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57
57화
“왕규동 부(副)지휘첨사(指揮僉事)께 아룁니다. 제가 혹시 이런 경사가 있을지 몰라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선물이라니?”
왕규동은 해모수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선물을 준비했단 말인가?
해모수는 왕규동이 어떻게 생각하든 일단 미리 준비해 놓은 선물을 갖다 바쳤다.
“직접 열어보십시오.”
“으헥! 이건 사람의 머리가 아닌가?”
“잘 보십시오. 그냥 사람의 머리가 아닙니다. 지난 왜구의 습격 때, 제가 운 좋게 잡아 죽인 왜구의 수급(首級)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그 무서운 왜구를 자네가 직접 잡았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왕규동은 해모수의 말에 깜짝 놀랐다.
머리가 좋고 얼굴만 곱상한 줄 알았더니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그의 머릿속에서 해모수의 평가가 한 단계 상승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거 정말 귀한 선물이군.”
“쓰시기에 따라서 은자, 아니 금보다 훨씬 요긴한 물건이 될 것입니다.”
“맞아. 자네의 말 그대로야. 선물 고맙게 잘 받겠네.”
왕규동은 당장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전(前) 성산위의 정천호(正千戶)와 부천호(富千戶)가 생각났다.
그들에게 이걸 가져가면 아마 자신들의 구명(救命)에 사용하려고 서로 천금(千金)을 아끼지 않고 내놓을 것이다.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미소를 은밀하게 쳐다보고 있는 해모수의 입가에도 미미한 미소가 흘렀다.
결국 이날 해모수는 최선의 결과는 만들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차선의 방책은 만들어 냈다.
거기에다 왕규동의 신뢰를 얻었으니…….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과 형제들에게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마루의 말을 들었다.
군역을 사는 것을 피할 방도가 없으니 이제는 확실히 즐겨줄 생각이다.
해모수의 눈 깊은 곳에서 차가운 한기(寒氣)가 치밀어 올랐다.
* * *
불에 탄 성산위(成山衛)가 빠르게 복구되어 갔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해체 위기에 놓였건만, 고려의 유민과 소수민족 출신 장정들을 강제 징병하는 방법으로 꼼수를 써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재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너진 병영이 다시 세워지고 해안을 방어하는 시설들이 착착 들어섰다.
신병(新兵)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매일 강훈련으로 땅바닥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갔다.
포신이 앞으로 갈수록 더욱 넓어지는 형태인, 원나라 말기에 개발된 완형(椀型) 청동포도 속속 운반되어 배치됐다.
허나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왜구의 습격으로 전멸한 북현(北縣) 마을은 여전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죽은 마을 사람들의 시체만 간신히 수습하고 그대로 봉(封)해놓은 상태.
매일 관청(官廳)에서는 북현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이해 당사자들 간의 설전(舌戰)이 벌어졌다.
죽은 마을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북현 마을의 완전한 복구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꾸지 못할 얘기였다.
그나마 다른 마을 사람들을 이주시키자는 말이 지금까지 나온 방법 중에 가장 쓸 만한 차선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문제는 언제든지 다시 왜구에게 약탈당할 수 있는 마을로 누가 이주를 오겠냐는 것이다.
갑론을박(甲論乙駁) 끝에 결국 희망 이주자를 모집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 대상도 한족(漢族)에 국한했다.
하지만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번엔 고려의 유민과 소수민족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역시 그 누구도 북현으로 이주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이곳은 산동 사람들에게 사지(死地)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쿵쾅, 쿵쾅!
딱딱딱, 딱딱딱…….
재건되는 성산위와 사람이 없어 이젠 귀기(鬼氣)까지 흘려대는 북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동편 해안가 언덕 위.
쉴 새 없이 격한 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백여 명의 병사들과 수십 명의 목수들이 웃통을 벗어 던진 채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이들이 한마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감시탑(監視塔)으로 보이는 구조물이다.
왜구들의 공격에 변변찮은 대항조차 못하고 불타버린 성산위의 패인(敗因)은 무엇일까?
산동 도지휘사사는 일단 경계 실패로 결론을 내렸다.
왜구의 습격을 미리 대비하지 못하면 아무리 성산위를 재건해도 말짱 도루묵이다.
바다를 통해 습격해 오는 왜구의 관선의 존재를 빠르게 파악하는 것!
이게 선행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제2의 성산위 사태는 재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산동 도지휘사사는 성산위를 재건하면서, 성산위 동쪽 해안가 높은 언덕에 성산백호소(城山百戶所)를 세워 감시하도록 명령했다.
성산백호소의 목적은 오직 하나!
왜구의 관선의 접근을 재빠르게 탐지해 성산위에 직통으로 보고하는 것이다.
성산백호소는 다른 백호소와 마찬가지로 한 명의 백호(百戶)와 두 명의 총기(總旗) 그리고 열 명의 소기(小旗)로 이루어져 있다.
총인원은 112명이다.
그런데 묘한 것이 하나 있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성산백호소의 지휘관, 백호가 현재 공석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성산백호소에는 현재 두 명의 총기가 백호 대신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감시탑 공사가 한창 벌이지고 있는 곳을 지켜보며 총기와 소기의 갑옷을 각각 입고 있는 건장한 사내 둘이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광호야, 정말 오늘 중으로 저 감시탑이 완성되겠냐?”
“네, 형님. 둘째 형이 저렇게 병사들과 인부를 닦달하고 있으니 아마 오늘 중으로 완성을 볼 겁니다.”
해대호는 셋째 해광호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봤다.
그의 눈이 해안가 절벽 위에 서서히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구조물 앞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소리를 치고 있는 해상호를 향했다.
“참, 넷째는 어디 갔어?”
“왕규동 부지휘첨사를 만나러 갔어요.”
“또 무슨 일이 생겼나?”
“넷째가 뻔질나게 왕 부지휘첨사를 만나러 다닌 것이 어디 오늘만의 일인가요?”
“하긴 그 녀석이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닌 덕분에 나와 둘째가 총기로, 네가 소기로 임명됐지.”
“저는 가끔 넷째가 가져온 이 행운이 자고 일어나면 꺼지듯 사라질까 봐 두렵기만 합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무래도 그 녀석 때문에 우리 집이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를 듣겠어.”
해대호는 해광호의 얼굴을 쳐다보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푸른 물이 넘실대는 넓은 바다로 향했다.
지난 오 년간의 치욕스러운 일들이 그의 망막에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해대호, 해상호, 해광호.
해씨 삼 형제는 억울하게 군역에 끌려왔다.
그동안 수모와 치욕 속에서 온갖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을 겪어야 했다.
알지도 못하는 남의 군역을 대신 사는 것도 억울한 일이다.
거기에다 고려인이라고 멸시하고 졸병들에게조차 천대를 당했다.
오 년 동안 그들이 겪은 끔찍한 개고생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허나 가장 황당했던 것은, 간신히 군역에서 풀려나 병영(兵營)을 나선 지 반나절 만에 다시 위해위로 돌아가 또다시 군역을 지게 된 일이다.
그들은 지난 오 년 동안의 일을 다시 되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끔찍한 마음에 그만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그런데 하늘의 도우심인지, 해모수가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 냈다.
오 년간 군역을 다시 지는 것은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었지만, 뭔 수를 썼는지 해대호와 해상호를 총기에, 해광호를 소기에 덜컥 임명시키는 일대 쾌거를 이룬 것이다.
비록 해모수 본인은 이제 갓 신병 훈련을 마치고 졸병이 된 터라 부장의 위(位)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세 형만은 오 년간의 군(軍) 경력을 소급 적용해 바로 총기와 소기로 영전(榮轉)시켰다.
더구나 해모수는 왕 부지휘첨사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해씨 사 형제를 모두 함께 성산백호소로 배치했다.
그에 더해 병사들도 모두 고려의 유민과 소수민족 출신으로 채워 넣었다.
성산백호소에 주어진 임무는 감시탑을 세워 바다를 상시 감시하고, 왜구의 관선이 나타나면 성산위로 즉시 통보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죽을 염려가 전혀 없는 꿀 빠는 보직이라 소문난 자리였다.
성산백호소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감시탑을 세우는 작업이다.
그것도 수십 명의 목수들이 달라붙어 이제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이 지낼 군영조차 감시탑을 세우기 전에 목수들에게 약을 쳐서 미리 다 만들어 놓았다.
물론 남은 자재와 군량미의 일부를 목수들에게 대가로 넘겨줘야 한다.
하지만 병사들이 직접 군영을 세우는 것에 비하면 훨씬 상태가 좋은 그럴듯한 군영이 만들어졌다.
와아아아아!
해대호는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에 놀라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대한 감시탑이 완성되어 나름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목수와 병사들이 한 몸처럼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큰형님, 드디어 완성됐습니다.”
“그렇구나. 이제 한시름 놓게 됐구나.”
해대호와 해광호는 둘째 해상호에게 다가가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함께 나눴다.
달그락달그락…….
다그닥다그닥…….
성산백호소를 향해 군마(軍馬)들이 수레를 끌고 올라왔다.
수레 위에는 뭔가 잔뜩 쌓여있었다.
두꺼운 방수포로 덮여있어 안이 쉬이 보이진 않았다.
해상호가 눈에 힘을 잔뜩 주고는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저거 넷째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정말 넷째가 타고 있네!”
해씨 삼 형제는 점점 위로 올라오는 수레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막내야! 이게 다 뭐냐?”
“하하하, 형님들! 아니 이제 모두 영전(榮轉)되셨으니 총기와 소기로 불러야 하나요?”
해모수는 호탕한 목소리를 발하며 수레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형들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잠깐만요.”
“…….”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형들에게 손을 들어 잠시 그 자리에서 기다리게 했다.
해모수는 수레를 끌고 온 인부들을 부려 군마는 마구간에, 수레 위의 짐 일부는 창고로, 나머지는 식당으로 이동시켰다.
지시를 마치자 그는 해씨 삼 형제 앞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성산위에 성산백호소의 감시탑이 오늘 중으로 완공될 거라고 보고하고 앞으로 우리 전령들이 사용할 군마를 받아왔습니다.”
“그럼 저 수레들은 뭐냐?”
“앞으로 우리가 사용할 병장기의 일부입니다.”
“성산위에서 받아왔냐?”
“아니요. 앞으로 병구(兵具)를 비롯한 보급품은 우리 성산백호소에서 자체적으로 구해 쓰기로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요? 왕 부지휘첨사를 비롯한 윗대가리들이 우리 성산백호소에 보내야 할 보급품을 해먹었다는 얘기지요.”
“이런 쳐 죽일 놈의 새끼가 있나?”
“쉿,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습니다. 그래도 왕 부지휘첨사는 우리 해씨 사 형제를 뒤에서 밀어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사람 많은 곳에서 대놓고 욕을 하는 것은 삼가세요.”
해모수의 말에 순간 발끈한 해상호가 분한 듯 짓눌린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해먹으면 어떻게 해?”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덕분에 우리 성산백호소에서 필요한 병구는 전부 매형이 만들어 줄 테니까요.”
“그럼 저기 창고로 가고 있는 것이 매형의 대장간에서 만든 병구란 말이냐?”
“네,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매형이 크게 손해를 보지 않을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것을 발주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오히려 크게 이문이 남을 겁니다.”
해모수의 장담에 해씨 삼 형제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해상호가 손가락으로 식당으로 향하고 있는 수레를 가리켰다.
“그럼 식당으로 가고 있는 저 수레는?”
“당연히 술과 고기지요. 감시탑과 군영을 지어준 목수에게 먹일 겁니다. 남은 것은 우리도 좀 먹고요.”
“저건 도대체 무슨 돈으로 사온 거야?”
“다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많이 알면 다칩니다. 형님들은 그저 모른 척하시고 저만 믿으세요. 앞으로 두 다리 쭉 뻗고 잘살게 해드릴 테니…….”
해모수의 의미심장한 말에 해씨 삼 형제는 서로를 쳐다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해모수: 아무래도 조금 설명을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마루: 무슨 설명? 군납 비리에 대한 설명?] [그렌: 그건 아니지. 차라리 그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안전해. 그리고 일일이 설명한다고 해도 알아먹을 수도 없을 것 같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