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82
82화
수전령이던 그는 이번에 소기가 되면서 휘하에 열 명의 병사를 두고 궁기병 부대를 편성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주변 정찰과 빠른 위기 대처 능력을 배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겠다는 속셈이라는 것을 모르는 해씨 형제들은 없었다.
해모수는 동현 전투에서 같이 싸웠던 홍유, 강조를 비롯해 퉁그란, 바토르, 차하루 그리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고려 유민 출신 병사 다섯 명을 선출해 휘하로 삼았다.
그가 없을 때는 뺨에 항상 홍조(紅潮)가 보이는 홍유를 부장(副長)으로 소기를 움직이게 했다.
그런데 의외로 홍유가 통솔력이 있어 그의 빈자리를 잘 메꿨다.
덕분에 해모수는 여진 삼총사를 호위로 삼고 하루가 멀다 하고 성산백호소 주변 사방을 열심히 말을 타고 싸돌아다녔다.
여진 삼총사는 워낙에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해모수에게 전혀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더 넓고 더 큰 세계로 나가 마음껏 달려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우두두두두!
이히히히힝, 히히힝, 이히힝!
문등현 동편.
새롭게 문을 연 은해철물점(銀海鐵物店) 앞으로 네 마리의 군마가 일제히 멈춰 섰다.
해모수와 그의 호위인 여진 삼총사를 태운 성산백호소의 군마들이다.
해모수는 말 위에서 가볍게 몸을 날려 땅으로 내려섰다.
그의 뒤를 따라 호위 셋이 차례로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해모수의 손에 들린 말의 고삐를 받았다.
“먼저 들어갈게.”
“예, 먼저 들어가세요.”
얼굴이 동그란 퉁그란이 웃는 낯으로 그의 말고삐를 잡으며 대답했다.
해모수는 그들에게 고개를 한번 까딱거리고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철물점 안에는 이번에 대장간을 이전해 확장, 개편한 철공소(鐵工所)에서 제작된 각종 철기와 농기구들이 보기 좋게 진열대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장은철은 계산대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해모수가 들어가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형, 저 왔어요.”
“어서 오시게. 해 소기! 참 복장이 잘 어울리는구먼.”
“하하하! 그러는 우리 장 점주(店主)께서도 새 철물점을 여시니 더욱 풍채가 좋아지셨습니다.”
“무하하하! 이게 다 잘난 막내 처남을 둔 복이 아니겠소?”
“맞습니다. 맞아요. 크헤헤헤!”
해모수와 장은철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상대를 띄워주면서 장난을 쳤다.
“공사다망(公私多忙)한 우리 막내 처남, 마침 잘 오셨네. 안 그래도 내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
“그래요? 저도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만.”
“그럼 잘됐군.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차라도 한잔하세. 당장 사람을 보내도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러죠.”
해모수는 장은철의 말에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에 새로 단장한 별채로 가세.”
“참, 저와 같이 온 호위병 셋이 있는데 방 하나만 내주세요. 기다릴 동안 좀 쉬라고 하게요. 그리고 먹을 것도 좀 챙겨줬으면 좋겠어요.”
“알겠어. 내가 사환을 보내 그리하라 이르겠네.”
“감사합니다.”
장은철은 사환(使喚) 둘을 불러 하나는 여진 삼총사를 데리고 방으로 데려가 먹고 쉬게 하고 다른 하나는 어디론가 급히 내보냈다.
별채에 도착한 해모수와 장은철은 원형 탁자에 마주 앉아 오붓하게 차를 마시며 얘기 보따리를 풀었다.
“매형, 장사는 잘됩니까?”
“자네 덕분에 대장간을 철공소로 확장했고, 이제 이렇게 은해철물점까지 열게 됐네. 장사가 잘되고 안 되고를 떠나 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네.”
장은철은 평생의 소원인 철물점을 크게 낸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한 듯 별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거금을 투자한 해모수는 단순히 철물점 문을 연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장사가 잘돼야 매형도 문등현에서 큰소리 떵떵 치면서 살 게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어디 이 정도 철물점을 가지고 있다고 감히 문등현에서 내가 큰소리나 칠 수 있겠는가!”
“그럼 더 큰 일을 하시면 되죠.”
“그게 무슨 말인가? 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가?”
워낙 깜짝깜짝 놀랄 일을 잘 만들어 가지고 오는 막내 처남이다.
장은철은 해모수의 말에 이번엔 또 무슨 일을 벌였나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에헴, 전 철물점 하나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주루(酒樓)를 열고 여각(旅閣)도 짓고 기회가 되면 상회(商會)나 상단(商團)도 조직하고, 또 무도관(武道館)도 한번 열어볼 생각입니다.”
“여각, 주루, 상회, 상단은 다 알겠는데 무도관은 웬 말인가? 혹시 자네 무술에도 관심이 많은가?”
“네, 관심이 좀 있습니다. 돈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무력을 행사하려면 무도관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난 도대체 막내 처남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일단 전에 자네가 말했던 조건에 합당한 사람을 찾은 것 같으니 도착하면 한번 의논해 보게나. 상단에서 잔뼈가 굵고 신용이 좋은 사람이니 아마 얘기가 잘 통할 거야.”
장은철은 평생을 쇠를 두들기던 사람이라 셈이 밝지 않았다.
그래서 상단 경험이 풍부하고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해 초빙한 것이다.
물론 해모수가 요청한 상재가 있는 집사라는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서 절대 쉽게 찾은 것은 아니었다.
“나리, 김만덕 방정을 모시고 왔습니다.”
“어서 안으로 뫼셔라!”
“네.”
밖에서 들려오는 사환의 목소리에 장은철은 점잖게 대답했다.
초빙한 사람이 예상한 시간보다 빨리 오자 그는 잘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해모수도 덩달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별채의 문이 열리고 온화한 인상을 가진 사십 대 중반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중년의 남자는 장은철을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해모수의 얼굴을 쳐다봤다.
점차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돌연 해모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김만덕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해모수입니다.”
해모수도 김만덕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허공에서 김만덕과 해모수의 눈이 마주쳤다.
김만덕은 해모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해모수도 이에 질세라 같이 미소를 지으며 김만덕을 찬찬히 살펴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딱 사람 좋아 보이는 동네 아저씨다.
그런데 눈을 보니 뭔가 느낌이 확 달랐다.
맑고 깊은 눈에서는 지혜와 세월의 경륜(經綸)이 보였고 가끔 번뜩이는 눈빛엔 총기가 가득했다.
해모수는, 아니 해모수의 몸속에서 김만덕을 지켜본 그렌과 마루는 절대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장은철이 얼른 김만덕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는 탁자로 이끌었다.
“자, 다 같이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천천히 얘기를 해보도록 합시다.”
“네.”
“예.”
세 사람은 둥근 원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장은철은 사환을 시켜 차를 내오게 하곤 이런저런 신변잡기(身邊雜記)를 얘기해 가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김만덕도 장은철의 의도를 간파했는지 그의 장단에 맞춰 편하게 말을 받았다.
사환이 새로 우려낸 차가 가득 담긴 찻주전자를 가져오자 장은철은 손수 김만덕과 해모수의 찻잔에 차를 따라줬다.
잘 빚어진 찻주전자에서 다향(茶香)이 물씬 풍기는 찻물이 쪼르륵 흘러나오자 김만덕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아마도 차를 무척 즐기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제가 정식으로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적당히 분위기가 익었다고 판단하자 장은철이 진지한 얼굴로 김만덕을 바라봤다.
“이쪽은 제 막내 처남으로 전에 말씀드린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반갑습니다. 소기 해모수입니다.”
“소기라면 혹시 군문(軍門)에 몸을 담고 계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본의 아니게 이런 신분이 됐습니다.”
김만덕은 해모수가 입은 복장과 자기소개를 통해 왜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지 단박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고용주는 군문에 몸이 묶인 사람인 것이다.
“그렇군요. 이제야 왜 저와 같은 사람을 찾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청해상회(淸海商會)에서 행수(行首)로 일하다 지금은 정해현(靖海縣) 신라방의 방정으로 있는 김만덕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김만덕과 해모수는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 행동 하나로 해모수는 김만덕이 자기와 일할 생각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런데 신라방이라면 혹시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자치구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저의 가계(家系)는 당대(唐代)에 신라에서 넘어와 이곳에 정착을 했습니다.”
“아직도 일대에 신라방이 많은가 봅니다.”
“이곳은 예로부터 백제가 다스리던 곳으로, 장보고(張保臯) 장군이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시절에는 신라인이 워낙 많아 당나라 땅인지 신라 땅인지 모를 정도로 크게 융성했습니다. 고려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 기세가 꺼지지 않아 등주(登州)를 중심으로 활발한 교류와 무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이 들어서자 해금정책으로 인해 각지의 신라인 촌락들을 통괄하며 자치(自治)를 영위했던 신라소(新羅所)는 유명무실해졌고 신라방의 영광도 이젠 다 옛말이 됐습니다.”
김만덕은 씁쓸한 표정으로 해모수의 질문에 대답했다.
문등현청에서 남으로 70여 리 떨어진 곳에 청녕향(靑寧鄕)이 있고 그곳에 신라인이 운영하는 자치기관인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해모수는 더 이상 김만덕이 신라방의 장(長)인 방정으로 있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청해상회의 행수로 일한 전력(前歷)에 대해 물어봤다.
“청해상회라면 일대에서 알아주는 상단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행수를 지내셨다면…….”
해모수가 뒷말을 흐리자 김만덕은 그의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서 청해상회는 현재 사분오열(四分五裂)된 상태입니다. 명나라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공신(功臣)들의 힘을 뒤에 업은 자들이 나타나 직간접적으로 청해상회를 압박해서 지분을 강탈해 갔습니다. 이후 경쟁 상단까지 지분 쟁탈전에 끼어들면서 예전의 명성을 다 까먹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과정에서 줄을 잘못 선 죄로 모든 권리와 지분을 잃고 떨어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사실 실의에 빠진 저는 그동안 낙향해서 술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오히려 얘기가 쉬워지겠습니다.”
“네에?”
김만덕은 해모수가 한 말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했다.
“제게 넉넉한 자금이 있고 김 행수께서는 천금보다 귀한 경험이 있으니 둘이 힘을 합치면 청해상회 같은 상단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평생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을 것 같았던 김만덕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청해상회가 얼마나 큰 상단인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까? 그와 같은 상단을 만들 자금이 있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워낙 거금을 만지시던 분이니 제가 가지고 있는 자금이 모자라다고 타박하지나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허나 일을 시작하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도방(都房)!”
해모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의도적으로 김만덕을 전 청해상회에서 가지고 있던 직책인 행수로 불렀는데 그는 바로 자신을 도방이라 불렀다.
이 당시 도방이란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상단이나 상회의 우두머리고 다른 하나는 무력 집단의 대장이란 뜻으로, 고려 중기 무신 정권의 집권자인 경대승이 최초로 조직한 개인 경호부대의 이름인 도방을 빗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자신과 뜻을 같이하겠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해모수는 김만덕에게 자신과 형제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를 해주고 앞으로 이것을 가지고 어떤 상단을 만들고, 어떻게 세력을 확대해 나갈지 의논했다.
김만덕은 해모수가 가지고 있다는 재물의 양에 크게 놀랐다.
또한, 그의 형제들이 성산백호소에서 총기로 있다는 말에 크게 고무됐다.
비록 백호나 정천호에 비하면 별거 아닌 부장(部將)에 불과한 장교 계급이다.
하지만 그래도 금력(金力)과 무력(武力)을 어느 정도 동시에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었다.
아직까지 명은 토호(土豪)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부정부패가 심한 위소라 지금이라도 적당히 여기저기 기름칠만 잘하면 정천호(正天戶: 정5품, 천호소의 지휘관)는 몰라도 정6품인 백호쯤은 얼마든지 밀어 올릴 자신이 있었다.
나중에 자리가 잡히면 정천호 바로 아래 자리인 종5품 부천호까지도 넘볼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