도 없고, 대형 소이탄을 쓰는 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
만들기도 쉽고 위력도 강력한 대형 소이탄!
이미 재고는 충분했다.
아니 지금, 이 시각에도 영주성 지하 공방에선 포탄과 함께 대형 소이탄을 무식하게 대량생산하고 있었다.
그렌은 대형 소이탄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기로 했다.
이거야말로 얀 영주성의 바이칼족과 영주 직영지의 주민들을 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