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81
81화
해모수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 장계를 누가 썼는가?”
“제가 썼습니다.”
도강원이 묻자 이번에는 해대호가 대답을 했다.
도강원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 말은 이 안의 내용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느냐는 말일세.”
“그건…….”
“역시 내 생각대로군.”
해대호와 두 형제가 일제히 해모수를 쳐다보자 그제야 도강원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한 게 자네였지?”
“그렇습니다.”
“그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일단 이런 일은 듣는 귀가 적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감히 독대를 청합니다.”
해모수가 공손하게 독대를 요청했다.
순간 도강원의 뒤에 있는 개옥산이 분통을 터트렸다.
“뭐시라? 독대? 이놈이 호랑이 간을 삶아 먹었나? 감히 전령 주제에 정천호와 독대를 하겠다고?”
개옥산이 고함을 치자 두 명의 진무까지 눈을 부라리며 발작하려고 했다.
그러자 해모수는 오른손을 왼쪽 가슴으로 집어넣더니 품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도강원의 앞 탁자 위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이걸 먼저 한번 읽어보시고 결정하시지요.”
“으음.”
개옥산은 해모수가 도강원의 앞에 봉투를 꺼내 올려놓자 얼른 다가와 손으로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도강원에 의해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도강원이 개옥산보다 먼저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만! 됐으니 모두 나가있어.”
“네?”
“도 정천호!”
“혼자 계시면 위험합니다.”
도강원의 말에 개옥산과 두 명의 진무가 펄쩍 뛰었다.
하지만 도강원이 고개를 뒤로 돌려 인상을 한번 팍 쓰자 바로 고개를 숙이더니 밖으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해대호, 해상호, 해광호 삼 형제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이제 회의실에 남은 사람은 오직 도강원과 해모수뿐이었다.
“이걸 읽고 나서 내 마음이 흡족해지지 않는다면… 난 자네에게 아주 많이 실망하게 될 거야.”
“전 그 반대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하하하! 어린 친구가 정말 배포 하나는 대단하구나.”
도강원은 해모수의 대답에 화통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는 아까 본 장계처럼 밀봉이 되어있었다.
조심스럽게 열어보자 안에 또 다른 장계가 들어있었다.
도강원은 장계를 꺼내 활짝 펴곤 차분히 읽어보았다.
그의 표정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그러곤 이내 얼굴이 활짝 펴졌다.
마지막에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이거 정말 대단한 장계, 아니 걸작이로군.”
“도 정천호께선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다마다. 이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장계가 내 마음에 들 수 있단 말인가?”
도강원은 아까와는 달리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 것 같은 후련한 표정으로 해모수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호감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 장계대로라면 성산백호소의 전공은 모조리 우리 영율소가 가져가는 셈인데 정말 이대로 괜찮겠나? 아니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네.”
“저희 성산백호소의 전력으로 감히 무슨 전공을 세우겠습니까? 그저 영율소의 병사를 도와 힘껏 싸우는 시늉만 했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병사들이 좀 다치고 여러 가지 물자를 소비하긴 했지만 그거야 천호소인 영율소에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해결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해모수의 은근한 말투에 도강원은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이거 정말 내 마음에 딱 드는 인재를 발견했군. 아까 전령이 그 장계를 가지고 성산위로 가서 그대로 보고를 올렸다면 아마 난 큰 화를 면치 못했을 거야. 그걸 알고 미리 이런 장계를 준비했다는 것은… 분명히 나에게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겠지? 그러니 정말로 자네가, 아니 자네들이 내게 원하는 것이 뭔지 어서 말해보게.”
영율소의 정천호 도강원은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천호소의 지휘관에 오른 그가 멍청하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도강원은 분명히 해모수와 그 일당이 자신에게 뭔가 노리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해모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까 말씀드렸던 그것이 전부입니다. 굳이 한 가지 더 소망이 있다면 앞으로 저와 저희 형제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뒤를 좀 봐주십사 하는 겁니다.”
“정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겐가? 동현을 초토화시킨 왜구를 전멸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왜구의 관선을 나포한 전공까지 모조리 내게 넘기는 일인데… 아무것도 바라지 않다니? 이거야 원 부처님 반 토막도 아니고!”
은원(恩怨)이 확실하고 공사(公私)가 분명한 도강원!
그는 해모수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해모수는 도강원에게 성산백호소의 다친 병사와 소모된 군수품에 대해 말을 꺼냈다.
또한 앞으로 자신과 형제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달라고 간접적으로 부탁했다.
그러나 도강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의 보상만으로 자신이 받게 될 은혜를 덮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해모수는 계약서나 각서 따위를 쓰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구두(口頭)로 약간의 보상을 언급한 것이 전부였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저와 저희 형제들의 뒤를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희는 가문의 영광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흐음, 좋네. 자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내 나름대로 보상을 할 방법을 한번 찾아보겠네. 또한 성산백호소에서 소모한 전비와 군수품 일체는 당장 영율소에서 내주기로 하지.”
“감사합니다. 도 정천호!”
“하하하! 이 사람아! 감사는 내가 해야지. 그러고 보니 자네가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의 은인이 된 셈이군. 고맙네! 정말 고마워! 내 이 은혜는 반드시 잊지 않고 꼭 갚도록 하지.”
도강원은 얼마나 감동을 했는지 벌떡 일어나 해모수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흔들어 댔다.
영율소의 병사들이 동현 전투에서 대패를 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잘못하면 그의 목이 당장 떨어져 나가게 생겼다가 해모수를 만나 기사회생(起死回生)을 할 방도를 찾았으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해모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도강원은 성산백호소에서 가깝게 위치한 천호소인 영율소의 정천호다.
그런 그가 해모수와 형제들의 뒤를 봐주게 되면 앞으로의 행보에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물론 해모수를 비롯한 그의 형제들과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이 세운 전공을 아무런 대가 없이 도강원에게 넘기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당장 자신들이 소화시키기엔 너무 큰 먹이다.
괜히 혼자 다 먹으려다 체하면 뒤탈이 날 게 뻔하다.
그냥 지금은 이렇게 옆으로 흘려보내고 대신 미래를 위한 포석으로 생각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지나침은 부족함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괜히 욕심을 부리다가 후폭풍으로 늘씬 때려 맞는 것보단, 이렇게 중용(中庸)을 지키면서 온전히 보신(保身)에 힘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영율소의 정천호 도강원과 해모수가 일단 큰 틀에 합의를 하고 나자 나머지는 일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됐다.
성산백호소에 모아놓은 왜구들의 수급을 몽땅 넘겼다.
왜구의 관선도 아낌없이 양도했다.
혹시 나중에 사정을 발설할지 몰라 관선 안에서 사로잡은 왜구들의 목을 전부 베어버렸다.
심지어는 관선의 노를 젓는 포로들의 신병까지도 함께 인계했다.
영율소와 성산백호소에서 올리는 장계의 내용도 양쪽이 합의한 대로 다시 작성했다.
그들은 서로의 병사들에게 입단속을 철저히 하기로 약속했다.
대신 성산백호소 병사들의 전공 일부를 인정해서 포상을 해주기로 했다.
물론 병사들의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도강원이 직접 적절한 보상을 따로 내주기로 했다.
당연히 성산백호소에서 소모한 전비(戰費)와 군수품도 영율소에서 아주 넉넉히 계산해서 직접 가져다줬다.
도강원은 이것으로 모든 일을 그냥 끝내지 않았다.
초토화된 동현 마을의 유지의 집을 몰래 털어 챙긴 현금!
동현 마을 앞바다 모래사장에서 수거한 금은보화!
왜구의 관선 선창에서 획득한 보물!
그는 의리 있게도 이것들을 빼돌려 마련한 현금을 모두 해모수와 나눠 가졌다.
해모수는 생각보다 계산이 칼 같은 도강원의 뒤처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또 이런 좋은 호재가 생기면 같이 해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번 왜구의 동현 마을 초토화와 동현 마을 앞 전투를 통해 해모수와 해대호, 해상호, 해광호 삼 형제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금은보화는 물론이고 성산백호소 병사들의 믿음과 충성심도 얻었다.
영율소 정천호 도강원이라는 든든한 뒷배!
이걸 얻은 것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그 진가가 드러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형의 귀중한 재산이었다.
해모수는 궁기병으로 당장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여진 삼총사(퉁그란, 바토르, 차하루)를 수하로 얻어 기분이 아주 좋았다.
허나 모든 일이 다 그들의 생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성산백호소의 전공을 영율소에 양보하는 바람에 생각했던 것보다 포상이 상당히 적게 나왔다.
일부 병사들이 아주 실망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해모수는 즉각적으로 이 사태에 대처했다.
그는 형제들과 의논을 한 후 사재(私財)를 털었다.
포상이 부족한 병사들을 따로 모아 직접 현금으로 보상했다.
그러자 감동한 병사들의 충성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오히려 이 일로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의 사병(私兵)화가 가속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일이 잘 풀리려니 그 뒤로 호사가 겹치기 시작했다.
성산위에서 성산백호소의 전공을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했다.
또한 성산백호소의 중요성을 들어 병력을 배로 증강시키기로 했다.
그로 인해 당장 셋째 형인 해광호가 총기로 영전(榮轉)했다.
이로써 해모수의 첫째, 둘째, 셋째 형 모두가 총기가 됐다.
해모수도 소기에 임명됐다.
총기인 형들처럼 5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것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이제 10명을 지휘하는 분대장급 직위를 얻었다.
해모수는 소기가 되자마자 자신의 휘하로 퉁그란, 바토르, 차하루 셋과 궁기병으로 활약했던 홍유와 강조를 끌어들여 궁기병 부대를 편성했다.
증강된 병력만큼 매형인 장은철에게 무기와 방어구, 장비 등을 주문했다.
특히 개량궁과 개량 쇠뇌, 금속 화살촉을 대량 주문해서 많은 화살과 쇠뇌용 화살을 비축해 놓을 수 있었다.
또한 산탄포와 유탄도 일부 제작되어 조금씩 성산백호소에 실전 배치했다.
왜구에게 몰살당한 북현의 지역 유지 일가의 재산을 빼돌리는 일도 소리 소문 없이 은밀하고 빠르게 진행됐다.
성산위의 지휘첨사(指揮僉事) 왕규동으로부터 전체 수익의 1할에 해당하는 현물을 받았다.
물론 정말 1할이 맞는지는 누구도 확인해 줄 수 없었다.
다만 그저 그러려니 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당장 북현에 새로 얻은 집의 창고를 가득 채우고도 넘쳤다.
할 수 없이 빈방까지 모두 꽉 채워 넣고 자물쇠를 달아야만 했다.
[해모수: 이거 갑자기 재물이 너무 많이 들어오는데 어떡하죠?] [그렌: 좀 분산시켜 놓아야 하지 않을까?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담는 법이 아니라고 했잖아.] [마루: 그렌 형의 말이 맞아. 내 생각에는 매형 장은철이 살고 있는 문등현(文登縣)에 따로 거점을 세워야 해.] [해모수: 거점요?] [마루: 그래. 문등현은 북쪽에 위해위(威海衛), 동쪽에 성산위, 남쪽에 정해위(靖海衛)가 둘러싼 지역이라 북현이나 동현과는 달리 안전하고 그로 인해 앞으로 크게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먼저 그곳을 선점해야 해.] [그렌: 좋은 생각이다.] [마루: 일단은 문등현에서 시작해서 서쪽의 영해주(寧海州)로 뻗어가고, 나중에는 등주부(登州府), 내주부(萊州府), 청주부(靑州府)까지 세력을 확대할 계획을 머릿속에 두고 일을 진행해 봐.] [해모수: 정말 그게 가능할까요?] [마루: 안 될 게 뭐가 있어? 네가 살고 있는 곳은 힘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는 야만(野蠻)의 세상이야. 그러니 한번 네 꿈을 크게 펼쳐봐.] [해모수: 알겠어요. 일단 매형과 의논해 봐야겠어요.]해모수는 마루의 말에 크게 고무됐다.
그는 먼저 형제들과 간단히 의논을 한 다음 급한 대로 군마를 타고 문등현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뒤를 여진 삼총사인 퉁그란, 바토르, 차하루가 빠르게 쫓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