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48
48화
곧바로 주변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그렌의 몸 주변으로 마나가 빠르게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전에 비해 더욱 발전된 해모수의 마나 호흡과 마나 운용 능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렌: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 [마루: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것도 그렌 형의 능력으로 보이니까요.] [그렌: 마루 네 말이 맞다.]그렌은 마루의 말대로 더 이상 해모수를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부러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정말 해모수의 능력이 곧 자신의 능력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해모수로 인해 바닥을 치던 그렌의 마나가 빠르게 위로 차오르고 있었다.
[마루: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렌: 휴우, 글쎄. 쉽게 이 동굴을 빠져나가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요새 사령부에서 뭔가 대책을 세워주겠지. 문제는 그때까지 우리가 여기서 잘 버틸 수가 있냐는 거야.] [마루: 3서클로 서클을 올린다면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렌: 당연히 훨씬 유리해지겠지. 하지만 언제 3서클에 오를 것을 기대하겠어.] [마루: 우리 방법을 한번 잘 생각해 봐요. 나도 좋은 수가 있는지 생각해 볼 테니까요.] [그렌: 그래. 우리 같이 잘 궁리해 보자.]그렌은 마루의 말대로 차분히 탈출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2서클의 초보 마법사인 그렌의 능력으로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내가 3서클만 됐어도 어떻게 해볼 텐데…….’
그렌은 자신의 무능력에 다시 한번 치를 떨었다.
1서클의 견습 마법사에서 2서클의 초보 마법사가 됐을 때는 뭐든지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2서클에 올라서자 3서클이 아닌 게 너무도 아쉬웠다.
특히 지금의 이런 위기 상황에서 서클 하나의 차이는 정말 절대적이었다.
‘진짜 서클 하나의 차이가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겠구나. 차라리 서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을 텐데……. 가만, 서클이 없다고! 이 기회에 그냥 서클 마법에서 벗어나 아예 혼돈 마법으로 갈아탈까?’
그렌은 지금 당장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혼돈 마법의 유혹이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혼돈 마법의 단점은 위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같은 마나를 사용해도 위력이 반 정도밖에 나오지 않으니 누가 익히려고 하겠는가?
물론 단점이 있다면 장점도 있다.
아니 결정적인 단점에 못지않은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혼돈 마법은 마법의 발현 속도가 빠르고 서클이라는 벽 자체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고위 마법까지 몽땅 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6서클 이상의 마법은 오히려 서클 마법보다 더 발현하기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5서클 이하의 마법까지는 얼마든지 제한 없이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마나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서클과 상관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마나만 충분하다면 말이다.
‘그래. 마나는 어차피 내 능력으로 모아도 얼마 모으지 못한다. 하지만 내겐 해모수가 있어. 그의 능력이라면 혼돈 마법이라고 해도 3서클 이상의 마나를 빠르게 모을 수 있을 거야. 아니 어쩌면 5서클에 해당하는 경지까지는 훨씬 더 빠르게 올라설지도 모른다. 어차피 여기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언제 올라갈지 알 수도 없는 3서클의 깨달음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혼돈 마법으로 갈아타자.’
그렌은 점점 마음이 혼돈 마법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갔다.
* * *
우적우적, 빠지직, 까드득…….
우르카이 족장 갤포스는 죽은 용병의 다리 하나를 통째로 씹어 먹으며 바위 언덕 위의 동굴을 향해 살기를 뿌렸다.
아무리 뾰족한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라고 해도 동굴에 갇힌 이상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다.
갤포스는 종족의 주술사인 마데이라와 다데카솔을 차례로 쳐다봤다.
다데카솔보다는 마데이라가 인간들에게 더 큰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마데이라! 처리한다. 인간.”
“알겠다. 처리한다. 내가! 인간들.”
갤포스는 주술사 마데이라에게 용맹한 전사 스물과 우르카이 병사 이백을 맡겼다.
마데이라는 갤포스에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갤포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데카솔과 남은 전사들을 이끌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의 뒤를 우르카이 병사 수백이 조용히 뒤따라갔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우르카이 종족의 족장이 된 갤포스!
그는 새로운 보금자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전에 살던 곳은 너무 경쟁이 치열해서 암컷들과 새끼들에게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이 근처에는 어쩐 일인지 강력한 경쟁자들이 거의 없었다.
허약해 빠진 소형 몬스터와 그린 오크들의 둥지만 주변에 널려있었다.
얼마 전에는 그나마 좀 상대할 만한 놈들인 블랙 오크의 둥지를 발견했다.
당장 전투를 벌인다면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피해 없이 블랙 오크를 처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블랙 오크 둥지 주변에서 놈들을 하나씩 사냥해서 개체 수를 줄여야 한다.
당장 야들야들한 살과 달콤한 피를 가진 동굴 속의 인간들을 모조리 씹어 먹고 싶었다.
그러나 우르카이 종족의 안전과 미래를 위해 갤포스는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기로 했다.
족장 갤포스와 주술사 다데카솔, 우르카이 전사들과 병사들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마데이라는 자신에게 할당된 우르카이 전사들을 즉시 한쪽으로 불러 모았다.
마데이라는 동굴과 바위 언덕 뒤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뭔가를 지시했다.
우르카이 전사들은 주술사 마데이라의 말에 즉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위 언덕 뒤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마데이라는 남은 우르카이 병사들을 둘로 나눴다.
반은 바위 언덕 동굴 입구 주변에 주둔시켜 철통같이 지키게 했다.
나머지 반은 바위 언덕 아래 숲속으로 내려보냈다.
숲속으로 들어간 우르카이 병사들은 곧 나뭇가지를 모으기 시작하더니 이내 바위 언덕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동굴을 쳐다보는 마데이라의 눈에 서늘한 살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 * *
“기습이다.”
“우르카이들이 쳐들어온다.”
동굴 입구를 지키던 레인저들이 크게 소리쳤다.
사십 명의 레인저와 용병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쿠워오오오오! 쿠웨에에에에!
우르카이들의 엄청난 함성이 동굴을 진동시켰다.
레인저들은 순식간에 활시위를 길게 당겨 우르카이들을 조준했다.
용병들은 동굴 앞 바리케이드 뒤에서 방패를 들고 밀려오는 우르카이들의 돌진을 받아냈다.
쾅!
우지끈, 와르르르르…….
거센 우르카이들의 돌격에 쌓아놓은 바위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 때문에 돌진한 우르카이들은 속도를 잃어버렸다.
“이야아앗!”
“밀어붙여!”
방패를 든 용병들이 힘껏 우르카이들을 밀어붙였다.
그러자 그들의 뒤에 서있던 창을 든 용병들이 방패 사이로 거침없이 창을 쑤셔 박았다.
퍽, 푹, 푸욱, 터덩!
우르카이 병사들은 다른 오크들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무장을 갖춘 놈들이다.
어떤 몬스터를 잡고 얻은 가죽인지는 모르지만, 가죽 갑옷 비슷하게 흉내를 내서 만든 것들을 걸치고, 가죽 방패 비슷한 것을 들고 있기도 했다.
용병들의 창은 우르카이의 몸을 바로 찌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들이 입고 있는 가죽 갑옷이나 가죽 방패에 막혀버렸다.
몸이 찔린 우르카이들조차 그들의 질긴 가죽으로 인해 중상을 입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피피피핑! 피피피핑!
그때 용병들의 머리 위로 레인저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쿠웨에엑, 꾸워어억, 케에엑…….
얼굴과 목 등 급소를 노린 레인저의 화살 공격에 우르카이 병사들은 참혹한 비명을 질러댔다.
우르카이 몇이 바닥에 쓰러지자, 분노한 우르카이들이 들고 있던 돌도끼와 나무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며 방패를 든 용병들을 향해 공격했다.
쾅, 쾅쾅, 쾅, 쾅!
안 그래도 힘이 장사인 놈들이 둔기까지 휘둘러 대자 방패로 그것을 막아내는 용병들의 표정이 사색이 됐다.
결국 힘에 못 이긴 방패를 든 용병 하나가 쓰러졌다.
우르카이들이 빈틈을 노리고, 순식간에 밀고 들어와 용병 하나를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다.
“방패병!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때마침 천사의 목소리와 같은 제니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패병들은 반색을 하며 서로 줄을 맞춰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뒤로 후퇴했다.
급하게 물러서면 순간 방어선이 붕괴되어 우르카이들이 동굴에 난입할 수 있다.
좁은 동굴에서 우르카이들과 난전(亂戰)이 벌어지면, 힘과 체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레인저와 용병들에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난전으로 가는 것만큼은 기필코 막아야 한다.
“지금이다. 공격!”
이번에는 필립 중위의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그동안 동굴 벽에 바짝 붙어 앉아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레인저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리고 용병들이 창칼을 쑤셔 박았다.
화살이 노리는 곳은 주로 얼굴과 목이다.
창이 노리는 곳은 우르카이들의 기동력을 빼앗기 위해 허벅지와 다리 그리고 발목에 집중됐다.
피피핑! 피피핑! 피피핑!
슈컥, 푹, 푸욱, 빠각, 퍼퍽!
아무리 힘과 체력이 좋아도 허벅지와 발목 같은 곳에 부상을 당하면 급격히 체력과 기동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어두운 동굴 안은 밝은 곳에 있다가 들어온 우르카이보다 계속 동굴 속에서 어둠에 눈이 적응된 인간들에게 조금은 더 유리했다.
우르카이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오자 승리가 바로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좋아했다.
하지만 갑자기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과 창칼의 세례에 온몸에 상처를 입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정신없이 ‘다굴’을 당한 우르카이들은 방패병들의 압박에 별다른 공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하나둘씩 차가운 동굴 바닥에 코를 처박아야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용케 레인저 하나를 잡아 목을 비틀어 죽이는 우르카이의 잔혹한 모습도 보였다.
“방패병 교대!”
“와아아아아!”
방패를 든 용병들은 즉시 뒤로 물러났다.
대기하고 있던 다른 용병들에게 자신의 방패를 건네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새롭게 방패를 든 쌩쌩한 용병들은 곧바로 동굴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쏟아지듯 밀려오는 우르카이들을 그들은 힘껏 방패로 밀어붙였다.
그사이 레인저들은 화살과 창칼로 쓰러진 우르카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다시 동굴 입구를 향해 전력을 집중시켰다.
“이런, 너무 많이 들어왔다.”
“그렌 님!”
“그리스!”
필립 중위가 제니퍼를 향해 소리치자 제니퍼가 그렌을 쳐다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렌은 미리 약속을 한 대로 그리스 마법을 발동했다.
쿵, 꽈당, 꽈다당, 쿠쿵!
꾸엑, 꾸억, 컥, 케엑…….
순간적으로 매끈한 동굴 바닥의 마찰계수가 0이 됐다.
우르카이 십여 마리가 그대로 넘어져 돌로 된 바닥에 엉덩이와 허리를 찧었다.
놀람과 고통에 찬 비명이 들리자 마법이 성공한 것을 깨달은 용병들이 거칠게 방패를 앞으로 밀어붙였다.
레인저들도 이에 질세라 빠르게 속사로 화살의 비를 쏟아부었다.
순식간에 십여 마리가 화살과 창칼에 당해 동굴 바닥을 박박 긁어댔다.
결국 우르카이들은 다시 동굴 입구로 밀려나고 말았다.
동굴 안의 상황이 마무리되자 레인저와 용병들이 일제히 동굴 입구 쪽으로 몰려나왔다.
바위로 된 언덕 위에 있는 이 동굴은 입구가 길고 좁았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넓어지는 구조라 방어하는 입장인 인간들에게 조금은 더 유리한 지형이었다.
쿠와아아아아아!
동굴 밖에서 우르카이 한 놈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동굴 안으로 어떻게든 밀고 들어가려던 우르카이들의 동작이 딱 멈췄다.
놈들은 그대로 몸을 뒤로 돌려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방금 전, 우르카이 한 놈이 소리를 지른 게 후퇴 명령이었던 모양이다.
“모두 속사!”
필립 중위가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레인저들은 즉시 손가락이 부러져라 시위를 당겼다.
정말 미친 듯이 활을 쏴댔다.
피피피피핑! 피피피피핑! 피피피피핑!
순식간에 다시 십여 마리의 우르카이들이 목과 등에 화살을 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방패를 든 용병들은 그 모습에 일제히 동굴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곤 쓰러져 있는 우르카이들의 목과 얼굴에 마구 창칼을 쑤셔 박았다.
“방패병! 전면 방어!”
“전면 방어!”
제니퍼가 뒤에서 소리치자 우르카이들을 죽이기에 여념이 없던 용병들이 즉시 정신을 차렸다.
지금 다 죽어가는 우르카이를 죽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동굴 입구 앞쪽으로 달려가 나란히 방패를 세우고 방어선을 만들었다.
방패를 든 용병들의 뒤로 레인저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우르카이들의 멱을 따버리고 깨끗하게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