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71
71화
커다란 방패로 전면을 막고 있는 시에라 요새의 병사들이 그들을 보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방패를 열어라.”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힘을 내.”
당장 살길이 눈앞에 보이자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쏟아냈다.
천천히 열리고 있는 방패들 사이로 일행은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후다다다다다…….
시에라 요새의 병사들이 만들어 놓은 진형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일행은 모두 그 자리에 쓰러져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헥헥댔다.
“헤엑, 헤엑, 헤엑…….”
“후엑, 후엑, 후엑…….”
“헥헥헥…….”
이런 그들의 모습에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방진(方陣)을 구성한 시에라 요새의 병사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렌도 허리를 숙이고 가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장비한 기사 하나가 다가와 외쳤다.
“다들 수고가 많았다. 이들에게 마실 물과 먹을 것을 가져다줘라.”
십여 명의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병사들은 필립과 제니퍼를 비롯한 레인저와 용병들에게 물과 음식을 건넸다.
그들은 체면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물을 마시고 음식을 입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렌도 매일 먹는 육포가 아닌 제대로 된 음식을 보자 사양하지 않고 열심히 입에 넣었다.
그사이 기사는 필립과 제니퍼를 불러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들었다.
필립과 제니퍼는 처음부터 끝까지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렌을 간간이 쳐다보던 기사가 그들의 말을 듣자 놀란 얼굴을 하고는 서둘러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렌: 이거 어째 좀 귀찮아지겠는데…….] [마루: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그렌: 역시 그렇겠지?] [해모수: 2서클의 마법사보다는 3서클의 마법사가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겁니다. 당연히 돈도 많이 줄 테고요.] [그렌: 그거야 당연한 소리지.]마루와 해모수의 말대로였다.
그렌은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을 생각을 하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서클을 부숴가면서까지 모험을 강행했는데 정말 보기 좋게 성공했구나. 이 정도면 서클 마법으로 3서클의 수련 마법사는 되겠지. 혼돈 마법학 특유의 범용성으로 인해 아마 5서클의 마법까지는 사용할 수 있을 거야. 대량의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만 아니라면 4서클과 5서클의 마법 몇 개쯤은 미리 쓸 수 있도록 연습을 해놓아야겠다.’
그렌은 물로 입가심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렌 마법사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필립과 제니퍼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던 기사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카시오페라 중앙군 소속 기사 후텐입니다. 시에라 요새 부사령관이신 롤랑 남작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갑시다.”
그렌은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일행을 구하러 시에라 요새 병사를 이끌고 온 남작이다.
부사령관의 직책까지 달고 있는 사람이 부르는 것을 거절할 이유가 그에게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기사 후텐은 그렌이 화통하게 승낙하자 미소를 지으며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뒤를 따라가는 그의 눈에 우르카이족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는 시에라 요새의 병사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철저한 밀집 방어와 분업화된 역할!
톱니바퀴가 맞아 돌아가듯 움직이는 정교한 공격과 방어!
그들은 진짜 정예병이란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완벽한 병종과 진형의 조화를 선보였다.
아니 사실 완벽함 그 자체였다.
그렌은 저들이 최소한 5년에서 10년 이상 서로 손발을 맞춰본, 실전 경험이 풍부한 역전의 용사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시에라 요새에 대해 자신의 평가를 한 단계, 아니 두 단계 이상 더 끌어올렸다.
주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사방이 훤히 뚫린 군막(軍幕)!
부드럽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옷감과 정교한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갑옷!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중심에 사십 대 중반의 사내가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웬 포도주?’
그렌은 순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가 바로 시에라 요새 부사령관인 롤랑 남작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부사령관 각하! 그렌 마법사님을 모셔왔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네.”
무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얇고 고운 목소리에 이어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다른 병사들과 비슷한 군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화장기 없이 오밀조밀하게 생긴 예쁜 얼굴에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는 틀림없이 여자였다.
그것도 꽤나 아름다운 여자가 분명했다.
모르긴 해도 롤랑 남작의 수청을 드는 시녀가 아닐까 싶었다.
“그렌입니다.”
“어서 오시게. 이번에 큰 전공(戰功)을 세웠다더군.”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하하, 그거야말로 군인이 갖춰야 할 진정한 덕목이지.”
롤랑은 크게 웃으며 새 포도주 잔에 자신이 마시는 포도주병을 기울였다.
“마시게. 꽤나 귀한 것이라네.”
“감사합니다.”
롤랑이 반쯤 잔을 채우자 그렌은 사양하지 않고 포도주 잔을 들어 천천히 입가로 가져갔다.
단숨에 비워버리려던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마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렌은 마루가 포도주를 마시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자 곧바로 마시지 않고 먼저 냄새부터 한번 맡아봤다.
향긋한 포도주의 향이 콧속을 자극했다.
그는 잔을 살살 흔들다가 포도주를 딱 한 모금만 마시고 입에 머금었다.
그러곤 헹구듯이 천천히 입안으로 돌렸다.
그러자 어쩐지 포도주의 진한 맛이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자네는 포도주를 좀 마실 줄 아는 마법사군.”
“가끔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즐기는 편이긴 합니다.”
그렌은 괜히 너무 아는 척했다가 나중에 자신의 한계가 들통날까 봐 적당히 대꾸하고 넘어갔다.
“그리 앉게.”
“감사합니다.”
롤랑은 그렌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리를 권했다.
남작과 대작을 한다고 생각하자 그렌은 절로 가슴이 떨려왔다.
그렇다고 손을 떨거나 말을 더듬는 실수 따위는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보니 전투는 완전히 소강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제는 우르카이족도 포위를 풀고 한쪽에 모여 세를 과시했다.
대충 눈에 보이는 숫자만 천에 육박했다.
물론 그들을 상대하고 있는 이쪽의 병력도 천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우르카이족이었다.
“이제 대충 전력을 파악한 모양이군.”
“지금 전면전을 하려는 겁니까?”
“아니야. 우르카이족은 회피를 하려는 게야. 필승의 자신이 없이는 어떤 종족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지 않는 법이지. 거기에다 우리에게는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천 명의 정예병과 3서클 이상의 전투 마법사가 셋이나 있지. 저들이 전면전을 일으킨 순간, 우르카이족은 전멸할 거야. 물론 우리도 최소한 30퍼센트의 병력 손실이 있겠지. 하지만 뭐 그 정도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봐야지.”
그렌은 전면전이 벌어지면 300명이나 되는 정예병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는 롤랑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저렇게 침착할 수만 있다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우르카이족의 공격에도 절대 패배할 것 같지 않았다.
“잠시 쉬었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찔러보겠군.”
롤랑 남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르카이족이 썰물처럼 물러갔다.
그래도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는 철저히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전투가 멈추자 은빛 풀 플레이트 갑옷을 걸친 기사 각각 두 명씩에게 보호를 받고 있는 전투 마법사들이 롤랑이 있는 자리로 걸어 올라왔다.
그렌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신도 3서클이나 진배없는 마법사가 되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전투 마법사로 잔뼈가 굵은 선배 마법사들을 건방지게 앉아서 맞이할 간담은 없었다.
“어서들 오시게.”
“다녀왔습니다.”
“자리에 앉으시게. 마실 물과 식사를 가져오도록 하라.”
“예.”
롤랑 남작은 앉아서 전투 마법사 세 명을 맞았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그들을 호위하던 기사들은 일제히 롤랑 남작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한쪽에 마련된 그들만의 휴식 장소로 이동했다.
“그렌 마법사도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앉도록 하지?”
“네.”
그렌이 얌전히 자리에 앉자 롤랑은 그들에게 그렌을 소개했다.
“미르 용병단 소속 마법사 그렌이네. 이번에 3서클에 올랐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난 3서클의 전투 마법사 부트네라고 합니다.”
“3서클의 전투 마법사 스나가입니다.”
“4서클의 전투 마법사 멀핀이오. 반갑소.”
“프릴 마탑의 마법사 그렌입니다.”
그렌의 소개를 듣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렌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4서클의 전투 마법사인 멀핀에게 향했다.
부트네와 스나가를 보니 그들도 멀핀을 상전 대하듯 하고 있었다.
“자, 일단 좀 먹고 마시게. 조만간 또 한 번 내려가야 할 것 같으니…….”
“네, 남작님.”
“예.”
“그렇게 하죠.”
롤랑 남작의 말에 멀핀, 부트네, 스나가는 곧바로 긴 생머리의 예쁜 여자가 가져온 음식에 집중했다.
우르카이들의 간보기와 산발적인 전투로 인해 이들은 무척 시장한 상태였다.
음식이 나오자 세 명의 마법사는 열심히 포크와 나이프를 쓰며 식사를 했다.
잠시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와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그사이 롤랑은 그렌을 쳐다봤다.
“그렌 마법사는 계속 미르 용병단에 있을 예정이신가? 원하기만 하면 중앙군 소속으로 옮겨줄 용의도 있는데 말이야.”
“글쎄요. 아직은 소속을 따로 옮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시에라 요새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많이 낯설어서 말입니다.”
“그렇긴 하겠군. 하지만 언제든지 말만 하시게. 우리 시에라 요새의 중앙군은 언제든지 자네를 환영할 테니 말이야.”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롤랑 남작은 아예 대놓고 그렌을 영입하려고 했다.
그의 기사가 가져온 정보로 인해 그렌에 대한 가치를 꽤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멀핀, 부트네, 스나가는 롤랑 남작의 말에 흠칫 놀라더니 그렌을 묘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들은 롤랑 남작이 한 번도 마법사를 영입하기 위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참, 이번에 우르카이족이 공격해 오면 그렌 마법사도 같이 내려가서 상대해 줬으면 좋겠네. 저놈들에게 인간의 힘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꼭 보여주도록 하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렌은 롤랑 남작이 자신을 시험해 보려는 생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나를 테스트해 보시겠다? 뭐 원하는 대로 해주지. 3서클의 마법사들이 하는 캐스팅 속도에 맞춰 천천히 캐스팅을 하고 위력을 적당히 조절하면 되겠지.’
그렌은 동굴 안에서 이미 혼돈 마법의 위력에 대해 충분히 테스트했다.
마법을 발현하는 속도와 위력을 조절하는 것쯤이야 이제 그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에 더해 그는 3서클 마법사에 오를 만한 깨달음까지 얻은 상태였다.
비록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백전노장(百戰老將)의 전투 마법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3서클 마법사보다는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렌이 보여줘야 하는 것은 3서클 마법사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3서클 마법사의 수준에 맞춰서 자신의 실력을 적당히 선보이는 것이었다.
뿌우웅! 뿌우웅!
뿔 고동이 두 번 짧게 울렸다.
적들이 다가온다는 경보다.
뿌우웅! 뿌우웅! 뿌우웅!
곧이어 뿔 고동이 세 번 울렸다.
전투가 임박했다는 소리다.
물론 언덕 위의 군막에서 쉬고 있던 롤랑 남작과 전투 마법사들은 이미 눈으로 그런 모습을 전부 확인한 뒤였다.
하지만 그렌에게는 뿔 고동이 울리는 소리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진형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무척이나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멀핀, 부트네, 스나가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움직일 때가 된 것이다.
그렌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과 나란히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