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43
43화
조심스럽게 버튼을 눌러봤다.
지이이이이잉!
예상대로 2연발 쇠뇌의 시위가 자동으로 뒤로 당겨졌다.
쇠뇌 안에서 뭔가 정교한 톱니바퀴 같은 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나를 동력으로 톱니바퀴를 돌려서 시위를 당기는 방식인가 보구나.’
그렌은 눈을 빛내며 살짝 방아쇠를 당겼다.
퉁퉁!
빈 시위가 연속적으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그는 다시 한번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쇠뇌의 손잡이 안에 들어있는 것은 마나석이 아니라 최하급 마나석 가루다.
그걸 깨닫자 버튼으로 가던 손이 저절로 멈춰 섰다.
이번에는 손으로 시위를 잡아 강하게 당겨봤다.
생각보다 부드럽게 시위가 뒤로 잡아당겨졌다.
두 개의 시위를 연속으로 방아쇠에 걸고 쇠뇌용 볼트 두 개를 꺼내 장전했다.
쇠뇌의 안전 고리를 채운 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렌은 버클러와 가죽 갑옷 세트를 집었다.
메이스와 쇠뇌처럼… 최하급 마나석 가루가 담긴 작은 빈 병으로 수정 구슬을 대신해 활성화시켰다.
마나석이라면 마나를 다 소비하고 나서 스스로 마나를 채운다.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마나석 가루는 다르다.
한번 마나를 소비하면 다시는 채워지지 않는다.
쉽게 말해 일회용이라는 것이다.
그렌은 최하급 마나석 가루가 담긴 주머니를 손에 쥐었다.
벌써 반이나 써버린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써버린 것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법.
그는 아깝다는 마음을 애써 접어야 했다.
침대 위에 앉아 내일 쓸 마법을 선택했다.
주문을 외우고 하나씩 메모라이즈하기 시작했다.
그렌은 엄연히 2서클의 초보 마법사다.
매직 미사일, 그리스, 스트렝스, 매직 아머 등 1서클 마법은 이제 시동어만으로도 마법을 발현할 수 있다.
하지만 2서클 마법인 윈드 커터와 실드, 바인드와 홀드 같은 마법들은 미리 메모라이즈해 두지 않는다면 실전에서 일일이 주문을 외워야 사용이 가능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투 상황!
느긋하게 주문을 외울 시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 좀 빨리 죽여달라는 말이나 매한가지다.
그렌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메모라이즈 작업을 진행했다.
한참을 그렇게 집중하는 사이 어느덧 사위는 어둠의 장막이 도둑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눈을 뜬 그는 이미 잘 시간이 한참 지나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둘러 책상을 정리하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몸을 반듯이 눕고 눈을 감았다.
몇 번 숨을 쉬지도 않았는데도 호흡하는 소리가 점차 가라앉고 고르게 들려왔다.
하늘에 떠있는 달님이 슬그머니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그의 가슴을 은은하게 빛으로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 * *
드르륵드르륵…….
덜그럭덜그럭…….
길게 줄지은 짐마차와 수레들이 가파른 경사 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봄의 끝자락을 달리는 선선한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마차와 수레를 끄는 짐말과 당나귀의 몸에는 벌써 땀이 가득하다.
안쓰러운 마음에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렌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마차에서 내려 자기 발로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정도뿐이다.
“힘들지 않으세요?”
바로 옆에서 고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제니퍼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그렌은 담담하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하물며 제니퍼 같은 미인이 다가와 미소를 짓고 있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당연하다는 듯, 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못된 안면 근육!
이놈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렌은 얼른 고개를 돌려 산 위를 쳐다봤다.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나요?”
“이 고개만 넘으면 바로예요.”
아침에 시겔 마을을 출발해 꼬박 다섯 시간을 이동했다.
길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다시 네 시간.
그런데도 아직 목적지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정말 이 고개만 넘으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걸까?
의심병이 조금씩 도지려 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라키 산맥의 어디쯤이라고 했죠?”
“라키 산맥이 시작되는, 남동부 초입에 있는 시에라 요새예요. 그렌 님은 아마 처음 보시겠네요?”
“네, 이 길은 초행입니다.”
“시에라 요새는 라키 산맥 남동부에 있는 몬스터 요새 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에요. 카시오페라 왕국군이 관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 동쪽의 이튼 영지, 북쪽의 베른 영지, 서쪽의 벨라 영지에서 정기적으로 영지병과 용병을 모아 보내고 있어요.”
“세 개의 영지가 하나의 요새를 담당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예! 그런 셈이죠. 그만큼 시에라 요새가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바꿔 말하면 그만큼 몬스터가 기승을 부리는 곳이겠군요.”
“정답입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은 몬스터 웨이브 시즌도 아니고 오히려 몬스터들이 짝짓기를 하느라 바쁜 계절입니다.”
그렌은 짝짓기라는 말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히 제니퍼는 그런 쪽엔 좀 둔감한 편이었다.
그저 경사진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느라 볼이 좀 상기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렌 님은 다른 마법사님들과는 달리 체력이 참 좋으시네요.”
“건강을 위해 평소에 시간 날 때마다 체력 단련을 틈틈이 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러셨군요. 참 대단하시네요. 마법을 연구할 시간도 부족하실 텐데 체력 단련까지 하시니 말이에요.”
“아… 네!”
그렌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건강한 몸과 체력은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일어난 신체 수복 보정 효과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이다.
그동안 마법을 연구하고 수련하느라 전혀 몸을 쓰지 않았던 그렌이다.
그의 노력과는 1도 상관없는, 우연과 행운이 겹친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굳이 제니퍼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이 건강한 몸의 주인은 그렌!
바로 그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시에라 요새로 가는 미르 용병단의 용병들이 꽤 많네요.”
“전부 미르 용병단은 아니에요. 우리 미르 용병단의 용병은 그리 많지 않아요. 3부대에 소속된 용병 서른 명과 4부대에서 보급품을 옮기러 나온 용병 세 명이 전부예요.”
“그럼 나머지는 어디에서 온 사람들이죠?”
“4부대에서 고용한 마부와 일꾼들을 제외하면, 시에라 요새에서 자체적으로 모병한 용병과 상인이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그렇군요.”
“참, 아직 우리 33파티의 용병들을 소개시켜 드리지 않았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얼른 데리고 올게요.”
“아니 뭐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제니퍼는 그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쌩하고 사라졌다.
그러더니 금세 그렌의 앞으로 33파티의 파티원들을 몽땅 데리고 왔다.
“다들 그렌 님에게 인사하세요. 이번에 우리 33파티에 들어오신 마법사님이세요.”
“안녕하세요? 33파티에서 메인 탱커를 하고 있는 토드입니다.”
“저는 근거리 딜러를 맡은 브라이언입니다.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보조 탱커를 맡은 슐러입니다.”
…….
토드를 시작으로 33파티의 파티원들은 그렌에게 한 명씩 인사를 시작했다.
그렌은 같이 걸어가면서 그들의 인사에 일일이 고개를 숙였다.
또한 얼굴을 마주 보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다들 그렌의 행동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제니퍼를 비롯한 소피아와 로즈는 이미 어제 그렌과 인사를 했던 터라 그의 털털한 스타일을 익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놀라는 대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니퍼가 파티장으로 있는 33파티는 그렌을 포함해 정확히 열 명이다.
탱커 셋, 근거리 딜러 셋, 원거리 딜러 셋 그리고 힐러 한 명으로 구성된다.
메인 탱커는 토드, 보조 탱커는 슐러와 도너, 근거리 딜러는 브라이언, 사이먼, 토마스다.
원거리 딜러는 제니퍼와 소피아가 맡고 있다.
이번에 마법사인 그렌이 들어와 팀의 원거리 공격력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기대됐다.
로즈는 파티의 유일한 힐러로 파티를 지원한다.
미르 용병단 3부대 3파티(통칭 33파티)―파티장 제니퍼
탱커: 토드(메인 탱커), 슐러(보조 탱커), 도너(보조 탱커)
근딜: 브라이언(소드), 사이먼(스피어), 토마스(배틀액스)
원딜: 제니퍼(아처), 그렌(마법사), 소피아(아처)
지원: 로즈(힐러)
통성명이 끝나자 분위기가 한껏 화기애애해졌다.
소피아와 로즈가 33파티 파티원들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의도적으로 띄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귀하디귀한 마법사님이 우리 파티에 들어왔으니 앞으로 33파티의 화력(火力)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요.”
“참, 다들 그렌 님이 2서클의 마법사이신 것은 알고 있나요?”
“우와! 드디어 우리 미르 용병단도 2서클 마법사님을 모시게 된 거야!”
“1서클만 돼도 감지덕지하는 상황인데……. 2서클이라면 공격력이 진짜 장난이 아니겠네요. 그렇죠? 그렌 님!”
“아! 뭐 일단은…….”
그렌은 사이먼의 말에 살짝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피아는 사이먼이 눈치 없게 끼어들어 그렌을 곤란하게 만들자 곧바로 옆으로 다가가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쳤다.
퍽!
“크윽! 아이고 아파라! 왜 때려?”
“넌 좀 맞아도 돼.”
“아니 왜?”
“이게 아직도 누나한테 까분다.”
“우이씨, 괜히 나만 미워하고 있어.”
소피아와 사이먼이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자 제니퍼가 끼어들어 마무리를 했다.
“일단 지금은 모두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고, 시에라 요새에 도착하면 개인적으로 그렌 님과 얘기를 나누도록 하세요.”
“네.”
“예.”
제니퍼의 말에 33파티의 용병들은 한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그들은 그렌에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고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니퍼는 끝까지 그렌의 옆에 남아 그와 보조를 맞추며 걸어갔다.
“시에라 요새다!”
“우와! 드디어 도착했다.”
누군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용병들을 비롯한 마부와 일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앞을 쳐다봤다.
그러곤 일제히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렌도 자연스럽게 그들이 일으킨 물결에 합류했다.
전면에 단단한 돌로 만든 석조 구조물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그 구조물은 그들이 가까이 걸어가면 갈수록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들의 눈앞에 온전한 요새의 모습이 완전하게 드러났다.
“저게 시에라 요새인 모양이군.”
“네, 맞아요. 저것이 대(對) 몬스터 요새 시에라예요. 지난 반세기 동안 단 한 번도 몬스터 웨이브에 무너지지 않은 요새로도 유명하죠.”
과연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요새였다.
규모와 크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단단한 돌로 잘 만들어진 요새의 모습은 가히 난공불락(難攻不落)!
철옹성(鐵甕城)을 방불케 했다.
“보통 몬스터 웨이브는 언제 일어나죠?”
“먹잇감이 부족해지는 초겨울부터 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어나요. 특히 이곳은 라키 산맥의 줄기가 이어진 곳이라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몬스터 웨이브보다 훨씬 그 규모가 커요.”
제니퍼와 그렌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사이좋게 시에라 요새를 향해 올라갔다.
간혹 남자 용병들이 그 모습에 질투가 났는지 뒤에서 그렌을 욕하기도 했다.
하지만 놀란 주변의 용병들이 그렌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려주자 납득이 되는지 바로 꼬리를 내리고 잠잠해졌다.
과거 미르 용병단에서 용병으로 일했던 마법사들!
그들의 성깔이 하나같이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이이익!
차라라랑 차라라랑!
미르 용병단을 비롯한 보급부대와 용병, 상인들의 무리가 시에라 요새로 다가갔다.
무쇠로 만들어진 거대한 철문이 서서히 안쪽으로 열렸다.
활짝 열린 시에라 요새 정문을 미르 용병단이 제일 먼저 통과했다.
뒤를 이어 짐마차와 수레들이 줄줄이 안으로 들어갔다.
요새 안에 들어온 미르 용병단 3부대는 미르 용병단 2부대의 격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이제 오나 저제 오나 목을 길게 빼며 기다리고 있던 2부대원들!
그들은 곧바로 인수인계를 하고 교대를 원했다.
미르 용병단은 시에라 요새와 계약을 맺어 항상 2개 부대를 요새 안에 주둔시켰다.
2주간의 근무가 끝난 3부대가 2부대와 교대를 하고 시겔 마을로 돌아가면 일주일을 내리 쉴 수 있었다.
휴식을 끝내고 요새로 3부대가 돌아오면 2주 동안 근무한 1부대와 다시 교대한다.
이렇게 미르 용병단 1, 2, 3부대는 서로 로테이션을 해가며 시에라 요새에 상시 주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