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54
54화
김민정은 점심으로 스파게티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루의 의견을 존중해 절충안을 제시했다.
“한정식 어때요?”
“좋습니다.”
“그럼 우리 반찬 많이 주는 집으로 가요.”
“네.”
마루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위로 올라갔다.
김민정이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정해지자 그녀는 차를 아주 빠르고 다이내믹하게 몰았다.
마치 스릴을 즐기려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로 인해 마루는 얼른 안전벨트를 매고 손잡이를 부러질 정도로 꽉 잡아야 했다.
김민정의 탄력 있고 늘씬한 새하얀 다리가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페달) 사이를 곡예를 하듯 신나게 넘나들고 있었다.
* * *
“여긴?”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에요. 들어가요.”
김민정이 차를 세운 곳은 문원 체육공원 근처에 있는 호젓한 한정식집이었다.
바로 앞에 문원로가 보였다.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마루가 사는 동네가 나온다.
쉽게 말해 김민정은 마루가 살고 있는 동네 입구에 있는 한정식 식당으로 온 것이다.
“방으로 들어가시겠어요? 아니면 홀에서 식사하시겠어요?”
“방으로 주세요.”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김민정은 마루에게 묻지도 않고 밀폐된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마루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둘이서 오붓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네 명이 앉을 수 있게 만들어진 아늑한 실내의 인테리어가 참으로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한쪽 벽이 통유리로 되어있어 밖의 경치를 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다.
무척 운치가 있는 곳이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식사는?”
“한정식으로 주세요.”
“네.”
종업원이 미처 다 물어보기도 전에 김민정은 한정식을 주문했다.
한정식을 먹으러 왔으니 당연히 한정식으로 달라고 했다.
그러나 방에서 한정식을 달라는 의미는 코스 요리를 뜻하는 말이다.
마루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이곳에 이런 식당이 있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으니 알 턱이 없는 게 당연했다.
“여긴 자주 오는 곳인가요?”
“아니요. 가끔 식구들과 같이 와서 한정식 먹는 곳이에요.”
“유명한 곳인가 봐요?”
“과천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봐야죠. 마루 씨는 처음 오셨죠?”
“네, 이 근처에 살면서 한 번도 와보질 못했네요.”
“그래요? 어디 사시는데요?”
“문원로 타고 안으로 쭉 들어가면 제가 사는 동네가 나와요.”
“어머, 정말이세요? 저희 집도 거긴데…….”
“네에? 진짜요?”
“네. 진짜예요.”
마루와 김민정은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우리 이웃사촌이었네요.”
“정말 그러네요.”
두 사람은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마루 씨, 군대는 다녀오셨어요?”
“네,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습니다.”
“그럼 지금 뭐 하시는지 물어봐도 돼요?”
“물론이죠. 하지만 제가 특별히 해드릴 얘기는 없는 것 같아요. 졸업하고 지금까지 아직도 취업에 성공을 못했으니 말입니다.”
마루는 김민정의 질문에 솔직히 대답했다.
하지만 당당하게 대기업, 아니 중소기업에라도 취업에 성공했다는 얘기를 하지 못해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김민정은 마루의 대답에 흠칫 놀라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래도 매일 놀고먹는 백수는 아닙니다. 집에서 슈퍼, 아니 마트를 하고 있어서 도와드리고 있어요.”
“마트요? 이 동네에 마트는 우리 집과 대망 슈퍼밖에 없는데?”
마루는 슈퍼보다는 마트라는 말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대망 슈퍼를 마트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김민정은 이 동네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정확히 대망 슈퍼라는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대망 슈퍼가 바로 저희 집에서 하는 마트예요. 가만, 그런데 우리 집이라뇨? 혹시 민정 씨 집에서도 마트를 한단 말인가요?”
“네, 부모님이 동네에서 마트를 운영하고 계세요.”
“설마 그 마트 이름이 문일 마트는 아니겠죠?”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김민정도 놀랐지만 마루도 꽤나 놀랐다.
동네 슈퍼라서 대망 슈퍼의 경쟁자는 문일 마트가 유일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문일 마트가 대망 슈퍼보다는 훨씬 규모가 더 컸다.
식사가 나오자 두 사람은 얌전히 먹기 시작했다.
서로 놀라서 잠시 식사를 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김민정이 학교 얘기를 했다.
“언제부터 과천에 사셨어요?”
“꽤 오래됐어요. 민정 씨도 과천에 오래 살았나요?”
“네, 거의 토박이나 다름없어요. 전 과천 초등학교, 과천 중학교를 나왔어요.”
“나도 과천 초등학교, 과천 중학교를 나왔는데……. 이거 알고 보니까 동문이네요.”
“정말 그러네요. 혹시 고등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설마 과천 고등학교는 아니겠죠?”
“아니에요. 전 과천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왔어요.”
“네에? 저도 거기 나왔는데…….”
이제는 두 사람 모두 하던 식사를 멈추고 놀라야 했다.
“민정 씨, 실례지만 나이를 물어봐도 될까요? 먼저 저는 올해 스물여섯 살입니다.”
“전 스물네 살이에요. 선배님.”
김민정은 아예 호칭을 마루 씨에서 선배님으로 바꿨다.
“가만 김민정, 김민정……. 이제 보니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이네요. 내가 3학년 올라갈 때 태권도를 잘하는 엄청 예쁜 신입생이 하나 들어왔다고 했는데……. 혹시 민정 씨가 바로 그 태권소녀 아라치 아니에요?”
“헐! 아직도 그 별명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김민정은 그 별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인상을 팍 썼다.
그러나 인상을 쓰고 있는 그 표정조차도 마루에게는 예뻐 보였다.
“에잉, 맞아요. 제가 예전에 학교 다닐 때 바로 그 별명으로 불리곤 했어요.”
“아! 역시 그랬군요.”
김민정은 마루를 쳐다보더니 괜히 뭔가 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선배님, 이제 호구조사 다 끝났는데 그만 말 편하게 놓으시죠?”
“그,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하나도 아니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리 12년 동안을 같은 학교에 다닌 선배님이시잖아요.”
김민정은 예의를 아는, 아니 매너 있는 미녀였다.
“그럼 편하게 말 놓을게. 그리고 나도 부탁이 있는데…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오빠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그, 그건…….”
서로 몰랐을 때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김민정 말대로 이미 호구조사가 다 끝난 상황이라 마루는 그녀를 대하는 게 아주 편해졌다.
그래서 살짝 무리라고도 할 수 있는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하지만 김민정은 선뜻 오빠라고 부르기가 조금 불편했다.
아직 서로가 그 정도로 가깝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아님 앞으로 아라치라고 부를까?”
“큭, 너무해요.”
이젠 더 이상 부탁이 아니었다.
마루는 김민정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었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별명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마루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 합의 본 거지?”
“네.”
결국 김민정은 마루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낫지 그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정말 싫었다.
“뒷말은 금세 잊어버렸나 봐?”
“오, 오빠!”
“크흐흐흐.”
마루는 김민정과의 싸움에서 마치 승자라도 된 듯 웃음을 흘렸다.
알고 보면 호칭 하나 바꾸는, 사실 별거 아닌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호칭 하나에도 서로 느끼는 감정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한국어는 더욱 그렇다.
같은 동네에 살고, 부모님이 같은 업종에 종사하시고, 거기에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내리 같은 학교를 다닌 선후배 사이!
이렇게 많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게 밝혀지자 김민정과 마루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아니 남자들은 왜 그렇게 오빠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해요?”
“그건 우리나라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로망 같은 거야.”
“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아요.”
“뭐 생각하기에 따라선 이해 못 할 수도 있겠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식사를 즐겼다.
그러다가 대학 얘기가 나왔다.
마루는 자신이 지방대를 졸업했다는 것을 얘기했다.
김민정은 예상했던 대로, 인서울(in Seoul) 대학을 나온 것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명문대를 졸업했다.
그녀는 마루가 지방대를 나와 취업이 잘 안 됐다는 얘기를 듣고는 두 번 다시 대학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서로가 공통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요즘 마루 오빠의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고 다들 난리예요.”
“트레이너들이 그래?”
“네. 처음에는 좀 건방진 것 아니냐는 분위기였는데, 하도 열심히 하니까 이제는 인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어요.”
“하하하, 다행이네.”
마루가 환하게 웃자 김민정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실 별거 없어 보이는 마루와 이렇게 점심을 같이하고 있는 것은… 그의 부단한 노력과 빠른 실력 향상으로 인해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일단 시작하면 세 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가까운 운동을 끝까지 버티는 마루의 놀라운 체력에 반해버렸다.
“마루 오빠는 왜 그렇게 열심히 운동하세요?”
“그거야 끝까지 잘 살아남으려고 그러지.”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마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놨던 것이다.
‘내가 너무 마음이 풀어져 있었나? 어떻게 여기서 그 얘기가 나오지? 이거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루는 마음속으로 빡세게 고민했다.
그러다 민정의 호기심 어린 아름다운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의 방어기제가 스르르 풀려버리고 말았다.
“먼저 내 얘기를 듣고 비웃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아니에요. 약속할게요.”
김민정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급히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루의 얼굴이 전에 없이 진지하게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만약 민정이 네가 한 달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
“네에?”
“쉽게 말해서 한 달 뒤 미래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말이야. 그것도 자신과 가족의 생명이 위협받는 아주 안 좋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너는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으음, 아마 절대로 가만히 있지 못하겠죠. 어떻게든 그 상황을 바꾸거나 극복해 보려고 노력할 거예요.”
김민정의 대답에 마루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게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야.”
“네? 그럼 오빠는 한 달 뒤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요?”
“응. 정확히 말하면 과천 종합 격투기 체육관에 등록하고 나서부터 딱 한 달 뒤의 미래지.”
“그럼 앞으로 2주가 조금 넘게 남았네요!”
“맞아.”
김민정은 날카로운 눈으로 마루를 쳐다봤다.
‘지금 이 사람이 나를 놀리는 건가? 그냥 일어나서 나가버릴까?’
갑자기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에 그녀는 살짝 갈등했다.
“혹시 오빠 무슨 정신 질환 앓고 있는 것은 아니죠?”
“뭐? 내가 정신병자냐고? 푸하하하…….”
마루는 김민정의 반응에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사실 이게 일반 사람들의 정상적인 반응이긴 했다.
그 어떤 사람도 미래를 알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대부분 이런 식의 반응, 아니 이보다 더한 반응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마루는 김민정의 눈빛이 수시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도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만약 내 말을 못 믿겠거든 우리 그냥 오붓하게 점심 식사 한 번 한 것으로 끝내자. 이 식당을 나갈 때는 서로 웃으면서 각자 갈 길로 가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끝까지 앉아서 내가 어떻게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알게 됐는지 한번 들어봐! 어떻게 할래?”
“으음, 그냥 이대로 일어선다면 난 분명히 후회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요. 호기심 때문이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끝까지 얘기를 들어볼래요.”
“좋아. 그럼 내 허락 없이 절대 이 얘기를 남에게 해서는 안 돼. 알았지?”
“네, 알겠어요.”
김민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루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기대와 호기심으로 마구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루는 천천히 미리 생각해 놓은 스토리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김민정은 그의 얘기를 듣는 내내 감탄을 터트리며 놀라워했다.
“세상에, 그러니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매일 꿈에 나타나서 경고를 해주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여줬단 말이잖아요!”
“그렇지. 처음에는 나도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하지만 매일 똑같은 꿈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계속 꿔대니까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