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94
94화
“전령이다. 도로 중앙을 비워!”
“다들 옆으로 물러나! 어서!”
“뭐 하고 있어. 빨리 저리 안 가!”
병사들 덕분에 전령들은 중간에 조금도 멈추지 않고 성문을 그대로 통과해 지나갔다.
‘무슨 일이 생겼나?’
갑작스러운 전령들의 출현에 다들 궁금증이 증폭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전령을 세워 물어볼 수가 없으니…….
소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검문도 재개됐다.
달카닥, 달카닥, 달카닥…….
이윽고 그렌이 탄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티오의 커다란 성문을 지나 외성 대로를 타고 돌았다.
주택가로 들어선 마차는 곧 아담한 여관 앞에 멈춰 섰다.
별빛이 머무는 언덕!
여관의 이름이 꽤나 시적이다.
그렌과 일행은 짐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이틀간의 여정을 함께한 마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마르코스가 수고비를 넉넉히 준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저희 여관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관의 문이 열리고 어린 점원이 쪼르르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들어가시죠. 여기서 며칠 묵을 겁니다.”
마르코스는 점원의 머리를 한번 헝클여 주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마르코스 단장님, 반갑습니다.”
“여어! 오티스! 그동안 잘 지냈나?”
마르코스는 구면인지 여관 주인과 반갑게 악수를 하고 포옹을 했다.
그사이 점원은 일행의 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렌은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 천천히 안을 향해 걸어갔다.
1층은 식당을 겸하고 있어 한쪽에 테이블을 놓아두었다.
아주 럭셔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후진 것도 아닌 평범한 여관.
그렌의 눈에는 이곳의 수준이 딱 그 정도로 보였다.
마르코스는 방을 세 개 빌렸다.
특실 하나와 일반실 두 개.
특실은 당연히 그렌의 차지였다.
일반실 두 개 중 하나는 제니퍼와 로즈에게 주고 나머지 하나는 마르코스가 쓰기로 했다.
그렌은 혼자만 특실을 쓰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제니퍼와 로즈 그리고 마르코스는 당연한 듯 굴었다.
“방에 들어가서 짐을 풀고 좀 쉬고 계세요. 전 용병 길드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렌을 위해 호위 기사를 구하는 게 급하긴 했는지 마르코스는 미처 대답도 듣기 전에 밖으로 빠져나갔다.
제니퍼와 로즈도 씻고 싶었는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얼른 방으로 올라갔다.
그렌도 자신의 방을 찾아 들어갔다.
자신의 모든 짐은 마법 주머니에 넣어둔 상태.
그래서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달랑 지팡이 하나뿐이었다.
특실은 제법 널찍했다.
중앙에는 큰 침대 하나, 창가에는 소파 세트가 놓여있었다.
안쪽으로 욕실 겸 화장실이 있어 굳이 밖으로 들락날락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한쪽에 지팡이를 세워두고 먼저 로브를 벗었다.
창가에 난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서 먼지를 탈탈 털었다.
땀에 찌든 옷과 갑옷을 벗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넘칠 듯 물이 찰랑이자 그렌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아아! 조오타.”
누가 아재 아니랄까 봐 열탕에 들어간 동네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낸다.
뜨거운 물이 온몸을 덮자 굳은 몸이 서서히 풀렸다.
나중에는 온몸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30분쯤 반신욕을 즐기고 밖으로 나왔다.
마법 주머니에서 새 옷과 속옷을 꺼내 입었다.
가죽 갑옷을 입고 그 위에 다시 로브를 걸쳤다.
여관을 빠져나온 그렌은 일단 상점가로 향했다.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히 볼일을 볼 생각이다.
물어물어 길을 찾아간 그는 프릴 마탑 에티오 지점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프릴 마탑 지점에서도 마법상점을 직접 운영하고 있는지 1층은 온통 휘황찬란한 마법 아이템으로 가득했다.
그는 입구에 선 채 눈으로 빠르게 1층을 한번 훑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로브를 입은 젊은 청년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본점에서 오신 분인가요?”
“본점?”
“아! 아니군요. 저희 프릴 마탑의 로브를 입고 계시길래…….”
청년은 손가락으로 그렌의 팔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그렌은 청년이 자신이 입은 로브 팔목에 새겨진 문양을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점이라면 프릴 마탑을 가리키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사실은 저도 프릴 마탑 출신의 마법사입니다.”
“역시 그랬군요.”
청년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저는 프라이입니다.”
“그렌입니다.”
그렌도 같이 고개를 숙이며 프라이가 입고 있는 로브의 팔목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했다.
‘2서클 마법사구나.’
젊은 나이에 벌써 2서클에 도달했다면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라 할 수 있다.
예전 같았으면 아마 많이 부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렌은 이미 3서클을 능가하는 마법사였다.
전혀 부러워할 리가 없었다.
“서클 갱신을 하러 왔습니다.”
그렌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프라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오오! 그럼 2서클이 되신 건가요?”
“아닙니다. 3서클입니다.”
“예에?”
예상했던 것보다 서클이 높아 좀 놀란 표정이다.
프라이는 이내 노골적으로 부러운 기색을 비쳤다.
마법사의 세계에서는 서클이 깡패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당장 프라이의 머리가 무겁게 아래로 처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2층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프라이는 아까보다 많이 정중해진 태도로 그렌을 안내했다.
그렌은 굳이 서클이 높다고 누군가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처음과 다름없이 프라이를 예의 있게 대했다.
계단을 타고 2층에 오르자 1층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매장이 나왔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지점장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프라이가 인사를 하고 내실로 사라졌다.
그렌은 2층 매장을 천천히 돌며 마법 아이템을 구경했다.
[해모수: 이야아! 이게 전부 마법을 쓸 수 있는 아이템이라니!] [마루: 겁나게 비싸 보이네요.] [그렌: 마루가 쓰는 말대로 아마 억 소리 좀 날 거야.]해모수와 마루는 난생처음 보는 마법상점이 무척 신기했다.
그렌도 사실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법사라고 크게 티를 내며 놀라진 않았다.
문제는 당장 마법 아이템을 사고 싶어도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 돈이 좀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정말 새 발의 피구나.’
없는 걸 아쉬워해 봤자 그저 마음만 아플 뿐이다.
그렌은 단호하게 아쉬움을 떨쳐버렸다.
그렇지만 진열된 각종 마법 아이템은 열심히 살펴봤다.
혹시라도 나중에 살 수 있는 능력이 되면 사려고 미리 봐두는 것이다.
“이분입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그렌은 몸을 돌렸다.
프라이의 옆에는 로브를 입은 초로의 노인이 보였다.
마나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4서클 이상의 마법사였다.
“안녕하십니까? 3서클 견습 마법사 그렌입니다.”
“반갑네. 난 4서클 중급 마법사 피라미라고 하네. 이곳 프릴 마탑 에티오 지점의 지점장을 맡고 있지.”
두 사람은 서로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마루는 이름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렌과 해모수는 그저 의문부호만 떠올렸다.
“프라이에게 들으니 이번에 3서클에 올랐다고?”
“네, 그렇습니다.”
“일단 같이 내실로 들어가세.”
그렌은 두말 않고 피라미 마법사를 따라갔다.
프라이도 같이 따라가서 구경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피라미가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
내실로 들어간 피라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단 서클부터 확인하겠네. 3서클 마법을 펼쳐보시게!”
그렌은 어떤 마법을 보여줄까 고민했다.
역시 3서클의 대표적인 마법인 파이어볼이 좋을 것 같았다.
“파이어볼을 펼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피라미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렌은 일부러 주문을 다 외우고 나서 천천히 시동어를 말했다.
“파이어볼!”
그의 오른손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어리 하나가 만들어졌다.
피라미는 냉정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파이어볼을 다루는 게 완숙한 경지에 다다랐어. 3서클에 오른 지는 얼마나 됐나?”
“그리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호오, 최근에 3서클에 올랐는데 파이어볼을 이 정도로 다룬다고!”
전혀 변할 것 같지 않던 피라미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게 생겼다.
“이상하군. 이 정도 인재를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저는 프릴 마탑의 도서관 사서였습니다.”
“아! 도서관 사서! 그래서 내가 몰랐군.”
피라미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축하하네. 마나의 은총을 받은 것을 프릴 마탑의 이름으로 확인했네.”
“감사합니다.”
“그럼 3서클이 된 증표로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하지.”
“네? 선물요?”
그렌의 어리벙벙한 표정을 본 피라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풋, 혹시 몰랐나?”
“예, 몰랐습니다.”
“하긴 도서관 사서라면 모를 수도 있겠군.”
피라미가 벽장에서 새 로브 하나를 꺼냈다.
그는 주머니에서 눈깔사탕만 한 마나석을 꺼내 로브 안 어딘가에 끼워 넣다.
그러곤 각인, 주인 인식, 위치 추적, 활성화 등 몇 가지 마법을 연달아 걸었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피라미는 로브를 그렌에게 내밀었다.
겉으로 보면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확실히 다른 점이 느껴졌다.
“이건…….”
“그저 팔목의 문양만 바꾼 로브가 아니야. 보다 강하고 질기고 방어력이 높은 마법진들이 인챈트되어 있지.”
“아아! 그렇군요.”
“각인 마법은 자네의 신분을 증명해 줄 걸세. 주인 인식 마법은 도적의 손에서 로브를 지킬 수 있고, 위치 추적 마법은 사용자가 죽으면 자동으로 마탑에 그 위치가 전송되네. 활성화 마법은 알다시피 지금부터 평범한 로브에서 마법 로브가 된 것을 의미하지.”
정말 로브 하나에 온갖 마법이 다 들어갔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렌은 로브의 속을 뒤집어 보았다.
안쪽으로 강화, 방어, 온도 조절, 무게 감소 등 다양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사실 3서클 견습 마법사 정도는 돼야 어디 가서 마법사 행세를 할 수가 있지. 그 전에 받은 로브와는 기능이 많이 다를 거야. 물론 가격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비싸지.”
“이건 얼마나 합니까?”
“설마 돈을 내겠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이건 프릴 마탑에서 주는 선물이야. 공짜란 말일세.”
“감사합니다.”
공짜라는 말에 그렌은 얼른 로브를 받아 챙겼다.
솔직한 그의 행동에 피라미는 오히려 정감을 느꼈다.
“그런데 에티오에는 어쩐 일인가?”
“이튼 영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미르 용병단이란 곳에서 용병 마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긴 일 때문에 잠시 들렀습니다.”
“으음, 그랬군. 젊은 시절 용병으로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아. 하지만 조심하게! 용병이란 놈들은 워낙 거친 자들이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주신 조언 뼈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말을 아주 재미있게 하는 친구로군.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세. 혹시 어려운 일 생기면 찾아오고.”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피라미의 말에 그렌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호감을 드러내며 도와주겠다고 하니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4서클 마법사에 프릴 마탑 지점장이라면 제법 어깨에 힘 좀 줄 수 있는 위치였던 것이다.
그렌은 피라미와 같이 조금 더 얘기를 나누다 내실을 벗어났다.
1층 매장으로 내려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프라이가 다가왔다.
이것저것 조심스럽게 묻는 폼이 아주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렌에게 프라이는 생판 처음 보는 남이었다.
낯선 자의 질문에 그는 굳이 일일이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렌은 창구로 가서 마법 시약과 하급 마나석 가루를 샀다.
메이스와 쇠뇌에 넣을 정제된 최하급 마나석도 두 개 샀다.
이것만으로 벌써 5골드가 날아갔다.
4서클 기본 마법이 담긴 마법서 사본도 마침내 살 수 있게 됐다.
가격은 무려 40골드.
정말 더럽게 비쌌다.
개당 최하 몇십 골드에서 몇백 골드나 한다는 마법 아이템을 척척 사재끼기에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였다.
프릴 마탑 에티오 지점을 나선 그렌은 궁전이 보이는 내성(內城)으로 향했다.
중앙의 넓은 대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내성 성문이 나타났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려고 하는데 내성 호위병들이 조심스럽게 그를 막았다.
로브를 입고 있는 걸 보고는 마법사라는 것을 짐작한 모양이다.
그렌은 한 손을 들어 라이트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손에서 빛의 구가 떠오르자 호위병들의 얼굴에 일제히 두려움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