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92
92화
[그렌: 은원을 확실히 구분 짓는 것도 좋겠지. 저놈들이 왜 원군을 보내지 않았는지는 시간이 가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일단 복수는 접어두고 지금은 생존에 집중해.]마루와 그렌은 결국 같은 소리를 했다.
덕분에 해모수는 냉정을 회복했다.
고개를 돌려 입구를 쳐다봤다.
병사들이 돌아가면서 방패로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간간이 뒤쪽에서 창으로 쑤시고 화살을 날려대는 모습도 보였다.
피해는 일방적으로 왜구들만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구들은 어떻게든 입구를 뚫고 들어오려고 악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한쪽은 깎아낸 것 같은 바위벽이고, 다른 한쪽은 낭떠러지인 좁은 길이다.
방패로 막고 있는 병사들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모수는 고개를 돌려서 자신의 세 형이 지금 어디에 있나 찾아봤다.
해대호, 해상호, 해광호 삼 형제는 각각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뭔가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가만히 신경을 집중해서 들어보자 자신들이 처음 세운 계획대로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을 사병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미 생사를 가르는 전투를 함께한 전우들이었다.
그들도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 성산위, 아니 한족의 만행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해씨 삼 형제의 설득은 생각보다 쉽게 먹혀들어 갔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여 명 전원을 자신들과 함께할 사병으로 만드는 데 성공할 것이다.
‘이젠 정말 끝까지 버텨서 살아남는 일만 남았네.’
해모수는 형제들의 노고에 자신도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왜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사이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은 모두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삼십 분이 지나지 않아 왜구들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얼핏 밖을 내다보니 왜구들이 어디선가 커다란 통나무 하나를 깎아온 것이 보였다.
왜구들은 통나무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열을 짓고 통나무를 묶은 줄을 어깨에 걸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통나무를 공성 무기처럼 사용해 밀어붙이려는 계획이었다.
“단단한 방패 하나 줘봐! 내가 해결할게.”
해모수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굴이 네모나게 생긴 병사는 자신이 들고 있는 방패를 해모수에게 넘겼다.
해모수는 한 손으로 방패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여 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방패가 가벼워 오히려 살짝 놀랐다.
와아아아아!
왜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통나무를 앞세워 밀고 들어왔다.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다들 크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모수는 오히려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오러를 끌어 올려 전신으로 퍼트리더니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날카롭게 깎아놓은 통나무가 자신을 찌를 듯이 다가오자 그는 방패를 비스듬히 세워 통나무의 한쪽 면을 힘차게 후려갈겼다.
쾅!
얼마나 세게 쳤는지 방패 중앙이 움푹 안으로 함몰되어 버렸다.
덕분에 통나무는 제대로 힘을 받아 크게 흔들거렸다.
통나무의 앞쪽이 해모수의 힘에 밀려 바깥 낭떠러지 쪽으로 기울었다.
놀란 왜구들은 급히 벽을 향해 몸을 이동했다.
그 순간 해모수는 다시 오른손으로 통나무 앞쪽 끝을 잡고는 힘차게 벽을 향해 밀어버렸다.
쿠웅!
크아악, 으악, 아악, 커억…….
통나무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벽 쪽으로 움직였던 왜구들이다.
그런데 한쪽 열이 자신들이 지고 있던 무거운 통나무에 짓눌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갈비뼈가 부러져 장기를 찔렀는지 놈들은 입으로 붉은 선지피를 토해내며 쓰러졌다.
그로 인해 통나무는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통나무는 그들의 발을 찧어 이중으로 부상을 입혔다.
사고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거운 통나무는 벽에 부딪친 반동으로 바닥으로 떨어진 후 바깥쪽을 향해 굴러갔다.
아직 통나무를 묶은 끈을 어깨에 그대로 메고 있던 왜구의 다른 한쪽 열은 꼼짝없이 통나무와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아아악, 으아아악, 우아아악…….
쾅, 쿠당탕, 쿵쾅!
공포에 찬 비명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절벽 아래에서 통나무 구르는 굉음이 들려왔다.
뒤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왜구들은 공포에 질려 입을 딱 벌리고 해모수를 쳐다봤다.
“놈은 인간이 아니다.”
“사신이다.”
“전신이다.”
혼비백산한 왜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해모수를 보고 사신(死神)이라는 둥 전신(戦神)이라는 둥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
“와아아아아아!”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은 해모수가 일으킨 또 하나의 쾌거에 모두 두 손을 높이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낭인무사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아래로 내려와 바락바락 악을 쓰며 왜구들을 몰아붙였다.
“놈들은 독 안에 든 쥐와 같다. 일제히 공격해라!”
“모조리 죽여버려라.”
“죽어!”
낭인무사들이 뒤에서 칼을 꼬나 쥐고 소리를 쳤다.
왜구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곧 지옥을 향하는 급행열차를 탄 격이었다.
퉁, 퉁, 퉁, 퍽, 퍽, 퉁…….
으악, 어억, 으아악, 컥, 케엑, 아악…….
해모수는 입구에 딱 버티고 서서 달려오는 왜구들을 방패로 하나씩 밀어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방패를 피하는 놈은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패서 바깥쪽으로 던져버렸다.
굳이 죽일 필요도 없었다.
십여 명의 왜구들이 모두 허공을 잠깐 나는 기적을 행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단단한 바위와 돌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진 왜구들은 하나같이 수박 깨지는 소리를 내며 붉은 피와 허연 뇌수를 쏟아내고 이승을 하직했다.
“총공격!”
그러나 왜구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왜구들이 죽어가도 그들은 계속해서 안으로 달려들었다.
해모수는 수십 명의 왜구들이 죽음도 불사하고 끈질기게 달려들자 그 지독함에 살짝 기가 질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공격을 그냥 당해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다만 마루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알아버린 해모수!
그는 그들의 행동, 특히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무라이와 낭인무사들의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태도에 분노가 솟구쳤다.
“헉! 위에서 뭔가 내려온다.”
“위에서 왜구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온다.”
“저놈들이 활을 쏜다.”
“막아라!”
“우리도 활을 쏴서 대항해라.”
그때 절벽 위에서 우수수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줄을 타고 수십 명의 왜구들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해모수가 좁은 길에 딱 버티고 서서 철벽 방어를 해대자 왜구들도 나름 머리를 쓰고 있었다.
거기에다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온 길에서 왜구들이 자신의 키만 한 활을 들고 나란히 서서 위쪽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이렇게 양쪽으로 위협을 당하자 쉬고 있던 성산백호소의 남은 병사들이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왜구들의 공격에 대항했다.
“해모수, 입구는 병사들에게 맡기고 이쪽을 도와라!”
“네, 형님.”
해광호의 목소리에 해모수는 즉시 병사에게 방패를 돌려주고 안쪽 공터로 들어왔다.
어느새 왜구들이 하나둘씩 공터에 내려와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쏘아대는 화살은 위협적이다.
하지만 당장 절벽 위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왜구들을 처리하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해모수는 허리에 찬 환도를 뽑고 칼을 꼬나 쥔 왜구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갔다.
오러를 끌어 올려 온몸에 퍼트리고 다엘 스텝을 활성화하자 그의 움직임은 빠르고 은밀해졌다.
해모수의 환도가 허공에 춤을 췄다.
그에 화답한 붉은 꽃이 차례로 허공에 피어올랐다.
치명적인 그의 칼날이 사방에서 번쩍이며 무위(武威)를 드러냈다.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해 왜구들을 창칼로 마구 몰아붙였다.
힘으로 밀어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거나 합공을 해서 공격했다.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 대던 왜구들도 하나둘씩 차례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무사 수업을 받아온 사무라이가 아니다.
세상을 떠돌면서 칼 밥을 먹어온 낭인무사도 아니었다.
하물며 해적질이나 하는 일반 왜구들이 아무리 난전에 강하다 해도, 이미 오러의 힘을 각성한 해모수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거기에다 막다른 절벽 공터에 몰린 병사들의 필사적인 저항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용맹한 장수와 사기가 충천한 병사라고 해도, 결국 물량에는 장사 없었다.
위에서 끝없이 줄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왜구들과 입구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끈질기게 밀고 들어오는 왜구들로 인해, 결국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은 하나둘씩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특히 아래쪽 길에서 위를 향해 쏘아대는 왜구들의 화살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비록 같이 맞대응을 해서 활을 쏘는 놈들의 숫자를 줄이고는 있었지만…….
그걸 또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는 왜구들이라 여러모로 힘든 싸움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몇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전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해모수는 온 힘을 다해 왜구들을 베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혼자서 모든 왜구를 다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가 왜구 몇 놈을 쓰러뜨리는 사이!
다른 쪽에서는 왜구들의 공격에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입구를 공격하고 있는 왜구들 뒤쪽!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낭인무사 하나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의 부대에 엄청난 피해를 강요했던 놈들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모조리 죽게 될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방정맞은 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웅, 뿌우웅, 뿌룽뿌룽뿌룽!
뿔 나팔 소리를 들은 왜구들의 움직임이 순간 정지 화면이라도 된 것처럼 그대로 멈춰 섰다.
그들은 마치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즉시 몸을 돌려 썰물처럼 빠르게 물러났다.
이제 막 공터에 내려선 왜구들은 크게 당황하며 자신의 허리에 묶인 줄을 칼로 끊고 입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병사들은 입구를 틀어막고 공격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해모수가 손을 옆으로 흔들자 그냥 그대로 도망가게 내버려 뒀다.
“이게 무슨 일이래?”
“아무래도 왜구들이 후퇴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퇴각한다고?”
“그게 아니라면 누가 원군이라도 보낸 거겠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있는 해대호!
얼굴에 핏물이 묻어 손으로 닦고 있던 해상호!
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해모수, 조심해라!”
“네.”
해광호가 해모수를 향해 주의를 당부했다.
해모수는 해대호, 해상호, 해광호의 얼굴을 차례로 한 번씩 훑어보고는 좁은 길을 따라 빠르게 밖으로 달려갔다.
그의 뒤로 전령 넷이 동시에 따라붙었다.
“저희도 같이 가겠습니다.”
“좋아.”
전령들의 말에 해모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꼬불꼬불 휘어진 좁은 길을 따라 절벽 위로 올라갔다.
다 타버린 잔해만 무성한 성산백호소의 참혹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눈에 드러났다.
해모수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봤다.
타다 만 왜구들의 시체와 눈을 부릅뜨고 죽어있는 병사들의 시체가 뒤섞여 있는 모습에 그는 절로 욕지기가 올라왔다.
“저쪽입니다.”
“원군이다.”
“영율소의 병사들입니다.”
“살았습니다.”
전령 넷은 다 타버린 성산백호소의 영문 밖에 영율소의 병사 수십 명이 보이자 크게 기뻐했다.
“일단 가서 확인해 보자.”
“네.”
해모수는 빠르게 달려가 영율소의 병사들 앞에 섰다.
그들 중 하나가 영율소의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어? 생존자가 있다.”
“아직도 살아있는 병사가 있었네.”
영율소의 병사들은 해모수와 그의 뒤를 따라 달려온 전령들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미 성산백호소의 병사들이 전멸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성산백호소의 소기 해모수다. 영율소의 병사들인가?”
“그렇습니다.”
“영율소에서 원군을 보낸 것이냐?”
“그렇습니다. 정천호께서 직접 병력을 몰고 올라왔다가 퇴각하는 왜구들의 뒤를 쫓아 다시 내려가셨습니다.”
“그렇구나.”
해모수는 영율소의 병사들의 말을 듣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 소기, 어떻게 할까요?”
“당장 내려가서 병사들을 위로 올라오라고 해라.”
“네.”
전령 한 명이 빠르게 절벽 아래를 향해 달려갔다.
해모수는 영율소의 병사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해모수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휘하 궁기병들이 말을 타고 나는 듯이 달려왔다.
아홉 명의 궁기병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자 놀란 영율소의 병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