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66
66화
웅웅!
동굴 안은 해모수가 일으킨 마나의 친화력으로 인해 주변의 마나가 진동했다.
그렌의 몸으로 빨려들면서 기묘한 소리를 냈다.
진주알만 한 카오스 볼은 작은 구슬만 한 크기까지 덩치를 불렸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일대의 마나를 몽땅 먹어치웠다.
카오스 볼은 강하게 회전하면서 마나를 흡수하는 것과 동시에, 압축하고 정제하는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했다.
한 시간이 지나자 해모수가 육체의 통제권을 잃고 뒤로 물러났다.
그렌은 곧바로 자신의 몸의 통제권을 받아 카오스 볼에 마나를 흡수하고 압축하는 일련의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 과정은 지루하고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렌은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찐득하게 앉아서 성실하게 꿋꿋이 밀고 나갔다.
그렌의 몸에서 뭔가 공명을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웅웅웅!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어느 순간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 있던, 마나를 끌어들여 카오스 볼에 흡수시키고 회전 및 압축을 통해 정제하는 일련의 반복 과정도 잊어버렸다.
마지막엔 끝내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렸다.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아(無我)의 경지(境地)에 이르러 일체(一切)의 분별과 상념(想念)이 끊어진 삼매경(三昧境)으로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렌이 2서클이었을 때 이런 상태가 됐다면 아마 그는 당장 3서클로 올라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아니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려고 그런 건가?
서클을 버리자마자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그렇게 바라던 경지에 스스로 올라서고야 말았다.
웅웅웅웅!
그렌의 몸에서 아까보다 훨씬 강한 공명음이 일어났다.
이 공명은 근처의 마나를 자극하고 빠르게 주변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것은 점차 주변에 흐르던 기류마저 바꿔놓았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작은 회오리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회오리는 강한 흡입력을 일으켰고 특히 이것은 마나를 집중적으로 끌어당기는 첨병의 역할을 했다.
웅웅웅웅웅!
주변의 마나가 그렌의 몸에 쏠리는 현상이 가속됐다.
그의 몸에서 시작된 공명음이 더욱 커지고 또한 강렬해졌다.
동시에 그렌의 몸에서 은은한 서기(瑞氣)가 치솟았다.
그 빛은 어두운 동굴을 은은하게 밝혀줬다.
이런 놀라운 현상은 밖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공명음이 강렬해지고 서기가 솟구쳐 오를 때!
그의 몸속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이뤄졌다.
맹렬하게 회전을 하고 있던 작은 구슬만 한 카오스 볼이 급격히 마나를 빨아들이더니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작은 구슬 크기의 카오스 볼은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거의 알사탕만 한 크기로 변해갔다.
그에 따라 카오스 볼에 쌓이는 마나의 양도 무시 못 할 정도로 빠르게 불어났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그렌에게 일어난 변화는 언제까지 한없이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마치 몸 스스로가 한계를 깨닫기라도 한 양 카오스 볼의 급격한 활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공명음은 사라지고 서기도 일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번쩍!
그렌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순간적으로 그의 푸른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났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렌: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마루: 잘 모르겠어요. 나도 카오스 볼에 집중하는 바람에…….] [해모수: 최소한 하루는 지났어요.]해모수의 말에 그렌은 배가 조금 고팠다.
그는 일단 물병을 꺼내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들어가자 정신이 번쩍 나는 느낌이었다.
[마루: 일단 축하해요.] [그렌: 고마워.] [해모수: 혼돈 마법을 시작한 것치고는 그래도 빠른 편이죠?] [그렌: 글쎄?]그렌은 일단 자신의 카오스 볼에 의식을 집중했다.
알사탕만 한 크기의 카오스 볼에는 2서클에 해당하는 마나는 물론, 거의 3서클에 해당하는 마나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렌: 이 정도면 3서클은 족히 되겠는데.] [마루: 그럼 처음에 세웠던 목표는 달성한 셈이네요.] [그렌: 그렇지. 이게 모두 마루와 해모수 덕분이다.] [해모수: 천만에요. 난 시작할 때 딱 한 시간만 도와줬을 뿐이에요. 나머지는 그렌 아저씨가 이룬 성과예요.] [마루: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 이번에는 그렌 형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게 맞아요.] [그렌: 그, 그런가?]그렌은 마루와 해모수의 말에 크게 고무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말 해모수의 말이 맞았다.
특히 마지막에 무념무상의 경지에 올라선 것은 자신이 이룩한 놀라운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쿵! 쿠웅!
그때 멀리서 뭔가 진동하는 소리가 미미하게 들려왔다.
[그렌: 뭔 일이 터진 모양이네.] [마루: 그동안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동굴 안에도 뭔가 변화가 있었겠죠.] [해모수: 그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빨리 가서 확인해 보세요.] [그렌: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그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리가 조금 저리긴 했다.
하지만 카오스 볼 안의 마나를 조금 꺼내 다리 쪽으로 한번 쭉 돌리자 금방 시원해졌다.
‘이거 마나의 성질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한데……. 확실히 마나를 쓰기가 쉬워지고 또 빨라졌구나.’
이미 혼돈 마법의 특성에 대해서는 머릿속에 달달 외우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많이 놀라진 않았다.
그렌은 일단 육포를 꺼냈다.
당장 급한 대로 에너지를 보충하려면 육포라도 씹어 먹어야 했다.
자신의 무장도 살펴봤다.
메이스, 쇠뇌, 버클러, 가죽 갑옷 세트 어느 하나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자신이 들어가 있던 동굴에서 나와 동굴 입구로 걸어갔다.
“어? 저건 그렌 님 아냐?”
“맞다. 그렌 님이다.”
그렌이 동굴 입구로 다가가자 레인저 몇이 그를 보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그렌 님.”
“필립과 제니퍼는 어디 갔습니까?”
“반대편 동굴에서 우르카이 전사들의 난입을 막고 있습니다.”
그렌은 그의 한마디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시간이 지났죠?”
“하루는 족히 지났습니다.”
레인저의 말에 그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굴 입구로 걸어가 밖을 살폈다.
활활 불타오르던 불이 이제는 거의 다 꺼져가고 있었다.
물론 동굴 입구는 아직도 열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불이 꺼지기만 한다면 금세 우르카이들이 몰려올 것이다.
[마루: 일단 반대편 동굴부터 가보는 것이 좋겠어요.] [해모수: 내 생각도 그래요.] [그렌: 그러자.]그렌은 몸을 돌려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두운 동굴을 당당한 발걸음으로 걷자 레인저들은 모두 그렌의 뒷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라이트!”
메이스를 위로 치켜들고 작게 속삭였다.
그렌의 머리 위로 주먹만 한 빛의 공이 하나 둥실 떠올랐다.
[해모수: 그렌 아저씨, 그렇게 꼭 시동어를 소리 내서 말해야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예요?] [그렌: 꼭 그런 것은 아냐. 마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의지와 이미지니까.] [해모수: 그런데 왜 자꾸 소리를 내요?] [그렌: 글쎄? 집중하려다 보니까 어느새 버릇이 되어버린 것 같아.] [마루: 적에게 내가 무슨 마법을 쓸 거라고 미리 가르쳐 주는 것은 게임에서도 잘 안 하는 행동인데…….] [그렌: 그런가?]그렌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마루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굳이 상대에게 앞으로 자신이 무슨 마법을 쓸 것이라고 얘기해 줄 필요는 없었다.
다만 아직 혼돈 마법을 쓰는 게 익숙하지가 않았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소리를 내더라도 시동어를 외쳐야 할 것 같았다.
‘라이트!’
이번에는 마음속으로 시동어를 한번 외쳐봤다.
다행히 마법은 성공적으로 완성됐다.
빛의 공 하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두 개의 빛의 공은 주변을 대낮처럼 밝혀줬다.
[해모수: 잘되네요.] [그렌: 그러게.] [마루: 빛의 공을 허공에 두 개를 띄워놓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를 더 강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그렌: 해볼게.]그렌은 빛의 공 하나를 캔슬시켰다.
대신 처음에 소환한 빛의 공에 들어가는 마나의 양을 미세하게 조절했다.
그러자 빛의 공에서 더욱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와 동굴을 환하게 밝혔다.
[해모수: 아주 좋네요.] [마루: 밝으니까 좀 살 것 같다.] [그렌: 하하하!]그렌은 해모수와 마루의 말에 밝게 웃었다.
“어? 그렌 님이시다.”
“그렌 님이 오셨다.”
“이겼다.”
“이제 니들 다 죽었어.”
동굴 끝에 도착하니 그렌을 본 레인저와 용병들의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었다.
그렌은 일단 필립과 제니퍼를 찾아 아래로 내려갔다.
그렌의 모습을 본 레인저와 용병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위기를 맞은 전황은 급격히 안정되는 효과를 봤다.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우르카이 전사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우르카이 전사들이 지금도 동굴 안으로 들어오려고 기를 쓰며 구멍을 파대고 있었다.
“그렌 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제니퍼와 필립이 그렌에게 동시에 인사를 했다.
제니퍼는 몇 년 만에 집 나간 서방을 맞이한 표정이었다.
필립도 잔뜩 기대하고 있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살짝 고개를 한 번 숙인 그렌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한쪽 벽에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구멍 안에서는 우르카이 전사들이 안으로 난입하려고 미친 듯이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당장은 들어오려는 우르카이 전사보다 막고 있는 레인저와 용병들의 숫자가 훨씬 많아 괜찮았다.
그러나 여기서 더 구멍이 뚫린다면 버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이곳에 모인 레인저와 용병들은 이미 지친 티가 너무 난다는 점이었다.
그렌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지금 이 상황에 가장 쓰기 적합한 마법을 생각했다.
‘역시 땅 속성의 마법을 쓰는 게 가장 좋겠군.’
동굴이라는 특별한 환경 조건에 맞게 그가 쓰기 가장 좋은 마법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땅 속성인 대지의 마법이었다.
그렌은 머릿속에서 당장 생각나는 대지의 마법을 빠르게 떠올렸다.
그리스(Grease), 디그(Dig), 록 애로우(Rock Arrow), 스톤 핸드(Hand of stone), 스톤 스파이크(Stone Spike), 대지의 손(Hands of Earth), 대지의 분노(Fury of Earth), 어스 필드(Earth Field), 그라운드 오브 그레이브(Ground of Grave)…….
생각해 보니 종류가 무척 많았다.
하지만 곧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스.
디그.
록 애로우.
스톤 핸드.
스톤 스파이크.
이렇게 딱 다섯 가지가 그럭저럭 마나의 부담 없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그리스는 마법사들이 익히는 가장 기초적 마법 중 하나다.
땅의 마찰계수를 줄여 미끄러지게 만드는 마법이다.
디그는 말 그대로 구덩이를 파는 마법이다.
록 애로우는 돌화살로 적을 공격하는 마법.
스톤 핸드는 땅속에서 손이 나와 적을 붙잡게 만드는 마법.
스톤 스파이크는 날카로운 가시를 위로 솟구쳐 올려 적을 찌르게 하는 마법이다.
물론 대지의 손, 대지의 분노, 어스 필드, 그라운드 오브 그레이브 같은 마법도 아주 사용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효과는 탁월한 대신 그만큼 마나를 억수로 잡아먹는 마법들이다.
코피 쏟을 각오를 하고 모든 마나를 다 때려 넣으면 아마 한두 번은 가능할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지 않는 이상, 그렌은 쓰면 바로 리타이어(retire)되는 마법을 당장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벽에 뚫린 구멍 중에서 가장 커다란 구멍을 하나 골라 그 앞에 섰다.
손과 발을 꺾고 목과 허리를 돌리며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필립과 제니퍼를 비롯한 레인저와 용병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렌은 그들의 시선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그렌은 가볍게 그리스 마법을 시작으로 손을 풀어보기로 했다.
그렌이 메이스를 들어 우르카이 전사 한 놈을 가리키며 그리스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스!’
쿵!
우르카이 전사는 바로 중심을 잃고 그 자리에 자빠졌다.
그러자 그 우르카이 전사를 막던 레인저와 용병이 눈을 번뜩이더니 쏜살같이 달려가 창칼로 마구 내려찍었다.
쿠웨에에엑!
쓰러진 우르카이 전사는 곧 잘 다져진 돼지머리가 됐다.
물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동안의 용맹에 비춰보면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렌은 결과도 보지 않고 살짝 옆으로 몸을 돌렸다.
다른 구멍 안에 우르카이 전사가 보이자 지체 없이 메이스를 앞으로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