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55
55화
“정말 오빠는 그 꿈, 아니 예지몽(豫知夢)을 확신해요?”
“예지몽?”
“네, 그런 꿈을 예지몽이라고 하잖아요?”
“예지몽이든 뭐든 난 내가 본 꿈속의 미래가 반드시 현실로 일어날 거라고 확신해.”
마루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 서슬 시퍼런 단호함에 김민정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가만, 오빠의 예지몽대로라면 결국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이잖아요!”
“멸망까지는 아니야. 굳이 표현한다면 종말을 맞는다고 봐야지.”
“그 말이 그 말 아니에요?”
“아니지. 멸망은 지구에 사는 모든 인류가 죽는다는 말이고, 내가 본 예지몽에선 파이럿 혜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현대 과학 문명이 붕괴되어 18세기 이전으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엄연히 인류는 생존했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믿고 싶지는 않겠지만 이게 곧 일어날 미래, 아니 현실이야.”
김민정은 목이 타는 것 같은 기분에 컵에 있는 물을 단숨에 꿀꺽 마셔버렸다.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어?”
“아뇨.”
그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한 달, 아니 이제 2주 조금 더 넘게 남은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만천하에 드러날 얘기잖아요. 마루 오빠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2주 뒤에 들통날 거짓말로 내게 환심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마루는 순간 헷갈렸다.
김민정이 종말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면 그보다 자신이 그녀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중요한 것은 정말 종말이 오냐는 거야. 나는 지금도 내가 확신하고 있는 이 예지몽이 틀리길 바라고 있어. 그냥 나 하나 미친놈이 되는 것이 낫지, 전 인류가 종말을 맞는 것은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일이야.”
마루는 진심을 담아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다.
김민정은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마루가 진심을 얘기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러나 사안이 너무 중대했다.
아니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이미 도를 넘어선 스케일이었다.
그냥 그의 말을 외면하고 못 들은 척해버리고 싶었다.
편하게 지금처럼 계속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그녀의 심정이었다.
“내가 왜 오늘 너에게 이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내 예지몽에 대해 얘기한 사람은 지구상에 우리 부모님 말고는 민정이가 유일해.”
“네에? 이 얘기를 벌써 오빠 부모님한테 했다고요?”
“응, 다행히 내 말을 믿어주셔서 지금 같이 종말을 대비하고 있어.”
“어머! 세상에. 오빠네 부모님도 정상은……. 크흠, 보통은 아니시네요.”
김민정은 마루가 그의 부모님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는 데 놀랐다.
거기에다 예지몽에 대해 듣고서도 아들의 말을 믿고 같이 종말을 대비하고 계시다는 말에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민정이가 만약 내 상황이라면, 민정이의 부모님은 민정이의 말을 믿어줄까?”
“글쎄요. 아마 쉽게 믿지는 못하실 거예요.”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나를 믿고 계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린 적이 없거든. 비록 지방대를 졸업해서 그런지, 아직 취업도 못한 못난 아들이지만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나를 믿어주고 계셔.”
“생각해 보니까 내가 생각이 좀 짧았네요. 오빠 부모님들은 정말 대단하세요. 아니 존경할 만한 분들이세요. 자식을 그렇게까지 믿어주다니…….”
김민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 엄마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절대 믿어주실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고민에 휩싸이자 마루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정아, 내가 너한테 미친놈이라는 소리 들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이 얘기를 해준 것은 절대 네가 좀비에게 물려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야. 그러니까 오늘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봐.”
“네.”
김민정은 마루의 말을 듣자 뭔가 가슴이 찌르르하기도 하고 달콤해지기도 하고 짠한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당장 단답형으로 한 마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점심 식사는 그걸로 끝났다.
지금 김민정은 더 이상 무슨 얘기도 나눌 수 없는 상태였다.
계산대에 선 마루는 계산서의 가격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던 것이다.
‘헉, 이거 그냥 일반 한정식집이 아니었나 보구나. 한정식 코스 요리였나? 더럽게 비싸다.’
속으로 구시렁대면서도 겉으로는 별거 아닌 척 마루는 당당하게 직불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마쳤다.
김민정은 이 한정식 식당의 음식값이 비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식사비는 자신이 내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마루로부터 너무 엄청난 소리를 들은 탓에, 정신이 온통 딴 데 팔려있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종말이 일어난다면 당장 자신과 가족은 어떻게 될지, 뭘 해야 생존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느라 미처 자신이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했다.
다행히 마루는 그녀가 지금 무척 혼란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싼 식사비는 그냥 미녀와 점심을 먹은 대가 정도로 가볍게 치부하고 말았다.
“집으로 갈 거지?”
“네.”
“그럼 난 여기서 마을버스를 타고 갈게.”
“아니에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데 그냥 제 차 타고 가세요.”
마루는 민정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차를 탔다.
잠깐이라도 그녀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던 것이다.
부우우우우웅!
그녀의 미니 쿠퍼는 부드럽게 출발해서 문원로를 탔다.
문원청계1길을 타고 쭉 내려오다 좌회전을 하자 금방 대망 슈퍼가 눈에 들어왔다.
마루는 3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이 너무나 아쉬웠다.
끼익!
차가 서자 마루는 고개를 돌려 김민정을 쳐다봤다.
“고마워! 조심히 가.”
“오빠, 근데 저건 뭐예요?”
마루가 차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김민정은 하얗고 긴 손가락을 앞으로 쭉 뻗으며 플래카드를 가리켰다.
“아! 종말 대세일? 저건 내가 종말을 대비해서 사람들이 미리 식료품을 집에 사다 놓으라고 기획한 마케팅이야. 다행히 요새 사람들이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저렇게 열심히 사재기를 하네.”
김민정은 마루의 말에 도리질을 했다.
“아니요. 그거 말고요. 그 밑에 써져있는 거요.”
“뭐? 서바이벌 키트? 좀비 퇴치 키트?”
“좀비 퇴치 키트요.”
“종말을 일으키는 놈들이 좀비니까 당연히 그것에 대비해야지. 그래서 대량으로 싸게 맞췄어.”
그녀는 대망 슈퍼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마루가 부모님에게 종말에 대한 얘기를 했고, 같이 종말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대망 슈퍼 앞에 와보니 지금 그의 말이 결코 장난으로 했던 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문일 마트에서도 하지 않는 종말 대세일이라는 기획 세일을 통해 동네 사람들에게 식료품을 싸게 파는가 하면, 좀비를 대비한다고 좀비 퇴치 키트까지 팔고 있는 것을 보자 그녀는 놀라다 못해 그만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이거 나도 뭔가 해야 되는 거 아냐!’
마루네 집에서 운영하는 대망 슈퍼는 김민정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문일 마트의 유일한 경쟁자다.
이 시간대면 보통 한가해지는 것이 동네 마트의 일상.
그런데 그녀의 눈에 들어온 대망 슈퍼는 어째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김민정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이기도 했다.
“오빠,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요?”
“아까 내가 설명해 줬잖아.”
“설마 진짜 사람들이 불안해서 사재기를 하는 거예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는 사람도 있고, 싸게 파니까 미리 좀 사놓자는 심리도 있겠지.”
“그렇구나.”
마루는 김민정이 지금 아주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이 꽤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민정아, 아까 내가 말했던 진짜 종말이 온다면 당장 뭐가 필요할 것 같아?”
“그거야 당연히 식량과 식수죠.”
“맞아. 그럼 당장 뭐가 필요 없어질 것 같아?”
“그야… 뭐 돈과 보석, 학벌 등이겠네요.”
김민정은 마루가 하려는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맞아. 돈, 보석, 학벌, 명품, 예술품, 부동산… 이런 것들은 아마 앞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할 거야. 하지만 귀금속 중에는 종말에도 불구하고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있어.”
“그거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금을 말하는 거죠?”
“딩동댕! 맞아. 금이야. 은행에 들어있는 돈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가지고 다니는 현금도 휴지 조각이 될 거야. 내 말이 설사 틀린다고 해도 돈을 금괴로 바꿔놓는다면 그리 큰 손해는 보지 않을 거야. 아니 어쩌면 금으로 투자한 게 나중에 크게 이득으로 돌아올 수도 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은행에 있는 돈을 골드바로 바꿔서 현물로 보관하고 있으란 말이잖아요.”
“응, 나중에는……. 아마 미래에는 금이 진짜 화폐처럼 유통될지도 몰라.”
김민정은 당장 은행에 넣어둔 돈과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서 골드바로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부모님의 재산도 모조리 골드바로 바꿔서 지하 금고에 보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재테크에는 무지하신 분들이다.
앞으로는 금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그대로 따라주실 가능성이 높았다.
“잠깐만 기다려!”
“예.”
마루는 김민정의 애마인 미니 쿠퍼에서 내려 대망 슈퍼로 걸어갔다.
그는 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서바이벌 키트 하나와 좀비 퇴치 키트 하나를 집어 그녀에게 돌아왔다.
“이거 받아.”
“뭐예요?”
“선물이야.”
김민정은 마루가 선물이라고 준 서바이벌 키트와 좀비 퇴치 키트를 가만히 쳐다봤다.
“오늘 점심 잘 먹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조심히 가라.”
“아! 맞다. 점심 잘 먹었어요. 사실 그거 내가 사려고 했는데…….”
김민정은 마루의 말에 그제야 자신이 사려한 점심을 마루가 계산했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마루는 이미 한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려 대망 슈퍼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마루가 준 서바이벌 키트와 좀비 퇴치 키트를 쳐다봤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걸어가고 있는 마루의 넓은 등을 바라봤다.
김민정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부우우우웅!
끼익!
마루는 갑자기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김민정이 대망 슈퍼 앞에 차를 세워놓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내가 뭐 놓고 온 거 있어?”
“네. 잊고 계신 것이 있어요. 제 전화번호 안 받아가셨잖아요?”
“그, 그렇지.”
마루는 김민정의 말에 순간 살짝 당황했다.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마루에게 상아처럼 하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주머니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줬다.
김민정은 빠르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고는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따라라라랑!
그녀의 한 손에 쥐어진 분홍빛 스마트폰이 울렸다.
김민정은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마루에게 그의 스마트폰을 돌려줬다.
“전화하세요!”
“그래. 전화할게.”
마루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받고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어째 상황이 묘해졌다.
전혀 의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마치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안 그래도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도 아무 말 없으신 것을 보면 아버지가 모른 척하기로 작정하신 것 같았다.
김민정이 자신의 애마를 향해 걸어가는 게 마치 사과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탄력 있는 그녀의 애플 힙이 묘한 떨림을 이루며 그의 시선을 자극했다.
그 아래로 곧게 뻗은 대리석 같은 하얀 두 다리!
그녀의 붉은 차와 강하게 대비되면서 크게 부각됐다.
부우우우웅!
김민정이 차에 타 손을 한번 흔들고 떠날 때까지…….
아니 차가 꺾여 골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마루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있었다.
‘아차, 워키토키라도 줄걸…….’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다 나중에 워키토키를 핑계 삼아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주지 않길 잘했다며 안심했다.
“마루야, 아까 그 여자는 누구냐?”
갈팡질팡하고 있는 마루에게 이대근이 다가와 슬쩍 물었다.
“네? 아! 저… 김민정이라고 제가 다니는 체육관의 트레이너예요.”
“그으래?”
이대근은 별거 아닌 듯 넘기는 척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아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네가 좋아하는 여자냐?”
“네에? 아아! 예, 맞아요.”
“크흐으, 잘해봐라.”
“네에에…….”
이대근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음흉한 목소리를 냈다.
마루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며 절로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