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5
5화
그동안 자신과 가족이 당한 일들이 머릿속에서 하나둘씩 떠오르자, 뇌가 익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분노가 해모수의 안에서 활활 타올랐다.
두 눈에서 살벌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두 주먹은 아예 새파랗게 변할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호리호리한 체형과는 달리… 방망이만 한 묵직한 놈이 사타구니 사이에서 덜렁거린다.
차가운 바람이 다시 한번 그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불알이 쪼그라지며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났다.
이대로 계속 체온을 뺏기면 복수를 해보기도 전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것이다.
저체온증!
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지?
해모수는 의문을 잠깐 옆으로 제쳐놓고 주변을 살폈다.
여기저기 무덤이 파이고 주변에 염을 한 송장들이 간간이 보였다.
다 낡아빠진 옷과 다 떨어진 짚신을 신고 있는 시체들.
시체 구덩이로 들어가기 위해 나란히 땅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그중에서 그나마 입을 만한 옷가지를 걸친 시체를 찾아 옷을 벗겨냈다.
간신히 신을 만한 짚신도 찾아 벗겨 신었다.
감사의 인사로 극락왕생을 빌어준 해모수!
그는 본격적으로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휘영청 달이 떠올라 그의 앞길을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잠시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곧 무표정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갔다.
구곡양장(九曲羊腸).
양의 창자처럼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목적지는 동쪽 끝에 있는 이름 없는 바닷가 마을.
바로 자신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이다.
공동묘지를 나와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
몸에서 후끈한 열기가 나오고, 등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마의 땀을 팔소매로 닦고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채 걸음을 옮겼다.
길을 잘못 들었나?
지금쯤이면 도착할 때가 됐는데…….
어두운 밤길이라 지금 자신이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오랜만에 가는 길이라 이 길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바다의 내음이 느껴졌다.
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해모수는 길에서 벗어나 언덕 위로 정신없이 뛰어서 올라갔다.
언덕 꼭대기에서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멀리 바다가 보였다.
그리운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바닷가의 집.
눈에 힘을 주면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달려가는 그의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밤새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해모수는 생기가 충만했다.
허름하게 지어진 초가삼간의 모습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그의 눈에 물기가 촉촉이 차올랐다.
‘집에 돌아왔다.’
그렇다.
해모수는 5년 만에 드디어 정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엄마! 아버지!”
해모수는 그리운 마음에 살짝 옆으로 기울어져 가는 초가집을 향해 뛰어갔다.
방마다 문을 열어보고 뒤로 가서 창고 안을 확인했다.
심지어는 뒷간까지 가서 열어보았지만 집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부엌으로 가보니 아궁이에 불을 땐 흔적이 보였다.
다행히 이사를 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버지는 배 타고 고기 잡으러 나가셨겠지. 그럼 어머니는 어디 가셨지? 마을로 장 보러 가셨나?’
막내 여동생인 소영이라도 봤으면 좋으련만…….
조개를 캐러 나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밖에서 서성이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자로 누워서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 하고 눈을 감았다.
밤새 걸어서 그런지 눕자마자 수마(睡魔)가 몰려들었다.
잠시 후, 방 안에는 해모수의 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토러스 대륙, 카시오페라 왕국, 이튼 영지.
눈을 깜빡이자 나갔던 정신이 빠르게 돌아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자 익숙한 천장이 눈에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음을 깨달았다.
두 손으로 차가운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몸이 그 어느 때보다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렌은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세밀하게 살폈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그는 조금도 흥분하거나 놀라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면밀히 관찰했다.
현재 위치는 자신의 방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직 파악이 되지 않는다.
다만 바닥에 피 모래가 언뜻 보이고 로브 한 벌이 놓여있다.
그 옆에는 모든 일의 원흉인 고대 마법서가 보인다.
그때부터 그렌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황금빛 피라미드가 기억나고…….
마루와 해모수도 생각났다.
‘정녕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건가?’
그렌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만져봤다.
트웨인의 단검이 그의 로브를 뚫고 살짝 걸려있었다.
단검을 잡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로브와 셔츠를 한꺼번에 벗었다.
한쪽 벽에 걸린 거울을 향해 걸어갔다.
가슴을 살펴보자 절로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멀쩡하다. 단도에 피가 묻어있는 걸 보면 꿈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 내 가슴에는 작은 흉터조차 찾을 수가 없다. 어떻게 된 거지? 황금 피라미드가 리제너레이션과 리커버리 마법을 내 몸에 동시에 걸어주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렌은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몸을 날카롭게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그는 두 가지 더 큰 변화를 찾아냈다.
‘내 몸이 변했다. 키는 크지만 비쩍 마른 몸매에 허리까지 굽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몸에 잔근육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어. 온갖 실험으로 손발에 난 화상과 흉터도 싹 다 사라지고 없다. 고위 서클로 올라가면 일어난다는 보디 체인지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그렌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위로 올라갔다.
이건 아주, 굉장히 긍정적인 변화다.
물론 마탑을 지키는 기사들처럼 울퉁불퉁한 근육이 갑옷처럼 덮여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보기 좋게 딱 벌어진 어깨에, 가슴근육과 팔근육이 적당히 튀어나온 것을 보자 잃어버린 사나이의 야성을 되찾은 것처럼 기쁘기만 하다.
헐렁한 바지를 벗어 던졌다.
탄탄한 허벅지가 보이고 사타구니 사이에는 당당한 그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주인을 잘못 만나 한 번도 제대로 써먹어 본 적은 없다.
그래도 작은 것보다는 큰 게 좋다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렌은 거울을 보면서 몸을 뒤틀어 등을 살펴봤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렸을 적에 불에 덴 징그러운 화상 자국까지 깨끗하게 지워져 있다.
확실히 자신의 몸은 어떤 계기로 인해 변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보디 체인지에 비견되는 최적의 상태로 몸이 저절로 바뀌었다.
그것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양쪽 쇄골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곳! 목 아래쪽 흉골병이 시작되는 곳에, 문신처럼 새겨진 피라미드 문양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내 피라미드 목걸이가 사라진 대신 문신이 남은 건가?’
손가락으로 피라미드 문신을 만져봤다.
아무것도 손가락에 걸리지 않고 매끈한 살결만 느껴졌다.
길게 심호흡을 한번 한 그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몸이 건강하다 못해 건장해지니… 이제는 없던 자신감까지 불끈 치솟는다.
이미 한번 죽었던 몸이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일지 모른다.
아쉬울 것도 없고 이젠 안타까울 것조차 없다.
죽다 살아나니, 아니 죽었다가 살아나니… 그동안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중압감과 스트레스가 싹 사라진 것만 같다.
뭔가 자신의 한계를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막이 부서져 나간 느낌이었다.
“이제는 나도 진짜 마법사처럼 살아야지.”
그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잘 닫고 고리를 건 후 자물쇠를 단단히 채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문을 보면…….
확실히 자신의 사회성에는 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응접실 겸 연구실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쪽에 보이는 작은 욕실로 들어간 그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보디 체인지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자신의 몸에는 피와 먼지가 묻어있었다.
그는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몇 번이나 정성껏 몸을 씻고 또 씻었다.
샤워를 마치자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욕실 밖으로 나와 새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새 셔츠와 바지를 꺼내 입었다.
아끼던 로브까지 몸에 걸쳤다.
방 밖으로 나온 그렌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 현장을 세밀하게 살펴봤다.
응접실 겸 연구실로 사용하는 공간.
그곳에는 트웨인이 죽음의 모래에 녹아 죽은 흔적이 보였다.
그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장갑을 꺼내 끼고 트웨인의 로브를 살짝 들어 올렸다.
죽음의 모래에 녹은 몸의 잔해가 아직도 여기저기에 조금씩 남아있었다.
그렌은 로브를 한쪽으로 치웠다.
수정으로 만든 작은 삽으로 죽음의 모래를 조금 퍼 담았다.
수정 삽을 트웨인의 잔해 위로 가져간 그는 조금씩 아래로 쏟아부었다.
그러자 죽음의 모래와 닿은 남은 트웨인의 몸의 잔해가 맹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치이이이익!
죽음의 모래는 돌바닥까지 녹일 기세로 트웨인의 잔해를 녹여버렸다.
잔해를 싹 없애고 나자 죽음의 모래는 서서히 잠잠해져 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죽음의 모래는 마탑의 아이템 보관소에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
마탑에서 취급 인가가 잘 나지 않는, 극독을 가진 물질이다.
반납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당장 절도죄로 마탑 집행부에 소환되고 말 것이다.
다행히 그렌은 죽음의 모래를 몇 번이나 연구할 기회가 있다.
그래서 따로 정제하는 법도 잘 알고 있었다.
트웨인의 몸을 녹인 잔재를 깨끗이 제거한 후 돌려주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전에 그렌은 자신의 방 안부터 청소했다.
세심한 손길로 트웨인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나갔다.
트웨인의 로브와 신발을 수거했다.
피와 살점은 죽음의 모래로 계속 녹여서 흔적을 없앴다.
마침내 만족할 만큼 깨끗하게 흔적이 제거되자…….
그는 솔과 받침을 가져와서 바닥에 떨어진 죽음의 모래를 모조리 쓸어 담았다.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수거했다.
그는 시험관 안에 죽음의 모래를 담았다.
그러곤 곧 불순물을 제거하는 정제 작업에 들어갔다.
정제수와 마법 시약 몇 개를 조합해서 같아 넣었다.
그런 후에야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휴우우!”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렌은 트웨인의 로브를 뒤져봤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진짜 아무것도 없는 걸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로브를 꼼꼼히 살펴봤다.
아니나 다를까?
로브의 안쪽 안감 사이에 은밀한 주머니가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렌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가위와 칼을 가져와 조심스럽게 주머니의 실을 한 올 한 올 풀어냈다.
주머니를 떼어내는 데 성공하자 그렌은 미련 없이 트웨인의 로브를 실험실 화로(火爐)에 밀어 넣었다.
놈이 신었던 신발도 한번 살펴보고 역시 화로 속에 던져 태워버렸다.
잠시 불타는 화로 속을 쳐다보던 그렌은 몸을 돌렸다.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온 그는 떼어낸 주머니를 살펴봤다.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안으로 집어넣었다.
안에서 돈주머니 같은 것이 잡혔다.
손가락 끝으로 살살 잡아당기자 마침내 하얀 가죽 주머니가 딸려 나왔다.
그렌은 망설이지 않고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열었다.
그리고 손을 집어넣자…….
놀랍게도 팔이 거의 어깨 깊이까지 안으로 쑥 들어갔다.
“빙고!”
그렌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얀 가죽 주머니는 트웨인이 애지중지하던 마법 주머니였다.
공간 확장 마법진과 무게 감소 마법진이 새겨진 마법 주머니!
용량은 짐마차 한 대에 불과하지만…….
이런 마법 아이템이야말로 마법사에게 완전히 소중한 아티팩트다.
그렌도 예전부터 꼭 하나 가지고 싶었던 물건이다.
하지만 마법 주머니는 1서클의 견습 마법사가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일단 가격이 겁나게 비쌌다.
또한 돈이 있다고 해도 매물 자체가 거의 없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렌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아니 한번 죽였던 트웨인의 모든 것이 담긴 마법 주머니를 공짜로 얻었다.
‘어디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살펴볼까?’
마법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양한 물건들이 마치 눈앞에 보이듯 떠올랐다.
하급 마법서, 최하급 마나석 가루, 각종 최하급 포션과 해독제, 각종 마법 시약, 낡은 고서(古書), 옷 가방, 빵 자루, 물병, 돈주머니…….
트웨인의 마법 주머니는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