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51
51화
와글와글…….
바글바글…….
시끌벅적…….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대망 슈퍼로 손님들이 마구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
잠시 전화를 하느라 안채로 들어갔던 이대근은 슈퍼 앞에 바글거리는 손님들을 보고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마루야,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나중에 설명드릴 테니 일단은 좀 도와주세요. 저 혼자 모두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알았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대근은 마루의 말에 즉시 입가에 함지박 미소를 그리며 숙련된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누가 슈퍼 주인 아니라고 할까 봐 이대근은 빠르고 정확하게 손님들이 원하는 물건들을 척척 가져왔다.
그렇게 손님들의 발걸음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끊일 줄 몰랐다.
그리고 각종 식료품을 싣고 오는 트럭들도 줄지어 밀려들었다.
저녁도 못 먹고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마루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이대근과 남동생 재용까지 불러다 같이 트럭을 타고 온 동네를 돌았다.
손님들이 주문한 물건을 밤늦게까지 일일이 배달하고 나자 그들은 파김치가 되었다.
“어휴, 이제야 겨우 끝났네.”
“형, 수고했어.”
“마루야, 수고했다.”
이대근은 트럭을 집 옆에 세워두고 마루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재용도 온몸이 땀으로 젖은 마루를 향해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세 남자가 안채로 들어가자 김영희가 달려 나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마루의 얼굴을 감쌌다.
“마루야,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저녁을 거르면 어떻게 하니. 어서 빨리 씻고 나와라. 식탁에 밥 차려놨다.”
“네, 들어가서 총알같이 씻고 나올게요.”
마루는 옥탑방으로 번개처럼 뛰어 올라갔다.
속옷과 트레이닝복을 꺼내고 1층 욕실로 들어갔다.
땀에 젖은 옷을 벗어 빨래 통에 넣고 샤워기를 틀었다.
그는 초스피드로 샴푸와 린스를 하고 보디 워시로 거품을 내어 온몸을 문질렀다.
뜨거운 물로 거품을 씻어 내리고 샤워를 마쳤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는 속옷과 트레이닝복을 입자마자 부엌으로 뛰어 내려갔다.
“딱 5분 걸렸네.”
“그래요? 난 3분쯤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어서 밥 먹어라.”
“네, 잘 먹겠습니다.”
돼지고기를 쑹덩쑹덩 썰어 넣고 팔팔 끓인 김치찌개!
식탁에는 자극적인 냄새로 무장한 김치찌개가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마루는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을 수저로 푹푹 떠서 먹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구르는 밥알과 김치찌개의 얼큰한 맛이 조화를 이루자 머릿속에서 맛의 폭죽이 터져 나왔다.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다.
역시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난 후 밥을 먹어야 꿀맛처럼 느끼는 모양이다.
마루는 밥 두 공기로 냄비 안에 들어있는 김치찌개를 국물까지 깡그리 싹싹 비벼 먹는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대근과 재용까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김영희는 얼마나 마루가 배가 고팠으면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저렇게 미친 듯이 먹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옆에 앉아 디저트를 준비했다.
열심히 과일을 깎자 금세 접시에 소담스럽게 과일 조각이 장식됐다.
“우와, 다 먹었다.”
“디저트로 과일 좀 먹어. 그리고 누가 안 쫓아오니까 이젠 숨 좀 쉬고 얘기도 해가면서 천천히 먹으렴.”
“네, 마님.”
그제야 마루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돌았다.
유머 감각이 돌아온 것은 덤이다.
“아니, 그렇게 배가 고팠으면 슈퍼 안에 있는 빵이나 우유라도 좀 먹으면서 일하지!”
“헤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내일부터는 확실하게 밥 잘 챙겨 먹을게요.”
김영희의 타박 어린 말에 마루가 송구한 표정을 지었다.
“형, 임시로 아르바이트 학생이라도 한 명 구해서 써야 하는 거 아냐? 아까 보니까 엄청 바쁘던데.”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으음, 그건 좀 생각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람 구했다가 다시 한가해지면 내보내기도 곤란하잖아요?”
“그런가? 그럼 며칠 더 두고 볼까?”
“여보! 당장 내일 일할 사람 구하세요. 이러다 귀한 내 아들 잡겠어요.”
“응, 그럴게.”
집에서는 김영희의 말이 곧 법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이렇게 증명됐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이대근은 얼른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채에서 식사를 준비하다 잠깐 슈퍼로 나와서 봤는데…….
사실 이건 도저히 남편과 마루 둘이서 감당할 일이 아니었다.
물론 재용이 도와주긴 했지만, 그건 학교 갔다가 돌아와서 잠깐 도와주는 정도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학교를 보내지 않고 슈퍼에서 일이나 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결국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렌: 내 생각에도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게 좋겠어. 아무리 마루의 체력이 좋아졌다고 해도 이런 식이면 며칠 못 가서 탈진하기 십상이야.] [해모수: 마루 형, 나도 그렌 아저씨와 같은 생각이에요. 오늘 슈퍼가 너무 바빠서 체육관에 가서 운동도 못 했잖아요. 돈 아끼는 것도 좋지만 형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걸 모르세요?] [마루: 알겠어요. 그렌 형과 해모수의 말대로 할게요. 사실 오늘처럼 바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렌: 난 앞으로 슈퍼가 더 바빠질 것 같은데…….] [마루: 아마 그렇겠죠.] [해모수: 당연한 말씀!]그렌과 해모수의 말을 들으며 마루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봤다.
정말 매일 손님이 이 정도로 몰린다면…….
일할 사람 한 명을 더 구한다고 해도 부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망 슈퍼가 동네 슈퍼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결국 이런 현상은 일시적인 것으로 봐야 했다.
행정구역상의 문원동 인구는 2,733세대 7,174명이다.
대망 슈퍼가 위치한 문원로를 통해 들어오는 이 동네의 인구만 따져보면 1,500여 명에 불과하다.
거기에다 이곳엔 대망 슈퍼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북쪽에 작지 않은 마트가 하나 더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종말 대세일로 필요한 생필품을 다 구매하고 나면 더 이상 매출을 올리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니 대망 슈퍼에서 임시로라도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최대 한 명이다.
일할 사람은 이대근이 내일 아침 일찍 인터넷을 통해 구해보기로 했다.
옥탑방에 돌아온 마루는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자정이 넘었다.
그는 소화도 시킬 겸,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지 못한 찝찝한 마음도 털어낼 겸 밖으로 나가서 마이티 포스 연공법을 수련하기로 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하는 좌공(坐功)이 아니다.
몸을 움직이면서 하는 동공(動功)이라 지금 자신의 상황에 딱 맞았다.
어두운 하늘에 휘영청 달님이 걸렸다.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옥탑방 밖으로 나온 마루!
그는 달빛을 의지해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작마다 정확한 수인(手印)을 맺고 호흡을 맞춰나갔다.
점차 온몸에 활력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자 고갈된 체력이 채워지고 온몸을 뻐근하게 만드는 근육통도 사라진다.
정신은 또렷해지고 몸은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마이티 포스 연공법은 마루에게 몸을 회복시켜 주는 마법의 포션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가 하는 행동을 누가 지켜봤더라면 아마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는 짓이 딱 달밤에 체조를 하는 미친놈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밤이 새도록 이슬을 맞으며 열심을 내는 중증(重症)의 광인(狂人)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마이티 포스 연공법의 효과를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는 마루에게는 외부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수련이 조금도 지루하거나 질리지 않고 재밌었다.
그는 점차 마이티 포스 연공법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달빛 부서지는 하룻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띠리리링 띠리리링!
“여보세요?”
―형, 저예요.
“아침부터 누구냐?”
―저 소신이예요. 한소신.
마루는 한소신이란 말에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시간부터 확인했다.
아침 여덟 시.
늦게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집에서 동네 슈퍼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빨리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아버지는 벌써 일어나 슈퍼 앞과 옆 골목 등을 빗자루로 싹싹 쓸고 계실 것이다.
―제가 너무 일찍 전화했나요?
“아냐. 괜찮아. 어제 저녁에 내가 너무 늦게 잠을 잤나 봐.”
―아! 그러셨구나. 야동 너무 많이 보지 마세요. 뼈 삭아요.
“에잇! 그런 거 아니거든.”
한소신의 말에 마루가 반사적으로 강하게 반응했다.
마이티 포스 연공법을 익히자 확실히 정력까지 좋아졌다.
매일 아침마다 큼지막하게 텐트를 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매일 밤, 야동이나 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짓 따윈 결코 하지 않았다.
당장 종말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 대한 준비를 하느라 요새 정신없이 바빴다.
거기에다 대망 슈퍼의 일까지 겹쳐 아예 그런 쪽으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고 청춘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마루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가끔 김민정과 서진아가 생각이 날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마루는 더욱 열심히 마이티 포스 연공법을 수련했다.
마치 자신의 몸을 혹사하듯 단련하는 쪽으로 정신을 돌린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어제부터 우리 헬 서바이벌 동호회 홈페이지를 통해 서바이벌 키트와 좀비 퇴치 키트 판매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당연히 그에 대한 결과를 보고드리려고 전화했지요.
한소신의 목소리는 잔뜩 흥분한 것 같았다.
아니 뭔가 간신히 억제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불안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나쁜 소식을 전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보고해 봐.”
―놀라지 마세요.
“일단 보고부터 해봐.”
―크흐흐, 알았어요. 어제는 서바이벌 키트가 30개, 좀비 퇴치 키트가 10개나 팔렸어요.
“시작은 나쁘지 않네.”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그럼 뭐가 또 있어?”
―아침에 일어나 확인을 해보니 밤사이에 서바이벌 키트가 25개, 좀비 퇴치 키트가 12개나 더 팔려있었어요.
“그럼 하루 만에 서바이벌 키트가 55개, 좀비 퇴치 키트가 22개나 팔렸단 말이야?”
―네, 맞아요. 마루 형! 아무래도 이거 대박 조짐이 보입니다. 판매를 더 확대해야겠어요.
“어떻게?”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들에게 서바이벌 키트와 좀비 퇴치 키트를 각각 하나씩 선물하고 인터넷을 통해 광고 좀 해달라고 부탁해야지요.
마루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손해날 게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해봐.”
―정말요? 숫자가 좀 되는데 괜찮아요?
“얼마나? 그리고 친구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데?”
―좀 다양해요. 게임하는 놈도 있고, 마니아도 있고, 은둔형 외톨이도 있고, 해커도 있고, 파워 블로거도 있고, 방송을 하는 녀석도 있고……. 한 오십 명쯤 돼요. 제가 나름 발이 좀 넓거든요.
“오십 명이나?”
한소신이 친구라고 말하는 부류가 어째 하나같이 정상적인 사람들의 범주를 넘어선 것 같았다.
하지만 마루가 서바이벌 키트와 좀비 키트를 파는 목적은 영리가 아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소외받는 계층이라고 해서, 그들의 목숨이 가볍거나 하찮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생명은 귀하고 소중하고 또 존엄한 것이다.
―너무 많나요? 좀 줄일까요?
“아니야. 그거 받고 광고를 해준다면 우리도 손해나는 거는 아니니까 괜찮아. 100개까지 허락해 줄 테니까 한번 마음껏 마케팅해 봐.”
―정말이죠?
“응, 정말이야.”
―그런데 우리 홈피를 통해 팔 물건은 충분히 확보했어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 얼마든지 물건은 공급할 수 있으니까.”
한소신은 마루의 자신 있는 말에 한껏 고무됐다.
그동안 한 번도 친구들에게 제대로 자신의 능력을 어필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돈도 벌고 마케팅도 하면서 그들에게 이번 일의 취지를 알리면 아마 자신에 대한 평가도 많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우성존은 뭐 하니?”
―형도 나름 바쁘게 뛰고 있어요. 유명 포털 사이트에서 일하는 친구한테 광고 부탁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알겠다. 그럼 계속 수고 좀 해줘.”
―네, 이쪽은 걱정 붙들어 매세요.
“하하하, 알겠다. 가급적이면 주 단위로 정산해 줄 테니까 조금만 참자.”
―왜 월 단위로 정산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원래 눈앞에 돈다발이 떨어져야 더욱 열심히 일할 의욕이 생기는 법이거든.”
―크크크, 그 말은 맞아요.
한소신은 마루의 말에 절대 공감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월 단위로 정산하면 그와 우성존은 마루에게 단 한 푼도 정산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루는 하루라도 빨리 한소신과 우성존의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고 싶었다.
꼭 생존에 필요한 물건과 장비를 사서 종말에 대비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