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45
45화
똑똑똑!
이른 아침부터 누가 노크를 했다.
“누구세요?”
“저 제니퍼예요.”
그렌은 제니퍼란 말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새벽같이 샤워를 했는지 그녀의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아직 마르지 않은 촉촉한 물기가 남은 머릿결!
자신에게 인사를 한다고 황금빛 물결처럼 갈라졌다가 하나로 다시 합쳐졌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네, 전 잘 잤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이른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새벽에 정찰을 나간 12파티(1부대 2파티)가 구조 신호를 보내왔어요. 그래서 우리 33파티가 구조를 위해 즉시 출동을 해야 돼요.”
“알았어요. 바로 준비하고 나가죠.”
“예, 감사합니다. 입구에서 기다릴게요.”
그렌은 제니퍼의 말에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그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탁자에 벗어놓은 가죽 갑옷 세트를 하나씩 걸쳤다.
가죽 헬멧, 가죽 갑옷, 가죽 신발을 모두 꼼꼼히 장비했다.
그렌은 어제 4부대 지원 팀이 나눠준 전투 배낭을 등에 메고 버클러를 집어 들었다.
버클러를 왼손에 채운 뒤 쇠뇌를 허리에 걸고 메이스를 들었다.
[그렌: 혹시 나 뭐 빠트린 것 없니?] [해모수: 없어요. 빨리 나가보세요.] [마루: 마법 주머니에 어지간한 것은 다 들어있잖아요. 걱정 마시고 이제 출발하세요!]그렌의 첫 출전에 괜히 해모수와 마루까지 살짝 흥분했다.
빠르게 방 안을 한번 훑어본 그렌은 곧바로 방문을 열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입구에 제니퍼와 33파티 용병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렌 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네, 다들 잘 잤어요?”
33파티 용병들은 그렌을 보자 모두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그렌도 그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모두 시에라 요새 북쪽 관문으로 가면서 얘기를 나누도록 해요.”
“네.”
제니퍼의 말에 다들 그녀를 둘러싸며 북쪽 관문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먼저 그렌 님께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전시(戰時)에는 존칭을 생략하는 것이 전장(戰場)의 규칙입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전 상관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하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렌이 그녀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제니퍼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제니퍼가 어렵게 꺼낸 말은 사실 지극히 당연한 상식에 속했다.
당장 화살이 날아다니고 창칼이 난무하는 전투의 와중에 누가 일일이 예의를 차리며 존칭을 쓴단 말인가?
물론 아직도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가출해 있는 일부 귀족과 기사들은 예외다.
전투가 무슨 로맨스 소설이나 극장에서 보는 신파극인 줄 알고, 기사도를 따지고 들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몸이 곧 재산이고 죽음을 항상 옆에 두고 있는 용병들은 아니다.
그들에게 기사도는 하등에 쓸모도 없는, 말라비틀어진 풀때기나 다름없었다.
“먼저 1부대 2파티, 즉 12파티가 오늘 새벽에 모종의 일로 숲속으로 정찰을 나갔다. 하지만 숲속으로 진입한 지 한 시간 만에 구조를 요청하는 마법 폭죽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이에 요새 사령부에서는 비상대기 중이던 레이저부대를 급파하고 우리 미르 용병단에 소식을 전해와 우리 33파티가 비상 출동하게 된 것이다.”
제니퍼의 말에는 전혀 군더더기가 없었다.
모든 말이 단순명료하고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잘 전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설명을 통해 33파티의 용병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33파티가 북쪽 관문에 도착하자,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친 레인저 소대 30여 명이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제니퍼 파티장! 때마침 잘 왔군.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있지?”
“네, 필립 소대장님.”
필립 중위는 시에라 요새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정찰 자산인 레인저부대의 소대장이다. 중대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레인저부대의 정찰 능력과 전투력은 이미 카시오페라 왕국 안에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우리만 가는 게 아니었군.”
“그러게 말이야. 레인저들과 같이 간다니 안심이야.”
33파티의 용병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그렌의 귀에도 들려왔다.
군복을 입은 사냥꾼의 느낌이 나는 레인저!
겉보기만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같은 파티의 용병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꽤나 강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자들과 동행한다니 적이 안심이 된다.
“레인저 1소대! 출발!”
“33파티 출발!”
필립과 제니퍼가 경쟁하듯 소리쳤다.
레인저들과 용병들이 동시에 북쪽 관문을 향해 속보로 다가갔다.
북문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들이 급히 작은 쪽문을 열어줬다.
레인저들과 용병들은 쪽문을 통해 신속하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렌은 사실 무쇠로 만들어진 크고 육중한 북문이 열리길 기대했었다.
하지만 쪽문이 열리는 모습에 그만 피식 웃음을 흘리며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시에라 요새를 빠져나온 레이저 1소대는 즉시 부챗살 모양으로 퍼졌다.
그러곤 이내 한쪽으로 방향을 잡고 속보로 전진했다.
그 뒤를 33파티의 용병들이 스퀘어 진형을 만들며 뒤쫓아 갔다.
당연히 마법사인 그렌과 힐러인 로즈를 가운데 두고 보호하는 방식이었다.
요새와 숲 사이에는 수백 미터의 텅 빈 공간이 존재한다.
수도 없이 많은 몬스터 웨이브를 거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죽음의 대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텅 빈 공간을 통과해 숲속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분위기가 일변했다.
숲속은 어두웠다.
수풀이 그냥 우거진 정도가 아니었다.
거목들이 경쟁하듯 치솟아 온통 숲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로 인해 하늘도 잘 보이지 않았다.
거목의 두께는 청년 서너 명이 둘러싸고도 남아돌 정도.
높이는 또 얼마나 높은지 100미터도 훨씬 더 되는 것 같았다.
그런 거목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수해(樹海: 숲의 바다)를 이루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라키 산맥이었다.
그렌은 말로만 듣던 라키 산맥 안으로 들어오자 괜히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마법사답게 숲 안과 밖의 마나의 농도가 다르다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그렌: 숲으로 들어오니까 마나의 농도가 훨씬 짙어졌어.] [마루: 그럼 그만큼 라키 산맥의 몬스터들이 강하다는 말인가요?] [그렌: 아마도 그렇겠지.] [마루: 지금부터 해모수와 내가 구역을 나눠서 살펴볼게요. 내가 뒤쪽, 해모수가 위쪽.] [해모수: 어, 그거 좋은 방법이네요.] [그렌: 고마워.]그렌은 마루의 말에 반색했다.
사람의 눈은 앞에만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 옆, 뒤, 위쪽으로 갈수록 적의 기습에 취약하다.
마루와 해모수가 그렌을 위해 그 취약한 방향들을 그저 눈으로 봐주기만 해도 그는 더욱 안전을 보장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한 시간쯤 숲속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레인저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
놀란 제니퍼가 급히 오른손을 들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멈춰 서라는 신호였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전령으로 보이는 레인저가 다가왔다.
제니퍼와 뭔가 의논을 하더니 돌아갔다.
“모두 이쪽으로 모여!”
제니퍼가 작게 소곤거리며 손짓을 했다.
33파티의 용병들이 지체 없이 그리고 소리 없이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저기 보이는 바위로 된 언덕 위에서 오크들과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레인저들은 후면을, 우리는 우회해서 오크들의 옆면을 동시에 타격한다.”
다들 제니퍼의 말을 듣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표시였다.
제니퍼가 입에다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그러곤 천천히 숲을 우회해 바위로 된 언덕을 향해 올라갔다.
그워어어어어!
창 차차창, 창창창!
바위 언덕을 향해 다가갈수록 오크들의 고함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커져갔다.
조심스럽게 언덕을 기듯이 올라간 33파티 용병들!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고 모두 앞을 빼꼼히 내다봤다.
“제길, 블랙 오크잖아?”
“이런 난리 났네.”
메인 탱커인 토드와 보조 탱커인 슐러가 작게 소곤거렸다.
그 내용은 그렌의 귀에도 잘 들렸다.
블랙 오크라는 말에 그는 잠시 머릿속을 뒤져 기억의 편린(片鱗)을 끄집어냈다.
[해모수: 블랙 오크가 뭐예요?] [그렌: 으음, 오크 중에서 가장 호전적인 종족 중 하나야.] [마루: 그럼 전투력이 만만치 않겠네요.] [그렌: 그렇겠지.]그렌은 블랙 오크는 고사하고 살아있는 오크를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블랙 오크가 얼마나 강하고 호전적인지 사실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마탑 도서관에서 본 기억을 토대로 대충 미루어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고개를 살짝 내밀어 그렌도 바위 언덕의 전황을 살폈다.
피부가 검어서 더욱 무섭게 생긴 블랙 오크!
수십 마리가 좁은 입구의 동굴 앞에 서서 씩씩대고 있었다.
두 놈이 동굴 안으로 무기를 쑤셔 넣으면서 위협적인 고함을 쳤다.
하지만 감히 동굴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굴 입구는 사람과 오크의 피로 붉고 푸르게 범벅이 되어있었다.
모르긴 해도 이미 몇 차례의 전투로 인해 양쪽 다 큰 피해를 본 것 같았다.
핑 피피핑, 핑핑핑!
쿠워억, 쿠아악, 케무룩…….
블랙 오크들의 뒤쪽에서 갑자기 화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레인저들이 본격적으로 블랙 오크들의 뒤를 공격한 것이다.
화살에 맞은 블랙 오크들은 구슬픈 비명을 흘리며 차가운 땅에 대가리를 처박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블랙 오크들을 섬멸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블랙 오크들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나무로 만든 방패를 위로 치켜들어 화살 공격을 방어해 냈다.
“지금이다. 모두 총공격!”
제니퍼가 벌떡 일어나 활을 쏘면서 소리를 질렀다.
33파티 용병들은 용감하게도 일제히 앞으로 돌격했다.
소피아는 연신 사방을 살피며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블랙 오크를 향해 빠르게 화살을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렌도 그들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며 마법을 날렸다.
“윈드 커터!”
시동어를 외치자 그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생겨났다.
33파티 용병들의 머리 위를 지나 블랙 오크 무리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쐐애애액!
쩡, 쩌저저정!
쿠워어억, 케에엑, 쿠아아앙!
실전(實戰)에 나와 마음먹고 날린 첫 마법은 어째 운이 없었다.
제니퍼가 날린 화살에 어깨를 맞은 블랙 오크 하나가 옆에 있던 블랙 오크 둘과 함께 두꺼운 나무 방패를 동시에 번쩍 위로 치켜든 것이다.
나무 방패는 그렌의 윈드 커터에 싹둑 잘려나갔다.
덤으로 방패를 들고 있던 블랙 오크들의 팔과 어깨까지 같이 잘라냈다.
하지만 뭐로 만들었는지, 단단하기 그지없는 나무 방패는 그렌이 날린 윈드 커터의 절삭력을 몽땅 잡아먹었다.
윈드 커터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힘을 잃고 소멸하고 말았다.
“제기랄!”
자신도 모르게 그렌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실망과는 달리 블랙 오크들의 간담은 서늘해졌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무기를 가진 인간들만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하고 무시무시한 힘을 쓰는 존재!
바로 그런 끔찍한 마법사까지 같이 왔다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니퍼는 활을 쏘면서 천천히 블랙 오크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빠르게 눈으로 전황을 파악하고 근거리 딜러인 브라이언을 불러 그렌을 가리켰다.
브라이언은 제니퍼의 명령을 바로 알아먹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이곤 그렌의 옆으로, 마치 수능 시험장 교문에 찰싹 달라붙은 찹쌀떡처럼 바짝 붙어 섰다.
마법사인 그렌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마침 동굴 안에서 큰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원군(援軍)이 온 것을 깨달은 12파티 용병들과 비상대기조로 급파된 레이저부대가 일제히 동굴 밖으로 튀어나와 블랙 오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제 블랙 오크들은 삼면에서 공격을 받게 됐다.
전투에서 포위 공격 다음으로 가장 적의 사기를 빼앗는 것이 삼면(三面) 매복이다.
물론 지금 공격은 정확히 삼면 매복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삼면에서 일제히 공격을 해대니, 블랙 오크들이 아무리 호전적인 오크 종족이라고 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랙 오크들은 삼면에서 쳐들어오는 레인저와 용병들의 매서운 화살과 창칼로 인해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다.
그러면서도 기회만 생기면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흉험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위협해 왔다.
그러나 레인저 소대와 미르 용병단 용병들은 지금의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모두 힘을 합쳐 착실하게 블랙 오크들의 숫자를 줄여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