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이대근은 과거 사채를 쓴 일이 있어 대부업체와 사채업자라면 이를 갈았다.
잘하면 그동안 벙어리 냉가슴처럼 쌓였던 억울한 원한을 단번에 풀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영희는 이대근과 마루가 하는 얘기를 듣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 정말 듣자 듣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네요. 사채 썼다가 나중에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뭘 어떻게 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그게 제일 좋은 거지. 내가 책임질 테니까 당신은 좀 잠자코 있어.”
“정말 마루하고 같이 이렇게 대형 사고 칠 거예요?”
“대형 사고는 무슨! 다 같이 살아보자고 머리 쓰고 있는 거잖아.”
김영희는 남편이 이미 둘째 아들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걸 깨달았다.
한숨과 침음이 절로 나왔다.
인류의 종말이라는 말에 점차 불안한 마음은 커져가고…….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하긴 당장 자신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생존에 초점을 맞춰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얘기를 했지만 적극적인 생존 전략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저 가만히 집에서 숨어 지낸다고 좀비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때론 좀비들과 싸워야 하고, 때론 선제적 타격으로 놈들의 개체 수를 줄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도 좀비들과 전투를 벌일 수 무기와 방어구를 갖춰야 합니다.”
“무기라면 총을 말하는 거냐?”
이대근도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에 당연히 무기라면 먼저 총을 떠올렸다.
그것도 권총이 아닌 소총을 말이다.
“네, 총도 포함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하지만 총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요. 바로 총소리가 좀비를 불러들인다는 거죠. 그러니 총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소음기를 구해서 같이 사용해야 할 거예요.”
“우리가 군인도 아닌데 무슨 수로 소음기가 달린 총을 구하겠어? 그냥 냉병기 위주로 구해야지.”
“사실은 그게 정답입니다. 그래서 전 이미 제가 쓸 도검과 활 등을 인터넷으로 주문해 놓았습니다.”
“너 정말 진심이었구나.”
마루의 말에 김영희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기까지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다니…….
이 정도면 이미 장난이 아닌 게 확실했다.
“당연히 진심이죠. 어머니! 우리 가족의 생사가 달렸는데 제가 허투루 일하겠어요?”
“끄응.”
이대근은 신음성을 흘리며 가늘게 몸을 떠는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면서 눈은 마루를 향해있었다.
“좀비를 상대하려면 좀비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머리를 박살 내야 하는 거냐?”
“네. 아마도 목을 자르든가 뇌를 파괴해야 할 겁니다.”
“그럼 남자들은 창을 잡고 여자들은 쇠뇌를 쓰면 되겠네.”
“아무래도 그게 좋겠죠? 혹시 어디 아는 공업사 없으세요?”
“내 친구가 안양에서 크게 공업사를 하고 있으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라. 최소한 바가지는 쓰지 않을 거야.”
“그럼 저 좀 소개시켜 주세요. 제가 따로 주문할 물건이 있거든요.”
“알겠다. 그렇게 하마.”
아버지의 인맥 덕분에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잘됐네요. 쇠파이프에 창촉을 연결해서 쓸 수 있게 만들면 간단히 창을 대량생산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쇠뇌도 만들 수 있을까요?”
“그 친구가 무기 마니아라서 아마 이미 몰래 만들어 놓은 것도 꽤 있을 거야.”
“그럼 가벼운 방어구와 튼튼한 방패도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네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일단 목록을 만들어 봐. 난 내일이라도 당장 안양에 내려가서 공업사를 하는 광수를 만나볼게.”
“예, 아버지.”
이대근과 마루는 단번에 의기투합하며 눈빛을 빛냈다.
둘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김영희는 결국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아예 말릴 생각을 포기하고 말았다.
마루는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부모님이 이렇게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파이럿 혜성이 지구에 떨어지고 그의 말이 사실로 증명될 때까지…….
아마 홀로 외롭고 힘든 싸움을 준비해야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매일 꿈에 나타나 경고를 했다는 거짓말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대형 참사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을 슬기롭게 잘 극복한 것 같아 스스로 대견하다 자평할 수 있었다.
옥탑방으로 올라온 마루!
그는 쉬지 않았다.
밤이 새도록 마이티 포스 연공법을 수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제 부모님까지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무력을 확실히 키워놓아야 가족의 안위를 돌볼 수 있다.
그래서 이전보다 마이티 포스 연공법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더욱 진지해졌다.
물론 아직 포스를 일으키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마이티 포스 연공법을 익히면 익힐수록 신체가 강화되고 체력이 오르고 몸이 두드러지게 가벼워졌다.
마루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마이티 포스 연공법을 아침저녁으로 꾸준히 수련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됐다.
아침이 되자 이대근은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안양에서 공업사를 한다는 친구, 차광수를 만나러 간 것이다.
남동생 재용과 막내 여동생 윤아는 아침밥을 먹고 친구를 만난다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는 오늘도 체육관으로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슈퍼는 이제 온전히 김영희 여사의 몫이 됐다.
살짝 입술이 튀어나온 것을 보자 마루는 어머니를 뒤에서 꼭 안아줬다.
싫다고 징그럽다고 앙탈을 부리셨지만 마루의 애교만으로 이미 김영희 여사의 마음은 대부분 풀어져 있었다.
집을 나서 과천 종합 격투기 체육관에 도착했다.
마루는 어제처럼 오늘도 열심히 운동에 집중했다.
권투, 특공 무술, 검도를 각각 한 시간씩, 총 세 시간에 걸쳐서 수련하고 나왔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아쉽게도 김민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괜히 마음이 허전하고 섭섭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비단 마루만이 아니었다.
체육관에 나오는 모든 남정네들이 거의 동일하게 품고 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김영희 여사와 함께 골뱅이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당신이 하시겠다고 우기시는 설거지를 얼른 나서서 먼저 해치워 버렸다.
슈퍼로 나와서 일을 하는데 멀리서 중년의 사내 두 명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점심은 먹었냐?”
“네, 전 먹었습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응, 우린 밖에서 먹고 오는 길이다. 인사해라! 내 친구다.”
곰처럼 덩치가 크고 단단해 보이는 사내!
마루는 아버지 옆에 선 남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둘째 아들, 이마루입니다.”
“안녕하신가? 나 차광수네. 자네 아버지 불알친구지.”
“예, 반갑습니다. 안양에서 공업사를 크게 하신다는 분이죠?”
“어? 알고 있었네!”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대근이가 자네에게 내 얘기를 했다고? 하아! 그거참,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일세. 무하하하!”
차광수의 태도는 시원시원했다.
선이 굵고 직선적이면서 뭘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성격이 눈앞에 선명히 드러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일단 안채로 들어갔다 나오자.”
“그래. 제수씨에게 인사부터 해야지.”
“제수씨는 개뿔! 형수님이라고 불러라!”
“무슨 소리야? 엄연히 내가 형인데.”
“어디서 그놈의 고무줄 나이로 사기를 치려고 들어? 내가 동사무소 가서 네놈의 호적까지 다 떼어보고 확인한 지가 언젠데.”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호적에 늦게 올려서 그렇게 된 거라고.”
“까불지 말고 들어가서 형수님! 하고 깍듯이 모셔라.”
이대근과 차광수는 아옹다옹 다투며 안채로 들어갔다.
그들의 격의 없는 모습에 마루는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30분이나 지났을까?
이대근과 차광수가 슈퍼로 나왔다.
“오늘은 안 바쁜 날이니까 그냥 여기 셋이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자.”
“낮부터 술은 좀 그렇고 시원한 사이다라도 한 병 내오너라.”
“알겠다. 마루야, 사이다 세 병만 가져와라.”
“네.”
마루는 이대근의 말에 시원한 사이다 세 병을 따왔다.
“그리 앉아라.”
“네.”
이대근과 차광수 그리고 마루는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둥그렇게 앉아 말없이 사이다를 마셨다.
확실히 사내들만 있어서 그런지 말들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사이다를 다 마실 때까지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며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사이다 잘 마셨다.”
“그래? 다른 거 뭐 줄까?”
“괜찮아. 네 아들 앞에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으니 그거나 말해봐.”
“그럴까?”
차광수가 운을 띄우자 이대근이 마루를 쳐다봤다.
마루는 이대근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차분히 용건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헬 서바이벌 동호회에서 팔려고 하는 서바이벌 키트와 좀비 퇴치 키트를 대량생산하려는 얘기부터…….
개인적으로 슈퍼에서 판매할 종말 대세일용 서바이벌 키트.
그리고 은밀하게 준비하려는 창과 쇠뇌, 방패, 방어구 생산에 대한 것들을 쉬지 않고 단숨에 풀어놓았다.
모든 얘기를 다 듣고 나자 차광수는 마루를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거참, 묘한 일이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소리야.”
“그렇습니까? 그럼 그들도 저처럼 서바이벌 키트나 좀비 퇴치 키트를 만들어 달라고 하던가요?”
“그 정도는 아니야. 다만 자기 가족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은밀히 내게 무기와 방어구를 조금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지. 뭐 다들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라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만들어 넘겨주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차광수의 말에 이대근과 마루는 크게 고무됐다.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두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된 것이다.
“여기 제가 준비한 목록입니다.”
“음, 어디 보자. 어! 자네 지금 무슨 전쟁이라도 치를 생각인가? 뭐가 이렇게 많아?”
“말씀드렸잖아요. 좀비 퇴치 키트를 만들어서 판다고요.”
“아 참, 그렇지. 그래도 세 자리 숫자는 많아도 너무 많은데……. 이거 다 팔 자신은 있는 건가?”
“물론이죠. 기한 내에 납품해 주실 수 있죠?”
“맘만 먹으면 이 정도야 하루면 충분하지.”
차광수는 친구의 아들 앞이라서 그런지 큰소리를 쳤다.
물론 마루는 차광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빠르면 사흘, 늦으면 이레 정도로 보고 있었다.
“잘됐네요. 가급적 빨리 만들어 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날 길이는 15센티미터 이하로 해주시는 것 잊지 마세요.”
“그 정도야 기본이지. 괜히 쓸데없이 도검 소지 허가증 만들어서 들고 다니게 하지 않으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리고 날 한쪽을 손잡이처럼 보이게 만드는 꼼수를 쓰면 실제 날 길이는 30센티미터 이상으로도 키울 수 있어.”
“아닙니다. 최대 20센티미터면 충분합니다. 그 이상은 사실 필요 없어요.”
“하긴 좀비 대갈통을 쑤시려면 그 정도면 차고 넘치겠지.”
차광수의 마지막 말에 마루는 이대근을 힐끔 쳐다봤다.
이대근은 차광수가 마루를 보고 있는 사이 미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지가 귀띔을 해주지 않았다면, 이분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단순히 내가 주문하는 좀비 퇴치 키트만 보고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냥 미루어 짐작했다고 보는 것은 더 말이 안 되고,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인가 보네.’
차광수는 마지막 말을 하곤 그저 빙그레 웃음만 지었다.
마루도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같이 환하게 웃어줬다.
그가 지금 어떻게 생각을 하든 상관없었다.
지금 자신은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루는 당당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차광수를 만난 것은 결과적으로 마루에게 큰 도움이 됐다.
서바이벌 키트에 들어가는 아이템들과 좀비 퇴치 키트에 들어가는 조립식 창을 빠르게 양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대금은 팔리는 대로 차광수의 은행 계좌에 넣어주기로 했다.
아버지 이대근의 아들이라는 프리미엄도 붙은 덕분이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이 쓸 쇠뇌와 쇠뇌용 화살, 알루미늄합금 방패와 방어구는 대금의 반을 선금으로 주기로 했다.
다만 마루가 개량궁과 컴파운드 보우, 리커브 보우를 인터넷을 통해 주문했다는 말에 수렵용 금속 화살촉이 달린 카본 화살대를 원가에 주기로 약속했다.
그로 인해 마루는 비싼 화살을 차광수를 통해 대량으로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다.
서비스로 전투화, 방검복, 전투 조끼까지 구해준다고 하니…….
확실히 이쪽으로는 발이 아주 넓은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