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9
9화
[그렌: 저 파이럿 혜성은 진한 보라색의 혜성으로 해적선에서나 볼 수 있는 해골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기록이 있어.] [마루: 헉! 정말이네요. 천문학자들이 사진으로 촬영한 모습이 딱 해적선에 달린 그 해골 문양이에요.] [그렌: 마루!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해. 안 그럼 다 죽어.] [마루: 네에?]그렌은 아주 심각한 목소리로 마루에게 단호히 경고했다.
이렇게 되자 마루는 그렌의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렌이 자신에게 따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무서운 일이 지구에 반드시 생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혜성이 언제 지구에 도착하는지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마루: 한 달 남았네.] [그렌: 무슨 소리지?] [마루: 저 파이럿 혜성이 지구에 도착하는 게 딱 한 달 남았다는 말이에요.] [그렌: 다행히 아주 늦지는 않았군. 지금부터 착실하게 준비하면 마루와 마루의 가족만큼은 살 수 있겠어. 내가 도와주지.] [마루: 내가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데요?] [그렌: 생존을 위한 모든 준비를 시작해야지.] [마루: 네에?]마루는 그렌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가 망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생존을 위한 준비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렌은 아주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렌: 저 파이럿 혜성은 이 행성과 부딪치기 전에 산산조각이 날 거야. 그런 다음 죽음의 저주를 온 세상에 퍼트리겠지. 저주를 받은 자들은 죽게 될 것이고 죽어도 죽지 않는 상태로 더 많은 저주를 퍼트리게 될 거야.] [마루: 지금 혹시 좀비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렌: 좀비라는 말을 알고 있군. 맞아. 하지만 좀비라기보다는 저주받은 언데드 마물이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해.] [마루: 언데드(Undead)요?] [그렌: 당장은 내 말을 믿지 못하겠지. 사실 나도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어. 이건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벅찬 얘기니까. 하지만 만약 내 생각대로 빙의가 우리에게 로테이션된다면 마탑의 도서관 안에 있는 고서를 마루에게 직접 증거로 보여줄 수 있을 거야.] [마루: 정말 믿을 수 없는 얘기네요. 하지만 증거가 확실하다니 믿지 않을 수도 없겠죠.] [그렌: 파이럿 혜성이 떨어지기 전까지 아직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으니 적어도 일주일 전까지만 준비를 마치면 될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 마음 단단히 먹어야 돼.]해모수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놀랐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두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는 지금 빙의가 된 상태니 사실 숨을 전혀 쉬고 있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도 잠시, 같은 얘기가 계속 반복되자 곧 두 사람의 말에 흥미를 잃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문등현의 주루에서 일하면서 참 사람이 많이 모이는 번화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 강남 대로를 보니 문등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인파가 움직이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잠시 복수와 원한을 잊고 머리를 식힐 수 있게 됐다.
춘삼월이라 그런지, 강남 대로에서는 벌써부터 봄바람에 방심이 흔들린 처녀들이 노출이 심한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녔다.
해모수는 그런 벌거벗은 듯한 여자들의 몸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해모수는 둘의 대화에서 벗어나 겉돌고 있었다.
[마루: 일단 지금까지 한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질문을 할게요.] [그렌: 좋아.] [마루: 내가 무슨 준비를 해야 합니까?] [그렌: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뭐든 다 해야지. 하지만 당장 뭘 하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중에 기록을 확인하고 같이 의논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마루: 그래도 대충 뭘 준비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는 있잖아요?] [그렌: 음, 일단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의식주를 준비해야지.] [마루: 의식주요?] [그렌: 그다음은 저런 것을 배워둬야 하지 않을까?]그렌은 대형 LED 화면을 보고 말했다.
거기에선 MMA 이종격투기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마루: 이종격투기요?] [그렌: 저걸 이종격투기라고 부르나?] [마루: 네.] [그렌: 이름이 어찌 됐든 빨리 전투력을 올려야 해. 좀비와 싸울 줄 알아야 생존이 가능해지거든.] [마루: 그러니까 격투기를 배우라는 말이군요.] [그렌: 격투기? 체술(體術)을 말하는 건가? 그것도 좋지만 내 생각에는 검법이나 궁술 같은 것을 배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마루: 검법과 궁술요?]마루는 그렌의 말에 너무 놀라서 길 한복판에 멈춰 섰다.
뒤쪽에서 누군가 짜증을 내며 툭 밀고 지나갔다.
그제야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길 한쪽 옆으로 비켜났다.
[그렌: 맨몸보다는 당연히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 효과적이지.] [마루: 그럼 격투기보다는 검도(劍道)나 국궁(國弓)을 배워야겠군요. 마침 저기 그런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 하나 보이네요.]마루의 눈에 검도장 간판이 하나 들어왔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검도장 주변에 태권도, 유도, 합기도, 킥복싱, 특공 무술, 종합 격투기 등 각종 도장과 체육관들이 모여있었다.
[마루: 한번 가서 구경해 볼까요?] [그렌: 구경하는 거야 나쁘지 않지.]그렌이 흔쾌히 동의를 하자 마루는 용기를 내서 한번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군대에서 유격, 혹한기 훈련, 사단 훈련 등을 받았고 사격과 총검술도 배웠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격투기나 무술을 배운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검도나 국궁은 TV나 영화에서만 봤을 뿐이다.
제일 먼저 검도장을 찾았다.
회비가 15만 원에 죽도를 비롯한 장빗값을 합치니 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강남에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큰 부담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백수인 마루에게는 회비 15만 원도 무척 큰 부담이었다.
태권도, 유도, 합기도, 킥복싱, 특공 무술 등 각종 도장과 체육관을 다 돌아봐도 회비는 비슷했다. 대충 10~15만 원 선이었다.
‘강남이라서 그런가? 좀 비싸네. 과천이라면 좀 더 싸지 않을까? 아마 10만 원 이하도 많을 거야.’
결국 강남보다는 과천에서 다시 한번 싼 곳을 찾아보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렌: 이곳은 정말 좋은 곳이군. 돈만 내면 원하는 것을 다 배울 수 있다니 말이야.]그렌의 말에 마루는 차마 여기선 비싸서 배울 수 없겠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킥복싱 체육관을 마지막으로 마루는 빈 승강기를 탔다.
승강기가 아래로 내려가다 중간에 멈춰 서더니 문이 열렸다.
마루는 젊은 남녀가 안으로 들어오자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남자는 부티가 좌르르 흐르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눈빛이 영 불량한 것이 좀 노는 녀석 같았다.
그의 옆에 서있는 여자는 새하얀 피부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오밀조밀한 고운 선을 가진 동양적인 미인이었다.
둘은 아직 연인 사이는 아닌지, 살짝 거리를 두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승강기의 벽은 온통 거울이었다.
그녀를 향해 절로 시선이 가는 것을 막는 것도 나름 고생이었다.
“뭘 봐, 이 새끼야?”
그때였다.
대뜸 남자가 마루를 향해 욕을 했다.
마루는 느닷없이 시비를 거는 남자의 말투에 기분이 확 상했다.
하지만 별것 아닌 일로 괜히 싸우기 싫어서 그냥 못 들은 척 무시해 버렸다.
“시발, 좆도 아닌 새끼가 어딜 넘봐?”
남자는 그에게 눈을 부라리며 또다시 욕을 해댔다.
“하아!”
기가 막힌 마루의 입에서 절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딱 봐도 여자 앞에서 가오를 잡으려고 허세를 부리는 통수였다.
여자의 얼굴을 힐끗 한번 쳐다본 마루는 가만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말았다.
특이한 건 그녀였다.
마치 둘이 싸우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침묵했다.
다만 흥미로운 눈초리로 마루를 쳐다볼 뿐이었다.
문제는 그게 동행한 남자를 더 자극한다는 것이다.
점점 남자의 눈빛이 흉악해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마침 승강기 문이 열리자 마루는 즉시 승강기를 빠져나왔다.
더 이상 이런 또라이 새끼와는 상대하기 싫었던 것이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다.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빠른 걸음으로 건물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걸었다.
[해모수: 형! 조심해!]갑자기 해모수가 마루에게 큰 소리로 경고했다.
마루는 해모수의 말에 시선을 급히 옆으로 돌렸다.
커피 전문점의 유리창을 보자 그의 동공이 급격히 확대됐다.
승강기에 있던 남자가 그를 향해 난데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헛!”
놀란 마루는 급히 숨을 삼키며 몸을 낮췄다.
그러곤 즉시 앞으로 튕겨나갔다.
“이 새끼가?”
다다다다다다!
마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달려갔다.
남자는 마루가 도망치자 더욱 기가 살아서 쫓아왔다.
전면에 건물 옆으로 높은 경사로가 보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리로 뛰어 올라갔다.
건물의 벽이 온통 유리로 되어있었다.
마루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남자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경사로의 끝까지 단숨에 올라간 마루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몸을 돌려 아래쪽을 내려다보자 남자가 씩씩대며 올라오고 있었다.
저 남자가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는지는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지금 남자가 마루를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듯 거친 숨을 내쉬며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몸이 좋아졌어. 이런 경사로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올라오다니……. 숨이 하나도 가쁘지 않아. 어떻게 땀 한 방울 흘리고 않고 이럴 수가 있지?’
예전과 달라진 자신의 체력이 마음에 들었다.
마루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헤엑, 헤엑!”
얼마 되지 않는 거리다.
하지만 높은 경사로 인해 전력 질주로 달려오는 남자는 급속히 체력이 떨어졌다.
하루에 두 갑씩 꼬박꼬박 피워대는 담배.
그로 인해 남자는 지금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마루를 잡기만 하면 신나게 패줄 수 있다고 믿는지 꾸역꾸역 경사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루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돌연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달리는 속도와 위에서 내려가는 각도가 만났다.
무시할 수 없는 가속도가 붙어버렸다.
거기에다 마루는 자신의 체중까지 실었다.
다다다다다!
마루는 남자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어 발로 배를 뻥 차버렸다.
휙! 퍽!
“으아악!”
꽈당! 데굴데굴!
마루의 발길질 한 방에 남자는 뒤로 나자빠졌다.
그러고는 경사로를 데굴데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올라오는 속도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속도였다.
남자는 경사 끝에 쌓아놓은 음식물 쓰레기에 머리를 처박더니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윽, 이 비겁한 새끼!”
뭐가 비겁하다는 건지 마루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욕을 하질 않나?
느닷없이 뒤에서 주먹질을 하질 않나?
피하는데도 끝까지 따라와서 싸우려고 들지를 않나?
이제는 비겁하다며 욕까지 해댄다.
마루는 굳이 이런 개또라이 쌍놈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다가가 발로 사정없이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퍽! 퍽! 퍽!
딱 세 번을 차고 나자 남자는 죽는다고 비명 소리를 냈다.
더 이상 남자를 팼다간 어디 한군데 부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마루는 그대로 자리를 피해버렸다.
긴장과 흥분으로 인해 떨려오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골목으로 걸어갔다.
앞에서 남자의 일행인 여자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봐요?”
“…….”
그녀가 마루에게 말을 걸었다.
곱고 예쁜 목소리다.
마루는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한번 쳐다봤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그녀의 말을 깨끗이 무시한 채 그녀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개또라이 새끼와 같이 있던 여자다.
아니 분명히 이 여자도 정상은 아닐 것이다.
원래 다들 끼리끼리 노는 법이니까.
여자는 거침없이 손을 뻗어 마루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워낙 빠르게 빠져나가는 바람에 결국 잡을 수는 없었다.
묘한 표정을 지으며…….
멀어져 가는 마루의 뒷모습을 그녀는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 *
“마루야! 저녁 먹어라.”
“네, 들어가요.”
안채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마루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낮에 강남에 나갔다가 돌아온 그는 저녁 시간이 다 되도록 아버지를 도와 슈퍼에서 일을 했다.
크지 않은 동네 슈퍼다.
하지만 들여놓은 물건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일이 쉽게 끝나질 않았다.
“형! 그만 들어가서 저녁 먹어. 내가 교대해 줄게.”
“그래. 고맙다.”
마루는 남동생 재용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오자 싱긋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폈다.
우두두둑!
허리를 쫙 펴자 척추가 펴지면서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두 손을 하늘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런 후 목장갑을 벗고 안채로 들어갔다.
식탁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큰형과 막내 여동생이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