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88
88화
[마루: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야.] [해모수: 그게 뭔데요?] [마루: 무조건 버티기! 끝까지 버텨서 살아남아야 해.] [그렌: 으음.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활용해 봐. 죽폭과 산탄포는 물론이고 시험 삼아 만들어 놓은 작열탄, 아직 몇 개 남아있는 원나라 때 만든 완형 청동포까지 다 써봐! 화약고에 있는 화약도 전부 사용하고 넉넉히 가지고 있는 화살과 쇠뇌도 전부 다 쏴버려. 어차피 죽으면 끝이니까 말이야.] [마루: 왜구의 특성상 버티면 물러가게 돼있어. 저놈들이 여기서 오래 시간을 뭉개고 있으면 있을수록 원군이 올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지?] [해모수: 네.]해모수는 마루와 그렌의 조언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렇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밖에서 궁기병 노릇을 하며 계속 왜구를 괴롭히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자신의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해대호, 해상호, 해광호 삼 형제의 목숨은 절대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모수는 죽기를 각오하고 형제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결단했다.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성산백호소 안으로 뛰어들었던 자신의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하면 이제 다 같이 죽는 거다.
적의 공격을 끝까지 버텨낸다면… 지금의 병력에서 최소한 반은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인으로 남의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은 너무 억울해서 안 되겠다. 이 중에는 분명 누군가의 아버지도 있고, 누군가의 남편과 오빠도 있을 것이다. 성산백호소의 병사 이백 명이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들 이백 명만 죽는 것이 아니야. 이들이 부양하고 있는 가족까지 합치면 무려 천 명이 넘는 목숨이 이 전투에 달려있어. 왜구의 공격은 반드시 내가 막는다.’
해모수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는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번뜩이며 목책 주변을 살펴봤다.
왜구들은 숫자의 우위를 앞세워 무식하게 목책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또 그것은 나름 효과가 있었다.
이런 왜구의 모습에 해모수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모두 활을 들고 적의 장수를 쏴라.”
“왼쪽 목책 아래로 죽폭을 터뜨려라.”
“산탄포를 발사하라!”
“작열탄 이리 가져와. 문 앞에 왜구들이 너무 몰렸다. 던져라!”
핑, 피피핑, 피피피핑…….
쾅, 콰앙, 쾅쾅쾅…….
펑, 화르르륵, 화아악…….
으아악, 크아악, 아악, 커헉…….
해모수의 명령에 따라 목책 위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죽폭이 날아와 터지고, 산탄포의 파편이 회오리치듯 몰아닥쳤다.
작열탄이 터지자 주변은 일순 불바다가 되었다.
왜구들은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질렀다.
폭발한 죽폭의 파편에 맞아 죽고 산탄포에 몸이 걸레짝이 되었다.
작열탄이 터지며 일어난 불길에 온몸이 끔직한 고통 속에 죽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구들은 조금도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신들이 불리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현대전(現代戰)에서 이런 전략을 구사했다면 인명 경시(人命輕視)라며 인권 단체들이 다들 들고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전범 재판소에 회부시킬 만한 만행이라며 입에 거품을 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현대가 아니다.
인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 야만의 시대였다.
[마루: 잘하고 있어. 무너진 목책 위에 임시 방벽을 세우고 오십 명의 병사가 달라붙어서 막고 있으니까 넌 영문만 잘 지키면 된다.] [그렌: 그때까지 목책이 잘 버텨줘야 하는데…….] [해모수: 만약에 목책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죠?] [마루: 그럼 모두 감시탑으로 도망가야지. 하지만 나무로 만든 감시탑은 불에 약해서 화공을 펼치면 모두 숯덩이가 되고 말 거야.] [해모수: 으음.]마루의 말에 해모수의 입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렌: 그것보다는 뒤쪽에 만들다 만 석축(石築: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 올린 벽) 위에서 끝까지 항전하는 것이 좋을 거야.] [마루: 높이가 겨우 어깨밖에 안 오는 석축 위에서 무슨 수로 네 배가 넘는 왜구들을 막아요?] [그렌: 그래도 감시탑에 들어가는 게 불에 타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마루: 하긴 그건 그러네요.] [해모수: 끄응.]마루와 그렌이 침통한 목소리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소리를 들은 해모수는 절대 목책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사무라이가 전격적으로 화공(火攻)을 결정한 것이다.
왜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곧 목책을 향해 기름 주머니가 쏟아졌다.
누군가 횃불을 던지고 불화살을 쐈다.
이제는 입장이 완전 반대가 됐다.
방어하는 쪽이 불을 끄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계속된 전투 속에 목책은 이미 헐거워질 대로 헐거워진 상태!
그 사이로 기름 주머니가 들어가고 불이 붙자 목책은 금세 커다란 화염을 일으키며 타들어 갔다.
화르르륵, 화르르륵!
거대한 화마가 단숨에 목책을 집어삼켰다.
검은 연기를 풀풀 내던 목책은 끝내 화끈하게 화염을 토해내며 활활 타올랐다.
목책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던 해모수와 병사들!
서둘러 안전거리로 물러나 허탈한 표정으로 그 불길을 바라봤다.
[해모수: 제기랄!] [마루: 기왕 이렇게 된 것, 군영의 본채를 뜯어서 불을 키워!] [해모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 손으로 불을 지르라니요.] [마루: 해모수, 정신 안 차릴래? 귓구멍 열고 내 말 잘 들어! 군영의 본채가 나무로 되어있으니까 다 뜯어서 계속 불을 지르라고. 불이 타오르는 동안에는 왜구들이 쳐들어오지 못하잖아.] [해모수: 그러다가 본채가 다 타버리면요?] [마루: 그땐 감시탑을 뜯어내!] [해모수: 네에?]해모수는 마루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렌은 오히려 마루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렌: 내 생각도 마루와 같아. 어차피 불이 꺼지면 다 죽은 목숨이야. 그러느니 차라리 성산백호소를 새로 짓는 한이 있더라도 불을 꺼트려선 안 돼!] [해모수: 아!]그제야 해모수는 그렌, 아니 마루가 한 말의 참뜻을 알아챘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최대한 시간을 벌라는 의미인 것이다.
해모수는 즉시 해대호에게 찾아가 자신의 생각이라고 쓰고, 마루의 작전이라고 읽는 고육지계를 털어놓았다.
해대호는 해모수의 말을 듣고는 화를 내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해모수가 차분하게 설득하자 곧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해상호와 해광호를 비롯해 소기들을 불러 모았다.
얼마 뒤, 목책이 활활 불타오르는 성산백호소의 본채가 뜯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책의 불길은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갑자기 불길이 아까보다 더욱 거세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해하던 사무라이!
궁지에 몰린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이 드디어 이성을 잃었다고 착각했다.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좋아하던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게 일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이것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끄는 지연작전임을 깨닫고 분통을 터트렸다.
“막간을 이용해 왜구들에게 화살이라도 좀 날려주자!”
“예.”
해모수는 도끼로 군영의 본채를 뜯어내며 쉬고 있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푹 쉬어 힘이 남아도는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왜구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일제히 활을 쐈다.
핑, 피피핑, 핑핑핑!
갑작스러운 기습에 왜구 몇 명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사무라이는 길길이 날뛰더니 곧바로 왜구의 진형을 수십 미터나 뒤로 물렸다.
그때를 기준으로 해모수 휘하의 궁기병들이 열심히 활을 쏘며 분탕질을 시작했다.
왜구들은 그로 인해 잠시도 쉬지 못했다.
그저 쥐 몰이를 하듯 열심히 뛰어다니며 체력을 방전시켰다.
“큰형님, 군영의 본채를 다 뜯어내면 감시탑을 뜯어내셔서라도 계속 불을 지피세요. 만약 감시탑까지 몽땅 뜯어내어 전투가 벌어진다면 반드시 석축 위에 장애물을 쌓아놓고 왜구를 막으셔야 합니다.”
“알겠다. 그런데 너 지금 어디 가려고 그러니?”
“네, 저는 밖으로 나가서 휘하 궁기병과 함께 힘을 합쳐서 왜구들과 싸우겠습니다.”
해대호는 해모수의 말에 입을 딱 벌렸다.
저렇게 활활 타오르는 불 속을 어떻게 뚫고 나가겠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설사 넘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그는 해모수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이 안에 갇혀있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오히려 해모수가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올라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해모수는 해대호를 비롯해서 해상호, 해광호의 몸을 한 번씩 끌어안았다.
그는 뜨거운 눈빛으로 병사들을 한 번씩 쭉 훑어봤다.
그런 후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과 투구를 벗기 시작했다.
몸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내갑까지 벗어 던진 해모수!
허리에 찬 환도(環刀)를 풀어 등에 비껴 멨다.
비표(飛鏢)가 꽂혀있는 가죽 주머니도 허리에 찼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그는 튼튼하게 생긴 긴 창을 들고 땅을 두드렸다.
퉁퉁!
청명한 소리가 대지에 울려 퍼졌다.
해모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목책을 향해 빠르게 질주했다.
눈은 불길이 가장 약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 바로 앞 땅바닥에 창을 콱 찍었다.
쿵!
땅을 내려찍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끝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힘을 주자 몸이 힘차게 위로 솟구쳤다.
창대가 부러질 듯 휘어지다가 간신히 바로 펴졌다.
해모수는 그 탄력을 이용해 수 미터나 되는 불길 위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넘어갔다.
긴 창은 허공에서 진저리를 치듯 떨어댔다.
그러더니 어느새 자신의 몸을 똑바로 곧추세우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와아아아아!”
해모수가 나는 새처럼 불길을 타고 넘어가자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이 일제히 큰 함성을 질렀다.
모두 한마음으로 그의 탈출을 기뻐해 주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해모수의 존재가 왜구들에게 대번에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밖으로 나오면 바로 발각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온 해모수는 급히 사방을 한번 쭉 훑어봤다.
왜구들이 그를 잡으려고 급히 포위망을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그물이 전부 튼튼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해모수는 왜구들이 제일 적게 보이는 곳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도도도도!
오러를 이용해 극상의 다엘 스텝을 펼쳤다.
해모수의 모습은 한마디로 눈이 부셨다.
왜구들은 자신의 바로 옆을 바람처럼 휙 하고 지나가는 해모수를, 입을 딱 벌린 채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뒤늦게 낭인무사들이 잡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애당초 허접한 왜구들에게 쉽게 뒤를 잡힐 해모수가 아니었다.
그래도 낭인무사들이 지르는 소리에 반응해 그의 앞을 가로막는 왜구들도 있었다.
휙휙, 휙휙휙!
어느 틈에 비표를 뽑았는지 해모수의 손에서 쏜살같이 비표가 날아갔다.
퍽퍽, 텅, 퍽퍽!
이마와 목에 비표가 꽂힌 왜구들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중에는 운 좋게도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에 비표가 맞아 목숨을 건진 놈도 있었다.
허나 그의 행운도 그를 끝까지 지켜주진 못했다.
촤앙! 서걱!
으으으윽!
해모수는 놀란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있는 왜구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빠르게 뽑은 환도가 사선을 그려내자 붉게 피 분수가 뿜어졌다.
경동맥이 잘려나간 왜구는 피의 무지개를 만들어 내는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멈춰라!”
“어딜 도망가느냐?”
“야! 이 비겁한 놈아!”
뒤에서 왜구들이 마구 소리를 치며 욕을 했다.
하지만 해모수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핑!
그때 머리 위로 화살 하나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해모수는 섬뜩한 느낌에 급히 몸을 낮추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왜구 한 놈이 자신의 몸만 한 활을 들고 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당장 쫓아가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이를 한번 꽉 물고 관목이 우거진 숲속을 향해 뛰어들었다.
“저놈은 전령이다. 쫓아가서 반드시 죽여라!”
“하이!”
뒤늦게 해모수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무라이가 또다시 길길이 날뛰었다.
아무래도 오늘 저 사무라이의 배역은 저렇게 난리를 피우는 것인가 보다.
낭인무사 열 명이 빠르게 달려서 해모수의 뒤를 쫓았다.
물론 그들의 완벽한 오해였다.
해모수는 당연히 전령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물론 전령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율소라면 모를까, 이미 전령을 통해 성산위에 원군을 요청한 것이 기각된 상태였다.
그러니 더 이상 전령을 보내는 것은 무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