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83
83화
“으음.”
김만덕의 머리가 오랜만에 팽팽 돌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자금력이면 청해상회와는 비교하기 힘들어도, 어지간한 중소 상단으로 일으킬 자신이 있었다.
이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좋은 기회였다.
김만덕은 해모수의 밝게 빛나는 눈을 한번 쳐다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정으로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겁니까?”
해모수는 김만덕이 바로 핵심을 찔러오자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자를 믿고 모든 것을 말해도 괜찮을까?
자신의 큰 꿈을 이자와 함께할 수 있을까?
정말 대망(大望)을 이룰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해모수는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는 김만덕을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루와 그렌에게 도움을 청했다.
[해모수: 어떻게 하죠? 이 사람을 믿고 우리의 계획을 모두 말할까요?] [그렌: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했잖아. 항상 조심해야 해. 그런데 어쩐지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심복이 될 것 같다.] [마루: 굳이 모든 것을 다 얘기해 줄 필요는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아마 해모수를 진심으로 따르려고 하지 않을 거야. 신라의 장군으로 남해와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동북아의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면 되겠다.] [해모수: 네에? 나보고 장보고 장군 같은 사람이 되라고요?] [마루: 왜? 뭐 문제 있어? 기왕 시작했으면 그 정도 목표는 가지고 가야지.] [그렌: 장보고가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 [마루: 당시 당(唐)나라와 왜(倭)에서는 신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받은 일세(一世)의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해모수는 마루의 말에 살짝 충격을 먹은 듯싶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속 저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야망(野望)으로 인해 눈에서 불이 활활 불타올랐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의당 장보고 장군처럼 살다가 가야 멋진 인생이지. 내게는 미래를 모두 꿰뚫고 있는 마루 형과 이계의 마법사인 그렌 아저씨가 있다. 거기에다 퓨즈 오러 연공법을 통해 매일 조금씩 커지고 있는 오러의 힘도 있어. 이런 내가 영웅이 안 된다면 누가 영웅이 되겠어? 탁발승(托鉢僧) 주원장도 명나라를 세웠는데 나라고 나라를 못 세우라는 법도 없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해모수는 호연지기(浩然之氣)에서 시작해 야망으로 커졌다가, 이제는 나라를 세우는 일대 영웅이 되어보겠다는 망상(妄想)으로까지 급격히 발전하고 있었다.
“제가 이런 것을 묻기에는 아무래도 시기상조(時機尙早)였나 봅니다.”
“네? 아! 아닙니다.”
해모수는 자신이 깊이 생각하는 것을 보고 조금 오해하는 것 같은 김만덕의 말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바로 앞 탁자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이미 다 식어버린 차를 단번에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김만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얘기했다.
“제가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물으셨으니 저도 진심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난 해상왕 장보고 같은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악!”
“억, 장보고!”
김만덕은 놀라서 탄성을 터트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장은철도 장보고라는 말에 기겁을 하고 놀랐다.
해상왕 장보고가 누군가?
등주와 문등현이 있는 이곳 산동 일대의 신라인과 고려인들에게 그는 하나의 신처럼 여겨지는 영웅이다.
장보고의 해상 왕국 시대가 화려하게 열렸을 때 가장 큰 수혜를 입었던 곳 중 하나가 바로 등주의 신라 상인과 신라방이었다.
그러니 옛 신라의 후예들은 아직도 장보고의 이름을 잊지 못하고, 제2의 해상왕이 나타나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해모수가 대뜸 자신의 꿈이 장보고처럼 되는 것이라고 얘기를 하자 장은철과 김만덕은 진정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김만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탁자 옆으로 한 걸음 나오더니 해모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군, 저를 받아주십시오.”
“김 행수?”
장은철은 김만덕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라서 소리쳤다.
하지만 김만덕은 아예 작정이라도 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재차 같은 소리만 되풀이했다.
“주군, 저를 수하로 받아주십시오.”
“좋습니다. 김 행수께서 저의 장자방(張子房: 장량)이 되어주세요.”
해모수는 김만덕이 결심을 굳히고 등용을 요청하자 그의 등용 요청을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장량(張良)의 자는 자방(子房)이다.
한나라 고조 유방의 개국공신이고 책략가에다 군사가다.
해모수가 김만덕에게 자신의 장자방이 되어달라고 한 말은, 마치 유비가 제갈량에게 자신의 군사(軍師)가 되어달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김만덕, 앞으로 주군에게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군.”
“하하하,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해모수는 김만덕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김만덕은 해모수가 자신을 귀하게 대해주려는 마음을 먹은 것으로 보이자,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며 얼굴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해모수도 김만덕의 그런 얼굴을 쳐다보며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장은철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리 이렇게 서있지 말고 그만 앉아서 얘기합시다.”
“예, 주군.”
김만덕은 꼬박꼬박 해모수를 주군이라 불렀다.
해모수는 그가 부르는 호칭으로 인해 하늘을 둥실 떠다닐 듯 기분이 좋아졌다.
왜 사람들이 세력을 만들고 권력을 탐하는지 해모수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방금 전, 김만덕이 자신의 비밀을 다 듣고도 합류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의 목을 쳐버릴까 하는 독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과 뜻을 같이한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었다.
“주군, 혹시 미리 생각해 놓으신 밑그림이라도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김 군사에게 제가 생각한 계획들을 얘기하려고 했습니다.”
해모수는 마루와 그렌의 도움을 받아 나름 체계적이고 복잡한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런데 김만덕은 딱 한 번 듣고도 해모수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 모두 간파해 버렸다.
그는 끝까지 해모수의 얘기를 다 듣고 난 후에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주군의 계획은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 주군의 큰 그림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멋진 작품을 만들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벌써부터 제 어깨가 한층 가벼워지네요.”
“감사합니다. 한 가지 더 제가 감사를 드리고 싶은 것은 저를 군사로 불러주신 겁니다. 중용(重用)하겠다는 의미로 알고 몸이 가루가 되도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김만덕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해모수는 웃으며 농을 했다.
“몸이 가루가 되면 어떻게 충성을 다하겠습니까? 꼭 몸도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런 명(命)이라면 얼마든지 잘 쫓을 자신이 있습니다.”
김만덕은 호쾌하게 웃으면서 해모수의 말에 즐겁게 대답했다.
“앞으로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냥 군사라는 호칭으로 불러주시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행수나 그냥 집사로 불러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일단 김만덕은 간단히 자신의 호칭을 정리했다.
“주군의 계획을 들어보니 금력과 무력을 동시에 키우려고 하시는 것 같던데, 그러기에는 우리 둘만의 힘만으로 많이 부족합니다. 제가 인재를 몇 명 천거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맹자(孟子)의 공손추 편에 나오는 말로 ‘감히 청하지 못할지언정 그것을 마음속으로 바란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제 머릿속에 쓸 만한 인재가 몇 명 있습니다. 이들의 능력을 활용해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상회와 상단 그리고 무관을 여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미리 염두에 두고 계신 상단의 이름이 있습니까?”
“해동(海東)이란 이름을 쓰고 싶습니다.”
“아! 참 좋은 이름입니다. 그럼 앞으로 이 이름을 써서 해동상회(海東商會), 해동상단(海東商團), 해동무관(海東武館)을 열고 이들을 하나로 묶어서 해동연합(海東聯合)의 아래에 두겠습니다.”
“해동연합이라……. 참 좋군요.”
과연 김만덕은 뛰어난 인재였다.
해모수의 주먹구구식 계획을 듣고 금방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서 정리를 해버리니 말이다.
“내일 제가 천거한 인재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전 내일 해동연합을 만들 자금을 가지고 오도록 하죠.”
“아직은 많은 자금이 필요하지 않으니 천천히 가져오셔도 됩니다. 다만 등주의 포구(浦口)에 선착장(船着場)과 창고(倉庫)는 미리 확보를 해놓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 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모수는 당장 상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입니다. 배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도 그냥 일반 상선(商船)이 아닌 대형 상선을 구해야 합니다. 현재 명나라 동부 해안과 남부 해안은 왜구들의 등쌀로 몸살을 앓고 있으니 저렴한 가격으로 쓸 만한 대형 상선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거 모순(矛盾)이네요. 왜구로 인해 저렴한 가격에 대형 상선을 구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나중에 우리가 상행을 떠나면 결국 왜구들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볼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일반 상선으로는 안 되는 겁니다. 무장한 사병들을 태우고 다녀야하니 꼭 대형 상선, 그것도 여러 척으로 선단(船團)을 이뤄 움직여야 합니다.”
“음.”
김만덕의 말은 결국 무장상선(武裝商船)을 띄우자는 얘기다.
자체 무력만으로 해적과 싸울 수 있는 대형 무장상선을 준비해 선단을 꾸리고 바다로 상행을 나가겠다는 말인 것이다.
[해모수: 어휴! 이거 순식간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 이상으로 커져버리네요.] [마루: 아무리 자금이 많아도 당장 상선을 바다에 띄울 수 있는 게 아니야. 앞으로 무장상선으로 선단을 꾸리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그러니 미리부터 너무 겁먹지 않아도 돼.] [그렌: 마루의 말이 맞아. 당장 상회나 상단을 조직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무슨 걱정이야? 일단 내일 왜구의 관선에서 노획한 금은보화의 일부만 챙겨서 가져다주도록 해. 처음부터 너무 많이 퍼주면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해모수: 네, 그렇게 할게요.]해모수는 마루와 그렌의 조언을 듣고 나자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는 일단 김만덕을 해동연합과 해씨 가문의 집사(執事)로 임명했다.
그리고 조만간 등주에 해동연합의 근거지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문등현에 지점도 하나 설치하라고 했다.
나중에 해동연합이 자리를 잡으면 북현의 집을 문등현이나 아예 등주로 옮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날 해모수는 김만덕과 같이 저녁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오랫동안 깊고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 날 아침!
해모수는 같은 장소에서 김만덕이 데리고 온 인재들을 만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배명산입니다.”
“호설암이라 합니다.”
“임상욱이올시다.”
“반갑습니다. 난 해모수입니다.”
그들은 모두 웃으면서 서로 인사를 나눴다.
배명산, 호설암, 임상욱!
세 명은 모두 고려인으로 삼십 대 중반의 나이를 가지고 있었다.
얘기를 나눠보니 김만덕의 말대로 다들 각자의 분야에 관해 정통한 지식과 충분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해모수는 김만덕의 조언대로 이들을 각각 해동상회의 대행수(大行首), 해동상단의 대행수, 해동무관의 관주(館主)로 삼기로 했다.
참고로 해동연합의 직위 체계는 마루의 조언에 따라 6단계로 만들었다.
대방(大房): 회장, 최고 경영자
도방: 성급 관리자, 사장, 본부장
대행수: 주(州)·현(縣)의 점포를 총괄하는 책임자, 임원
행수: 점포의 책임자, 팀장
서기(書記): 회계
사환: 사원
배명산, 호설암, 임상욱 세 사람은 해모수의 대범한 일 처리에 놀라는 한편 김만덕과 같이 일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해모수는 이들과 큰 틀의 합의가 이뤄지자 곧바로 가지고 온 사업 자금을 김만덕에게 맡기고 연회를 베풀었다.
이제는 모두 한 식구가 되었다는 생각에 연회는 즐겁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될 해동연합의 모태가 만들어졌다.
해동연합 도방 해모수
해동연합 집사 김만덕
해동상회 대행수 배명산
해동상단 대행수 호설암
해동무관 관주 임상욱
아직 사람도 없고 조직도 미약한 해동연합이다.
그래서 김만덕이 대방으로 추대해도 한사코 고사했다.
하지만 해모수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처럼, 해동연합이 나중에 반드시 크게 흥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는 정말 떳떳하게 도방이 아닌 대방이 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그의 믿음대로 이루어질지는… 세월의 수레바퀴와 함께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