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59
59화
“한잔 받게.”
“감사합니다.”
왕규동은 해모수의 작은 술잔에 가득 술을 채워줬다.
“요새 자네 덕분에 내가 아주 살맛이 나네.”
“감사합니다.”
“자, 우리 같이 건배하세.”
“왕규동 지휘첨사(指揮僉事)의 승차를 축하드립니다.”
“허허허, 어떻게 알았나?”
왕규동은 해모수의 말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가 나지 않은 사안이기 때문이다.
“벌써 승차하셔서 성산위의 실세가 되셨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런가?”
위해위에서야 모른다고 쳐도, 성산위는 또 입장이 다르니 벌써 소문이 들어갈 만도 했다.
왕규동은 고개를 끄덕이며 해모수와 같이 건배를 하고는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듯 술을 비웠다.
고개를 내리니 자신의 얼굴 앞에 잘 익은 고기 한 점이 보인다.
해모수가 보기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젓가락을 들고 있다.
“어서 드십시오. 제 팔 떨어집니다.”
“허어, 참 자네도…….”
왕규동은 해모수의 노골적인 아부가 싫은 기색이 아니다.
그가 입을 열자 해모수가 그의 입안에 고기 한 점을 조심스럽게 넣어줬다.
입을 오물거리며 씹자 향긋한 육즙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해모수는 얼른 그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북현으로 이주한 자네의 가족들은 모두 만족하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왕 지휘첨사께서 신경을 써주신 덕분에 분수에 넘치는 큰 집을 받아 앞으로 어떻게 유지를 할지 걱정이 될 지경입니다.”
“허허허, 엄살이 너무 심하구먼. 자네의 재주가 비상한 것을 이미 잘 아는데 그런 약한 소리를 하다니……. 어찌 됐든 자네 덕에 북현으로 이주하는 주민들이 늘어나서 참 다행이야.”
“그게 어찌 제 덕이겠습니까? 왕 지휘첨사께서 계획을 잘 짠 공(功)이지요.”
왕규동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해모수를 쳐다봤다.
술잔을 집어 다시 한번 술을 입안으로 털어낸 그는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왕새우를 쳐다봤다.
껍질이 까진 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속살을 드러낸 채 김을 모락모락 피워대고 있는 왕새우를 보니 절로 입이 벌어진다.
해모수가 건넨 왕새우를 받아먹은 왕규동은 슬쩍 고개를 들어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문등현에서 가장 큰 주루인 황해루(黃海樓)의 삼 층은 전체가 모두 밀실형태로 되어있어 다른 사람의 시선과 귀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왕규동이 계획한 일은 아무도 들어선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조심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민감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해모수는 왕규동의 얼굴이 진지해지자 덩달아 살짝 긴장했다.
“그동안 자네가 여러모로 일을 잘해줬어. 덕분에 내가 이렇게 지휘첨사로 승차할 수 있었지.”
“아닙니다. 그건 왕 지휘첨사께서 타고난 하늘이 내려주신 복입니다.”
“허허허,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그래서 이번 일도 잘해낼 줄 믿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자꾸 저를 띄우십니까? 어쩐지 불안합니다.”
해모수가 슬쩍 농을 하듯 말했지만 왕규동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를 쫙 깔더니 작게 속삭였다.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듣게.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야. 이게 잘되면 크게 한 재산 챙기는 것이고, 자네도 단단히 한몫 쥘 수 있게 될 걸세. 하지만 일이 잘못되어 발각되는 날에는 나는 물론 자네와 자네 가족까지 모두 목이 달아날 게야.”
“알겠습니다. 한번 목숨을 걸어보겠습니다.”
해모수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소곤거렸다.
솔직한 심정은 지금 왕규동이 은밀히 진행하는 일이 무엇이건 간에 끼고 싶지 않았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는 냄새가 풀풀 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지금 와서 왕규동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과 형들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도적으로 일을 추진하면 된다.
최악의 경우, 왕규동을 비롯한 관련자를 전부 없애버려야 한다.
속으로 독한 마음을 품고 있는 해모수를 향해 드디어 왕규동이 입을 열었다.
“일단 이 일은 자네 형제들을 억울하게 끌고 가 군역을 지게 한 놈들의 재산을 가로채는 것이 핵심이야.”
“네? 북현의 몰살당한 지역 유지들의 재산 말입니까?”
“그렇지.”
해모수는 왕규동의 말에 입을 딱 벌렸다.
이건 생각보다 스케일이 커도 너무 컸다.
위험한 건 둘째 치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한두 명이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것은 오히려 더 위험했다.
왕규동의 말을 듣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비밀스러운 계획을 들은 이상 퇴로는 막혔다고 보는 것이 정답이다.
이럴 때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저희 형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모수가 바로 핵심을 찌르고 들어갔다.
왕규동의 얼굴이 호박꽃 피어나듯 활짝 펴졌다.
“이미 문등현의 주부(主簿) 주지훈과 만나서 서류를 꾸미기로 했네. 자네 해씨 삼 형제는 문등현의 관청으로 가서 그의 지시를 따라 상속 절차를 밟기만 하면 되네.”
“그게 전부입니까?”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지. 아마 그건 시작이라고 해야 옳을 거야. 공중에 붕 떠있는 지역 유지들의 재산을 몽땅 가로채 현금으로 바꾸는 작업도 아마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닐 게야.”
“저희 형제들의 몫으로 얼마나 배정하셨습니까?”
“으음, 그게 문제이긴 한데…….”
왕규동은 해모수의 눈치를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해모수는 왕규동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작게 속삭였다.
“강물을 막아놓은 둑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지는 법입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꼭 사달이 일어나는 법이지요. 이번 일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여러 곳에서 관여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군요. 저희 형제들도 아마 크게 욕심을 내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적으면 그게 원망으로 변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자네의 말이 타당하긴 해. 허나 이곳저곳 갖다 바치고 기름칠을 해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야.”
왕규동의 눈이 순간 욕심으로 가득 찼다.
그렇지만 해모수도 그저 남 좋은 일만 해줄 수는 없었다.
“일 할만 주십시오.”
“일 할이나?”
왕규동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해모수가 그를 쳐다보며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산을 처분해서 만든 현금의 일 할이 아니라 현물(現物)로 일 할을 달라는 말입니다.”
“으음, 뭐 그렇다면야…….”
해모수의 말에 왕규동이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몰살당한 북현의 지역 유지들의 재산을 처분하면 아마 어마어마한 액수의 현금이 들어올 것이다.
그것에서 일 할을 떼어 해씨 형제들에게 준다면… 당장 자신부터 시작해서 다들 펄쩍 뛰고 난리가 날 것이다.
허나 현물의 일 할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
그들의 재산을 처분하고 남는 현물을 줘도 되고, 현금화시키기 곤란한 것들을 떠넘겨도 된다.
“그래도 현금이 아주 없으면 형제들이 섭섭해할 수도 있으니, 현금도 적당히 챙겨주십시오.”
“알겠네. 그 정도는 문제없을 거야. 정 안 되면 내 몫에서라도 떼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해모수는 그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속으론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행여나 네 몫에서 떼어주겠다. 말로만 생색을 내려고 하네.’
왕규동은 해모수가 자신의 뜻에 잘 따르겠다고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는 기녀들을 불러서 거하게 술을 마셨다.
해모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왕규동을 모시는 데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호호호호!”
“허허허허!”
“깔깔깔깔!”
황해루의 기녀들은 왕규동과 술을 마시며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대고 웃었다.
왕규동은 신이 나서 더욱 빨리 술을 먹고 취해갔다.
기녀들은 꽃미남처럼 잘생긴 해모수를 힐끗거렸다.
연신 야릇한 미소를 보내왔지만 해모수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만 황해루의 총관인 서갈봉의 행적을 지나가는 말로 슬쩍 한번 물어봤을 뿐이다.
[해모수: 하아, 이 개놈의 새끼! 어디로 사라졌지?] [마루: 기녀의 말대로 사고를 치고 도망간 게 틀림없는 것 같다.] [그렌: 서갈봉은 나중에 찾고 지금은 왕규동에게 집중해. 저놈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라서 실수하면 위험해.] [해모수: 네, 알겠어요.]해모수는 마루와 그렌의 말대로 지금은 잠시 개인적인 원한을 접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반드시 서갈봉을 찾아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겼다.
이윽고 왕규동이 취해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해모수는 가장 육덕지게 생긴 기녀 하나를 택해 왕규동의 수청을 들도록 했다.
그가 지정한 기녀가 아쉬운 표정으로 해모수를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었는지 해모수를 한번 쳐다보고는 왕규동을 부축해 내실로 들어갔다.
왕규동이 사라지자 남은 기녀들이 ‘기회는 이때다!’ 하고는 해모수에게 들러붙었다.
옷을 걸친 건지 만 건지… 속살을 다 드러낸 기녀들의 육탄 공세가 시작됐다.
술기운이 얼큰하게 오른 해모수는 그냥 이대로 욕망을 풀고 갈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서갈봉에게 당한 폭력과 치욕들이 떠올랐다.
도저히 이곳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연신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기녀들의 팔을 과감히 뿌리치고 황해루를 빠져나왔다.
시원한 밤바람을 맞자 흐릿했던 정신이 맑아져 오는 것 같았다.
황해루 앞에는 왕규동을 모시는 병사 둘이 서있었다.
해모수는 그들에게 다가가 왕규동의 상황을 설명했다.
“왕 지휘첨사께서 내실로 드셨소.”
“알겠소.”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병사의 손에 해모수는 작은 은자를 하나 쥐여줬다.
“이것으로 나중에 백주라도 한잔하시오.”
“아니, 뭐 이런 것을 다…….”
“서로 돕고 사는 세상이 아니오? 그럼 수고하시오.”
“고맙소. 내 오늘 일 기억하겠소.”
무표정한 얼굴일 때는 몰랐다.
그런데 은자를 주자 환하게 웃는 병사의 앞니가 두 개나 빠져있는 것이 보였다.
왠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해모수는 그들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곤 몸을 돌렸다.
‘오고 가는 은자 속에 싹트는 우정!’이란 말처럼… 지금 이렇게 소소하게 뿌리는 은자가 나중에는 자신과 형제들 그리고 가족의 목숨을 구할 생명 줄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해모수는 형제들보다 조금은 더 먼 곳을 보며 움직이고 있었다.
[마루: 이참에 미리 현물을 처리할 수 있는 루트, 아니 장소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렌: 집에서 쓸 노비도 몇 명 구하도록 해. 가급적이면 고려 유민 출신으로…….] [해모수: 네, 알겠어요. 한번 알아볼게요.] [마루: 해모수와 형제들이 성산백호소에 묶여있으니까 너를 대신해 밖에서 너의 손발처럼 움직여 줄 집사를 찾아봐. 제대로 임금을 쳐준다면 아마 쓸 만한 사람을 구할 수도 있을 거야.] [그렌: 매형인 장은철에게 찾아가 무기 생산을 독촉하도록 해. 생각보다 너무 시간이 지체되고 있어.] [해모수: 그렇게 할게요.]해모수는 마루와 그렌의 말을 들으며 문등현에 살고 있는 큰누나 집으로 걸어갔다.
아마 지금쯤이면 매형도 일을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을 것이다.
탁탁탁!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린 해모수는 잠시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끼이익!
곧 매형인 장은철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그를 쳐다봤다.
“아니 이게 누군가? 막내 처남이 아니신가?”
“그간 잘 지내셨어요?”
“며칠 전에 봐놓고 무슨 그런 인사를 해? 어서 들어오게.”
“네.”
장은철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해모수를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그동안 간신히 적자를 면한 상태로 겨우 운영하고 있던 대장간이다.
그런데 해모수 덕분에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고 있었다.
성산백호소의 보급을 장은철에게 밀어준 일은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큰 이익으로 돌아왔다.
“누나는 자요?”
“피곤한지 방금 잠이 들었어.”
“그럼 조용히 들어가죠.”
“그래.”
둘은 해지인과 아이들이 깨지 않게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자고 갈 거지?”
“네, 오늘 하룻밤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에이 이 사람,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말게. 자네가 자주 와주는 것이 내겐 복이야.”
“헤헤헤.”
장은철이 웃으면서 야단 아닌 야단을 치자 해모수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성산백호소에서 세운다는 감시탑은 다 세워졌는가?”
“네, 이미 완성되어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목책과 방어 시설도 전부 완성됐어요. 이제 주문한 무기만 보내주시면 됩니다.”
마루와 그렌의 충고대로 해모수는 이미 장은철에게 개량궁과 개량 쇠뇌, 금속 화살촉이 달린 화살과 쇠뇌용 화살(볼트)의 대량생산을 주문했다.
거기에다 가벼운 산탄포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응용한 작열탄(炸裂彈), 화살에 매달아 발사할 수 있는 유탄(榴彈)까지 제작을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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