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87
87화
짐을 잔뜩 실은 늙은 말 두 마리를 무리의 중앙으로 끌고 왔다.
덮개를 열고 상자 안에 들어있는 죽폭을 꺼냈다.
말 등에 실린 짐은 전부 죽폭이었다.
“홍유, 죽폭으로 왜구의 지휘관을 노려! 그리고 나 대신 궁기병을 이끌고 지속적으로 유격전을 펼쳐라! 난 말을 타고 곧바로 목책 안으로 뚫고 들어가겠다.”
“네에?”
홍유는 해모수의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모수의 결심이 변하지는 않았다.
“잘 부탁한다.”
“예, 해 소기.”
“어서 죽폭에 불을 붙여줘!”
홍유는 해모수의 반짝이는 눈을 보자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이이익, 치이이익!
도화선에 불이 붙은 죽폭 두 개를 왼손에 쥔 해모수!
그는 오른손으로 말의 고삐를 잡고는 그대로 성산백호소를 향해 달려갔다.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그 모습에 궁기병들이 일제히 해모수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폭죽은 나중에 쓰더라도 일단 해모수의 뒤에서 화살은 날려야 했다.
그가 가는 앞길을 방해하는 놈들을 모조리 치워버릴 생각인 것이다.
자연히 궁기병 중 가장 기마술이 뛰어난 퉁그란, 바토르, 차하루 셋이 해모수의 뒤로 빠르게 따라붙어 화살을 쏘았다.
핑, 핑, 피잉!
“우리가 뒤에서 길을 열겠습니다.”
“곧바로 치고 들어가세요.”
“무운(武運)을 빕니다.”
“모두 고맙다.”
해모수는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려 여진 삼총사를 한 명씩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퉁그란, 바토르, 차하루의 얼굴을 마치 눈에다 박아버리겠다는 듯 쳐다보더니 슬쩍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잘근 깨문 해모수는 이내 쏜살처럼 앞으로 달려 나갔다.
갑자기 배후(背後)에서 기마들이 나타나자 사무라이 하나가 놀라서 고개를 휙 뒤로 돌렸다.
그러곤 주위의 왜구들에게 뭐라고 호통을 쳤다.
때마침 해모수의 뒤쪽에서 화살 두 개가 빠르게 쏘아져 날아왔다.
사무라이는 자신의 목과 가슴을 노리고 날아오는 화살에 놀라 급히 몸을 피하다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지는 추태를 보이지 않았다면 화살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을 거란 것을 그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렌: 해모수, 이대로 돌진하는 것은 너무 위험해! 얼른 오러를 몸에 둘러!] [마루: 맞아. 퓨즈 오러 연공법으로 수련한 너의 오러라면 왜구들의 창칼을 어느 정도 막아줄 수 있을 거야.] [해모수: 알겠어요.]해모수는 그렌과 마루의 말에 즉시 오러를 끌어 올렸다.
그의 의지에 따라 몸 안에 잠자고 있던 오러가 즉각 반응했다.
오러는 퓨즈 오러 연공법으로 단련된 오러 로드를 타고 전신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해모수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미약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순간 해모수는 모든 사물이 슬로우 비디오(Slow video)를 튼 것처럼 갑자기 느려지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시간이 느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뇌가 오러의 영향을 받아 고속으로 활동을 시작하자 시간이 마치 느려지는 것처럼 보이고 있는 것뿐이었다.
사물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그의 귀로 들려오던 온갖 소음이 전부 사라졌다.
이런 놀라운 현상은 해모수가 성산백호소의 무너진 목책을 뚫고 넘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해모수는 손으로 잡고 있는 말고삐를 놔버렸다.
왼손에 들린 죽폭 두 개 중 하나를 오른손으로 잡아 앞쪽을 향해 힘껏 던졌다.
죽폭은 자신이 봐도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는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남은 죽폭 하나를 마저 오른손에 쥐었다.
해모수는 성산백호소의 출입문 앞에 잔뜩 모여 목책을 힘껏 밀고 있는 왜구의 무리를 향해 남은 죽폭을 마저 던져버렸다.
쾅, 콰아앙!
거의 동시에 죽폭 두 개가 폭발했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굉음이 일어났다.
무너진 목책과 출입문 앞에 모여있던 두 무리의 왜구들 사이로 붉은 혈화(血花)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오는 모습이 너무도 기괴해 보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확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그들의 몸은 동심원을 그리며 일제히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한번 쓰러진 왜구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느려졌던 시간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온갖 소음이 해모수의 귓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는 헛바람을 삼켰다.
놀라서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자신의 군마의 고삐를 다시 단단히 잡았다.
“이랴! 이랴! 하앗! 하앗! 달려라! 달려!”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해모수의 간절한 바람을 들었는지 비틀대던 군마는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다시 속도를 내어 무너진 목책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군마는 힘차게 뒷발로 땅을 한번 굴렀다.
그러곤 이내 허공으로 그 커다란 덩치를 띄워 올렸다.
순간! 또다시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니 느려지는 것 같은 기이한 현상을 겪었다.
해모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허공을 훨훨 날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의 군마 아래!
왜구들이 놀란 얼굴로 사색이 된 채 몸을 숙이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왜구의 이마에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얼굴의 솜털 하나하나까지!
그의 눈에 생생하게 들어왔다.
‘대단하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냐?’
해모수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무너진 목책으로 어떻게든 들어오려고 발악을 하는 왜구!
커다란 방패로 틀어막고 있는 성산백호소 병사들의 얼굴!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보였다.
자신의 군마가 허공에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성산백호소의 병사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서 입이 천천히 벌어지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해모수는 순간 웃음이 나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손이 너무도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사고(思考)뿐이었다.
휘익! 쿵!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군마가 무너진 목책을 넘어 병사들의 머리 위를 지나 땅에 내려섰다.
말발굽이 대지를 울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동시에 시간이 느려진 것 같은 현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말이 달리는 격렬한 진동만이 온몸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워어, 워어!”
해모수는 즉시 고삐를 잡아당기며 외쳤다.
그러자 군마는 주인의 뜻을 알아채고 즉시 달려가던 속도를 줄였다.
“정말 수고했다.”
해모수는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감사의 인사말을 전했다.
그런 후, 미련 없이 말 등에서 훌쩍 몸을 날려 아래로 뛰어내렸다.
척!
단단한 대지에 두 발을 디디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사람은 땅에서 살아가는 동물인가 보다.
절로 자신감이 폭발하고 호연지기가 용솟음친다.
해모수는 자신의 오러를 다시 한번 온몸으로 확실하게 퍼뜨렸다.
군마의 등에 걸어놓은 창을 뽑아 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군영 안에 들어와 깽판을 치고 있는 왜구들의 숫자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왜구들이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은 너무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얏!”
해모수는 다엘 스텝을 펼쳐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크게 기합을 질렀다.
소리 없이 은밀하고 빠른 것이 장점인 다엘 스텝!
하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빠른 속도 하나뿐이었다.
평소에 자신을 잘 따르던 전령 하나!
왜구가 휘두르는 칼에 그의 목이 잘릴 위기에 놓여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키요오옷!”
왜구는 손에 쥔 칼을 옆으로 휘두르면서 기묘한 소리를 냈다.
해모수는 지체 없이 그 왜구에게 다가가 뒤통수에 창을 쑤셔 넣었다.
푹!
삶은 호박을 찌른 것 같았다.
그의 창은 너무도 쉽게 왜구의 머리통을 꿰뚫어 버렸다.
죽음을 직감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던 전령!
갑자기 왜구의 이마 앞에 창날이 불쑥 튀어나오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쨍그랑!
왜구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놈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제야 전령의 정신이 돌아왔다.
왜구의 모습 뒤에 감춰져 있던 해모수를 발견하곤 어떻게 된 상황인지 금방 이해했다.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인인 해모수에게 전령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해모수는 그런 전령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가서 위기에 처한 다른 병사들을 도와라!”
“예, 해 소기.”
전령은 손에 쥔 창을 다시 한번 힘차게 고쳐 잡았다.
그러곤 가까운 곳에 있는 왜구 한 놈을 노리고 힘차게 달려갔다.
죽을 뻔한 공포의 기억이 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그 전령은 원래 자신의 힘을 훨씬 상회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해모수도 그에 지지 않고 눈에 보이는 왜구를 향해 닥치는 대로 창을 휘둘렀다.
원래부터 몸이 호리호리해서 동작이 빠르고 민첩한 해모수다.
여기에 다엘 스텝의 은밀함과 빠르기가 더해졌다.
거기에다 온몸에 퍼진 오러로 인한 신체 강화 버프까지 받게 됐다.
이제 그의 움직임은 마치 선풍(旋風)처럼 거침이 없었다.
푹푹푹, 차창, 창, 창, 푹!
컥, 크악, 으악, 아아악!
해모수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피의 강이 흘러내렸다.
참혹한 비명이 스테레오, 아니 서라운드 입체음향으로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이미 신체가 범인의 경지를 넘어선 해모수!
그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신출귀몰(神出鬼沒)했다.
그가 창을 휘두르고 지나가는 곳은 어김없이 왜구가 쓰러졌다.
궁지(窮地)에 몰려 살길이 없어진 병사가 기사회생했다.
막다른 처지(處地)에 몰린 아군들도 위기에서 벗어났다.
병사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해모수를 향해 놀라움과 함께 고마움을 표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창칼을 들고 해모수의 옆에 서서 싸우기 시작했다.
해모수는 굳이 이런 병사들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이것은 아군의 사기를 자연스럽게 올리는 좋은 방법이다.
아니 보다 빠르게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첩경(捷徑: 지름길)이었다.
해모수와 병사들은 하나로 힘을 합쳤다.
성산백호소에 난입한 왜구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였다.
사기가 오르자 주변의 병사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움직임은 하나의 거센 파도가 되어갔다.
모두가 함께 이뤄낸 반격의 파도는 점점 사방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이에 휩쓸린 왜구들이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려났다.
그리던 어느 순간!
한꺼번에 휙 하고 싹 쓸려나갔다.
“우와아아아아!”
해모수의 활약으로 군영에 난입한 왜구들이 쓸려나가자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충천했다.
덕분에 해대호와 해상호, 해광호 삼 형제는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숨을 몇 번 쉴 수 있는 잠깐의 여유에 불과했다.
밖에는 아직도 성산백호소보다 최소 네 배는 더 많은 왜구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전열을 정비해라!”
“죽폭을 터뜨려라!”
“작열탄을 가져와라!”
“산탄포를 발사하라!”
“쓰러진 목책 위에 임시 방벽을 만들어 틀어막아라!”
위기에서 벗어난 해대호와 해상호가 냉정을 찾았다.
빠르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하자 성산백호소는 초반의 무질서함을 벗어나 조직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해모수는 도대체 아까는 왜 그런 위기를 겪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유야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당장 지금은 목책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왜구를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왜구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영문을 향해 달려갔다.
나무로 만든 계단을 나는 듯이 타고 올라간 해모수!
그는 영문 위에 우뚝 서서 전황을 살폈다.
[해모수: 제기랄, 그렇게 죽였는데도 아직 왜구들이 바퀴벌레처럼 바글바글하네.] [마루: 목책 안으로 왜구들만 난입하지 않았어도 방어에 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지금은 병력의 차이가 더 벌어졌어.] [그렌: 500 대 200을 예측했는데 400 대 160 정도로 바뀐 것 같군.]그렌의 말은 비율이 더 나빠졌다는 말이다.
왜구를 백여 명이나 죽였다.
하지만 성산백호소의 병사도 사십여 명이나 죽어서 결국 병력의 비율은 그만큼 더 커져버린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뒤로 합류하고 있는, 동현 해안가에 상륙해서 올라온 왜구들이다.
[해모수: 저길 보세요.] [마루: 못해도 삼백은 되겠는데.] [그렌: 맞아. 그럼 700 대 160이네. 제길 4.37:1의 비율이로군.] [마루: 비율이 지랄 같아도 공성 장비가 없는 왜구의 공격은 성벽에 의지해서 잘 방어하면 된다.] [그렌: 다른 곳은 돌과 바위로 잘 쌓아 단단한 성벽이 됐는데, 유독 군영의 출입구와 그 일대는 아직까지 통나무로 만든 목책으로 되어있네. 요새화를 조금만 더 서둘렀어도…….]그렌은 안타까운 탄식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이미 떠나버린 버스는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