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37
37화
그는 해모수가 곧 군역을 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앞으로 왜구와 전투를 벌이게 될지도 몰랐다.
단병접전(短兵接戰)에 능한 왜구와 가까이에서 붙어서 싸운다는 것은 목숨이 여러 개가 있어도 감히 안전을 장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최상은 왜구가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원거리에서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쇠뇌는 원거리 타격에 아주 좋은 무기다.
하지만 한 발 쏘고 나면 다시 재장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사이 왜구가 달려들면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장은철은 탈수표가 그 사이의 간극을 메워줄 것으로 기대했다.
해모수는 대장간을 나와 뒤뜰로 갔다.
담 옆에 자라고 있는 큼지막한 나무 중앙에 숯으로 동그랗게 칠을 했다.
크고 작은 원을 그려 넣자 금세 훌륭한 과녁이 만들어졌다.
[그렌: 이제는 암기까지 배우게 됐군.] [마루: 수리검을 이곳에서는 탈수표, 혹은 비표라고 부르는 것을 처음 알았어.] [해모수: 이게 좀 유명한 표창인가 보죠?] [마루: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꽤 잘 알려진 투척 무기야. 수리검은 일본(日本), 아니 지금의 왜(倭)의 닌자(忍者)들이 사용하는 무기로 유명하지.] [해모수: 어쨌든 탈수표, 아니 비표가 공짜로 생겼으니 이걸 잘 써먹을 수 있도록 연습을 해놔야겠어요.] [마루: 비표(飛鏢)라……. 날리는 표창이란 이름 그대로니 이걸로 호칭을 통일하자.] [해모수: 네, 그렇게 해요.] [그렌: 뭐라고 부르든 간에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야. 정작 중요한 것은 꼭 필요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잘 써먹을 수 있느냐는 거지. 그러니 열심히 연습해 두도록 해.]그렌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모수는 나무 중앙에 만들어 놓은 과녁을 향해 정신을 집중해 비표를 날리기 시작했다.
휘익, 탁! 휘익, 탁! 휘익, 탁…….
처음에는 5미터 정도 떨어져서 비표를 던졌다.
그러다 시간이 좀 흐르자 10미터로 거리를 벌렸다.
서서 던지고, 움직이면서 던지고, 뛰면서 던지고, 돌아서 던지고…….
나중에는 마치 경극(京劇)이라도 하듯 혼자 이리저리 몸을 마구 날리며 던져댔다.
해모수는 한동안 어린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듯 신나게 비표를 날렸다.
의외로 그는 자신과 비표가 궁합이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옷을 잘 차려입은 상대에겐 별 소용없는 무기다.
그러나 방어구가 허술한 왜구를 상대로 한다면 비표야말로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비장의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장은철이 해모수를 위해 선택한 비표는 확실히 쓸 만했다.
몇 시간 동안 열심히 연습을 하고 숙달을 시켰다.
나중에는 거리를 20미터까지 벌리고도 과녁에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해모수는 앞으로 매일 비표 던지는 연습을 잊지 말고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뒷산을 향해 갔다.
어느덧 퓨즈 오러 연공법을 수련할 시간이 된 것이다.
이렇게 바쁜 해모수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병적부(兵籍簿) 비리라니요!”
왕규동은 유운량의 말에 입을 딱 벌렸다.
위해위(威海衛) 부(副)지휘첨사(指揮僉事) 왕규동의 품계는 지휘첨사(指揮僉事)인 정4품과 같다.
그러니 정5품에 불과한 첨사(僉司)에게 굳이 공대를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앞에 당당히 서서 말하고 있는 첨사 유운량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산동성(山東省)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에서 감찰관의 신분으로 직접 파견을 나온 자다.
게다가 지금 유운량은 병적부(兵籍簿) 비리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와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고 있었다.
제형안찰사사의 첨사는 도(道)를 담당하는 감찰관으로 보통 성(省: 명나라 최고 행정단위) 안의 행정구역을 분담해 감찰을 진행한다.
평상시라면 왕규동과 유운량이 마주칠 일은 전혀 없다.
그런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마주치게 됐다는 것은… 왕규동에게 결코 득이 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왕규동은 자연스럽게 유운량에게 공대를 하고 있었다.
“부지휘첨사께 올린 문서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이번 사건은 북현(北懸)의 한 유지가 자신의 세 아들의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고려의 유민을 잡아다 자신의 세 아들로 둔갑시켜 강제로 군역을 지게 한 극악한 범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위해위지휘사사(威海衛指揮使司)―지방 및 수도의 각 요충지에 설치된 군사를 통괄하는 기관. 약 5,600여 명의 병사가 배치돼 있었다. 명나라에는 180~200여 개의 위지휘사사(줄여서 위(衛)라고도 부름)가 설치되어 있었다. 위지휘사사 아래에는 5개의 천호소가 소속되어 있었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산동성 제형안찰사사에서 기필코 해결해야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으음.”
유운량의 단호한 말에 왕규동은 절로 신음성을 흘렸다.
어떻게 하든 일을 크게 키우려는 그의 노골적인 의도가 느껴졌다.
‘혹시 산동성 승선포정사사(丞宣布正使司: 성(省)의 통치를 담당하는 기구)에서 병조(兵曹)와 형조(刑曹)가 지금 대립 중인가? 이놈이 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입에 거품을 물어대지?’
왕규동은 유운량이 가져온 서류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폈다.
그는 읽는 도중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켰다.
‘해대호, 해상호, 해광호? 이 이름들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아! 그렇구나. 이번에 고려의 유민 셋을 군역에서 풀어달라는 청탁을 받았지. 그런데 이게 뭐야? 원래 군역을 왔어야 하는 지역 유지의 아들 세 놈이 이번 왜구의 참사 때 모조리 죽어버렸구나. 허어! 이거 참 기가 막힌 일이로다. 이래서 발각이 됐군.’
왕규동은 순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일단 급선무는 유운량을 구워삶는 일이다.
그다음이 고려의 유민 셋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책임 소재다.
이번 사건은 자신이 이곳에 부임해 오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본질상 감독 소홀로 죄를 물으려 한다면 자신의 전임자들에게 물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전임자가 자신을 대신해 책임지려 들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왕규동은 이번 사건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할지 판단했다.
아니 선택했다.
그것은 바로 이번 왜구 사태로 인해 어차피 책임을 면치 못하게 될 위해위의 수장인 지휘사(指揮使)―정3품, 위를 총괄하는 일종의 사단장과 비슷한 직위다.―와 지휘동지(指揮同知)―종3품, 각 위에 두 명, 대략 부사단장 정도의 직위다.― 그리고 자신의 직속상관이 되는 지휘첨사(指揮僉事)―정4품, 각 위에 네 명, 위(衛)의 참모 같은 존재로 각기 관리(管理), 전비(戰備), 훈련(訓練), 둔종(屯種)의 부서를 관장했다.―에게 모조리 떠넘기는 것이다.
죽을 놈은 죽고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푸하하하, 유 첨사! 일이 이렇게 된 거군요. 일단 저와 함께 근사한 곳에 가서 식사라도 하시면서 깊은 대화를 나눠봅시다.”
“이 상황에서 식사라뇨……. 그럴 일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근처에 기가 막히게 닭찜을 잘하는 집을 알고 있소. 어서 가봅시다.”
“어허, 왜 이러십니까? 이거 놓으시오.”
유운량은 왕규동의 수작에 쉽게 넘어가지 않기 위해 팔을 뿌리쳤다.
하지만 왕규동은 유운량의 그런 행동을 깔끔히 무시했다.
오히려 그의 팔을 잡고 질질 끌듯이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아무리 겉으로는 고고한 척해봐야 소용없다.
두둑한 돈주머니를 쥐여주고 거한 술상에 기녀들의 속살을 맛보게 해준다면 다들 나긋나긋하게 변한다는 것을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유운량의 팔을 잡아끌고 가는 그 짧은 사이.
왕규동은 빠른 일 처리를 자랑하며 자신의 혀처럼 구는 서기(書記) 섭은랑에게 쪽지 하나를 전했다.
현재 군역을 지고 있는 고려 유민 세 명의 처리를 명한 것이다.
섭은랑은 왕규동의 명령에 즉각 움직였다.
그 덕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오 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군역을 진 세 명의 고려 유민이 자유를 찾게 됐다.
하지만 왕규동은 여기서 자신도 모르게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유운량이 가져온 몇 장의 문서에 가려진 도지휘사(都指揮使)의 특별 동원령(特別動員令)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만사(人間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다.
앞으로 이 일이 화(禍)로 작용할지 복(福)으로 작용할지…….
결론은 하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 * *
“대호야, 상호야, 광호야!”
“아버지!”
“형!”
“모수야!”
“으흐흐흑!”
“으허어엉!”
위해위 영문(營門) 앞이 갑자기 눈물바다로 변해버렸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조차 제때 듣지 못하고 살아왔던 시간이 무려 5년이다.
해태영은 금쪽같은 세 아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뚝뚝한 자신의 성격으로도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고 말았다.
그는 마치 죽은 자식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구슬프게 울어댔다.
해모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쩍 마르고 얼굴이 새까맣게 탄 세 형의 모습!
보기만 해도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미어졌다.
해대호, 해상호, 해광호!
세 형제도 못 보던 사이 어느새 폭삭 늙어버린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흐흐흑, 살아있었구나. 내 아들들!”
“네, 아버지, 흑흑흑! 저희들은 모두 무탈합니다.”
“그래 고맙구나. 내가 무지하고 힘이 없어서 너희들에게 이런 고생을 시켰구나.”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가슴을 치며 자책하는 해태영!
하지만 장남 해대호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도 극구 고개를 저어댔다.
둘째 해상호와 셋째 해광호도 해대호와 같이 열심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버지!”
“미안하다. 모두 내 잘못이다.”
“아버지! 다신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절대 아버지 잘못이 아닙니다.”
“이제 저희들이 이렇게 군문(軍門)을 나왔잖아요. 그만 고정하세요.”
“맞아요. 아버지. 이제 큰형, 둘째 형, 셋째 형이 모두 돌아왔어요. 앞으로 우리 가족이 힘을 합치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거예요.”
“그래. 맞다. 너희들 말이 다 맞아.”
해태영이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자 다들 서둘러 옷깃으로 눈물을 닦았다.
한 편의 슬픈 영화를 본 것 같은 이산가족 상봉의 장면이 끝나자 그들은 서둘러 영문을 벗어났다.
아마 당분간은 위해위를 향해 오줌도 누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문등현으로 가기 전에 어디 가서 뭐 좀 먹도록 하자.”
“네, 아버지. 이쪽으로 가시면 주루와 식당이 몇 개 있어요.”
해태영의 말에 장남 대호가 그들을 이끌었다.
5년 동안 몇 번 나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위해위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라 어디 가면 음식을 맛있게 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대호야! 기왕이면 닭고기를 먹고 싶구나.”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닭고기 잘하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닭고기를 먹고 싶다는 아버지의 말에 대호는 두말없이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입구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고소한 닭고기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절로 침이 고이고 배 속의 식충이들이 요동을 쳤다.
그들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태영은 큰맘 먹고 사람 숫자대로 닭구이를 시켰다.
“여기 닭구이 다섯 마리하고 시원한 탁주 좀 주시오.”
“예,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어린 식당 점원이 묘한 말투로 해태영의 주문을 받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탁주가 나오자 해태영은 이제 다 큰 자식들에게 손수 술을 한 잔씩 쳐줬다.
그들은 아버지와의 대작을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받았다.
“이제 너희들도 성인이다. 이 술 한 잔씩 마시고 힘들고 어려웠던 과거는 모두 털어버리자.”
“네, 아버지.”
해태영의 말에 다들 긴장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해모수도 형들을 따라 탁주를 한 잔 받아 단숨에 마셔버렸다.
시원한 탁주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위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버지, 제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장남이 따라주는 술 한번 마셔보자.”
해태영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밀었다.
해대호는 아버지의 잔에 탁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해태영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슬쩍 자신의 눈에 고인 눈물을 옷깃으로 닦아냈다.
장남이 따라준 탁주를 호쾌하게 들이켠 해태영은 그동안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시원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