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56
56화
“그나저나 어려운 시기에 로맨스를 선택했네!”
“그, 그러게 말이에요.”
“어디 사는지는 알고?”
“네, 같은 동네 살아요. 참, 문일 마트 아시죠?”
“문일 마트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우리 대망의 최대 경쟁자인데…….”
“그 집 딸이에요.”
“뭐라고? 아까 그 여자가 문일 마트 김 사장 딸내미라고?”
“네.”
마루의 말에 이대근은 좀 놀랐다.
하지만 곧 어떤 생각이 머리에 스쳐가자 조심스럽게 마루에게 물었다.
“혹시 너 그거 말했냐?”
“예.”
“그렇구나. 잘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지.”
이대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어깨를 토닥거려 줬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렇죠? 잘했죠?”
“응, 아주 잘했어. 그런데 믿어주긴 하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것 같아요.”
“하긴… 그런 얘기를 하면 누가 쉽게 믿어주겠니.”
마루는 이대근의 말에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뭘?”
“믿어주셔서요.”
“하하하, 내가 내 아들을 못 믿으면 세상에 누굴 믿겠어!”
“그래서 고맙다고요.”
“나도 고맙다.”
“뭘요?”
“네가 우리 가족을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해 줘서.”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시잖아요.”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이대근은 아들 마루의 손을 꼭 잡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마루는 순간 가슴에서 뭔가 울컥 솟구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눈이 촉촉해진 아들을 보자 이대근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어느새 그의 눈도 아들의 그것처럼 촉촉해졌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끈끈한 믿음과 정(情)이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해모수입니다.”
“거기 앉게.”
부(副)지휘첨사(指揮僉事) 왕규동의 안색을 살피며 해모수는 조심스럽게 나무 의자에 앉았다.
한눈에 봐도 돈깨나 들였을 것 같은 고색창연한 왕규동의 책상!
그곳과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거리였다.
둘 사이의 신분 차이는 아마 그보다 더 아득히 벌어져 있을 것이다.
탁!
왕규동은 중요한 서류를 챙겨 책상 한쪽에 던져놓았다.
슬쩍 고개를 들어 해모수를 쳐다보는 눈길이 여간 매서운 것이 아니다.
싸늘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결코 그에게 호의적인 것 같지 않다.
긴장된 마음에 해모수는 꿀꺽 침을 한번 삼켰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의 물을 흐려놓는다고 하더니… 자네가 지금 딱 그 짝이로군.”
“외람된 말이오나 애초에 연못으로 들어갈 미꾸라지가 아니었습니다.”
“흐음, 자네가 이리저리 쑤시고 다니는 통에 내가 지금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아는가?”
“부지휘첨사께는 잠시의 곤란함으로 끝나지만 저희들에게는 목숨이 걸려있습니다. 이 점 부디 너그러운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참 잘도 하는군.”
“무례했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왕규동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가 다시 돌아왔다.
보기에는 새파란 어린놈이 말하는 것을 보니 여간내기가 아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또박또박 내는 모습이 대가 곧고 심지도 굳세 보였다.
왕규동은 해모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찬찬히 살펴보고는 일단 한번 얘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원하는 게 뭔가? 나도 받은 게 있으니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도록 하지.”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처음에 약속하셨던 그대로 해대호, 해상호, 해광호를 군역에서 풀어주십시오.”
“불가(不可)!”
왕규동은 해모수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어째서입니까? 이건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상황이 바뀌었네. 그리고 난 약속대로 그들을 병영에서 내보냈어.”
“정확히 말하자면 부지휘첨사께서 풀어주신 것이 아니지요. 제 형들을 마음대로 잡아가 자신들의 이름으로 군역을 세웠던 북현(北縣) 유지의 아들들이 왜구에게 잡혀 모조리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비리의 전모가 저절로 밝혀져서 풀려난 것이지요.”
“그 얘기는 대체 어디서 듣고 왔나?”
왕규동은 해모수의 말에 살짝 짜증이 나서 물었다.
해모수는 그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배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억울하게 5년 동안 군역을 진 세 형들이 부당하게 다시 잡혀와 군역을 살게 됐다는 점이지요.”
“자네 형제들의 억울한 사연은 나도 익히 들어 잘 아는 바이네. 마음 같아선 나도 당장 풀어주고 싶군. 하지만 상부(上府)에서 특별 동원령이 내려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다시 군역을 지게 할 수밖에 없었네.”
“도대체 무슨 특별 동원령인데 억울하게 군역을 진 사람을 다시 잡아가 또다시 군역을 지게 하는 겁니까?”
해모수는 의도적으로 왕규동의 말에 계속 자신의 형들이 억울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 노력 때문일까?
왕규동의 눈에 살짝 안타까운 빛이 흐르다 사라졌다.
“이번 왜구의 습격 사태로 인해 성산위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알고 있나?”
“네, 저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피해가 크지 않았다면 아마 고려의 유민들까지 징병해 군적에 올리지는 않았을 게야. 하지만 성산위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어. 일반적인 방법으로 복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일세.”
“그래서 제 형들을 다시 강제로 징병해 군적에 올렸다는 말입니까? 그럼 5년 동안 군역을 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으로 군역은 이미 충분히 마쳤다고 봐야 되는 것 아닙니까?”
“자네 형제들의 이름으로 5년 동안 군역을 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건 군역 비리 사건이고… 이번 징병은 고려의 유민을 대명(大明)의 백성으로 살 기회를 주시겠다는 황제 폐하의 은혜라네.”
“네에?”
해모수는 왕규동의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리고 쳐다봤다.
왕규동도 조금 양심이 찔리는지 해모수의 빛나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그렇다고 이미 징병한 해모수와 그의 형제들을 군역에서 풀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현재 산동(山東)에서는 도지휘사(都指揮使)의 명령으로 고려의 유민을 비롯한 소수민족 출신 장정들을 강제 징병해 이번 왜구 사태로 인한 피해를 메꾸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모든 위소(衛所)에 징병해야 할 숫자가 할당됐다.
만약 할당된 숫자를 채우지 못하면 자리를 보전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가지가 날아갈지도 모를 형국(形局)이다.
부지휘첨사 왕규동도 당장은 벼랑 끝으로 몰린 터라 누굴 봐주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자네와 세 형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으니 그냥 딱 5년만 더 버티게. 그럼 내가 책임지고 내보내 주겠네.”
“정말 군역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미안하지만 현실이 그러하네.”
왕규동은 작전을 바꿨는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해모수를 살살 달랬다.
그러나 해모수는 왕규동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문제는 무조건 따진다고 해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렌: 이거 아주 더럽게 걸렸구먼.] [마루: 그러게요. 그렇다고 이렇게 입씨름만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해모수: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네 형제가 모두 군역을 살아야 하나요?] [그렌: 뭔가 반대급부를 달라고 해보자.] [해모수: 반대급부요? 어떤 반대급부요?] [마루: 5년간 군대 밥을 먹여놓고 다시 졸병(卒兵)으로 시작하라는 것은 말도 안 되지. 백호소(百戶所)의 백호(百戶) 자리라도 내놓으라고 해.]해모수는 마루의 말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백호소의 지휘관인 백호라면 정6품에 해당하는 품계의 벼슬이다.
5년 동안 군역을 살았다고 감히 바라볼 수 있는 계급이 아닌 것이다.
[해모수: 아이 참, 형! 지금 장난쳐요? 어떻게 백호 자리를 달라고 그래요?] [마루: 그럼 총기(總旗), 아니면 하다못해 소기(小旗)라도 시켜달라고 해. 이대로는 너무 억울하잖아.]총기는 지금의 소대장과 비슷한 직위로 오십 명을 지휘한다.
총 백열두 명이 있는 백호소에 단 두 명만 있는 고위급 장교다.
소기는 분대장으로 십부장(十夫長)과 비슷하다.
열 명을 지휘하는 장교로 백호소에 총 열 명이 있다.
[그렌: 어디로 가서 근무를 하는가도 아주 중요해. 괜히 최전방으로 배치되면 계급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죽는 거야.] [마루: 맞아. 군대는 무엇보다 줄을 잘 서야 한다고, 어디로 서느냐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단 말이야. 최대한 후방으로 빼달라고 해봐.]해모수는 그렌과 마루의 말을 듣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좋습니다. 부지휘첨사께서 그렇게까지 얘기를 하시니 까짓것 딱 5년만 버텨보겠습니다.”
“호오! 잘 생각했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니?”
왕규동은 해모수가 승낙하는 말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가 조건이라는 말에 다시 인상을 팍 썼다.
감히 건방지게 훈련도 아직 마치지 못한, 졸병도 못 되는 신병(新兵) 주제에 어디다 대고 조건을 언급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건을 말하지 말라며 호통을 쳐서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일단 해모수의 말을 한번 들어보기로 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기왕 황제 폐하의 은혜를 입게 된 것, 저희 형제들에게 나라를 위해 중(重)한 임무를 맡겨주십시오.”
“중한 임무라니?”
왕규동은 갑자기 은근하게 말투가 변한 해모수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5년 동안 졸병으로 굴렀으니 이제는 신병 50명 정도는 맡아서 잘 가르칠 자신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뭐라고? 지금 나보고 자네 형제들을 총기로 임명해 달라는 말인가?”
“정 안 되면 소기(小旗)라도 괜찮습니다.”
“허어, 이거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군. 그게 말처럼 어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나?”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고, 쉽다면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어차피 성산위를 재건하려면 누군가는 총기가 되어야 하고 또 누군가는 소기가 되어야 합니다. 기왕이면 왕규동 부지휘첨사와 인연이 깊은 저와 저희 형제들을 임명해 주시면 나중에 꼭 필요하실 때에 분골쇄신(粉骨碎身)하는 마음으로 모시겠습니다.”
“으잉?”
처음에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게 또 은근히 괜찮은 제안이었다.
‘가만, 이렇게 되면 성산위 안에 내 세력이 생기는 셈이 아닌가! 어차피 위해위에서 모병을 해도 위해위의 모든 부장들이 성산위의 부장으로 갈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부하들을 성산위의 부장으로 찔러 넣으면 나중에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거야. 따로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야 어차피 내 영향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왕규동은 해모수의 제안을 빠르게 몇 번이나 검토해 봤다.
일단 자신에게 손해날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 성산위 안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나쁘지 않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자네의 말, 정말 믿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을 건다고 했습니다. 왕 부지휘첨사께서 저희를 밀어주시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날이 꼭 올 것입니다.”
“하하하, 좋아. 그럼 자네들을 위해 내 크게 한번 힘을 써보겠네.”
“감사합니다. 왕규동 부지휘첨사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왕규동이 전격적으로 해모수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해모수는 즉시 땅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물론 감동을 했다거나 충성심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이게 또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모습이다.
왕규동은 해모수의 모습에 왠지 모를 전율을 느꼈다.
입꼬리가 귀에 걸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모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친히 몸을 숙여 해모수의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일어나게.”
“예!”
해모수가 몸을 일으키자 왕규동은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그러곤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자네를 내 몸처럼 생각하겠네. 굳이 내가 자네 형제들을 따로 만나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가서 잘 얘기하겠습니다. 앞으로 저희 사 형제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그러지. 그래야 하고말고……. 좋아. 아주 좋아. 푸하하하!”
왕규동은 뭐가 그리 좋은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그 모습에 해모수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왕규동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누가 보면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라고 오해를 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