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Trinity RAW novel - Chapter 97
97화
조급해지려는 그렌의 마음을 마루가 대신 잡아줬다.
그는 마루의 조언대로 대범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했다.
해모수는 정령이라는 존재에 푹 빠져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의 시간이 묵묵히 흘러갔다.
“좋아요.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하지만 3년 후에는 꼭 저를 풀어주셔야 해요.”
“물론이지. 나 마법사야. 그냥 말로만 끝내지는 않을 거야.”
“말로만 끝나지 않으면요?”
“우리 마법 계약서를 쓰자.”
“마법 계약서요?”
야엘은 그렌이 마법 계약서를 쓰자고 하자 깜짝 놀랐다.
그녀의 입장에선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마법상점에 갔다 올 테니까 그동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예.”
“아니다. 입을 옷도 사야 하니까 욕실에 가서 좀 씻고 한숨 자!”
“네에?”
그녀는 정말 깜짝 놀랐다.
이건 도저히 주인이 노예한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지만… 야엘에게 있어선 이토록 많이 놀란 날도 없었다.
그렌은 어둠의 정령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곤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나섰다.
그는 프릴 마탑 지점에 가서 마법 계약서 한 장을 샀다.
상점가에 들러 야엘이 편히 입을 수 있는 활동복과 가죽 신발도 샀다.
마루가 속옷도 꼭 사가라는 말에 속옷 가게에도 들렀다.
묘한 미소를 지으며 컵 사이즈를 묻는 여주인의 질문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던 건 덤이었다.
거북한 미소와 분위기를 이겨내며 간신히 여주인의 도움을 받아 속옷을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여관에 돌아와 보니 난리가 나있었다.
“그렌 님!”
“어머, 돌아오셨다.”
제니퍼와 로즈가 여관의 1층에서 그렌을 맞이했다.
둘은 마치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안기듯 다가왔다.
나긋나긋한 여체가 양쪽에서 감싸오자 그는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아니 어떻게 저희들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방에 있는 여자애는 누구예요?”
“설마 그새 사고를 치신 거예요?”
정신없이 들어오는 제니퍼와 로즈의 연타에 그렌은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마루가 대번에 상황을 파악하곤 빠르게 교통정리를 해줬다.
[마루: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두 사람의 어깨나 한번 두드려 주고 올라가세요.] [그렌: 정말 그래도 될까?] [마루: 당연히 되고말고요. 제니퍼와 로즈는 형의 아내나 여친이 아니에요. 특실에서 야엘을 본 것 가지고 따지고 드는 게 틀림없어요. 괜히 힘 빼지 마시고 올라가서 마무리나 잘하세요.] [그렌: 응, 알았어.]그렌은 마루의 조언대로 아무런 말도 없이 제니퍼와 로즈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 줬다.
그러곤 쌩하니 특실로 올라가 버렸다.
제니퍼와 로즈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감히 귀족의 반열에 오른 그렌의 발길을 막는 짓은 할 수 없었다.
둘 모두 자신들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엘!”
그렌이 방으로 들어와 야엘을 부르다 흠칫했다.
침대 위 이불 속, 고양이같이 웅크린 그녀가 커다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녀의 어깨 살이 다 드러나 있었다.
그렌의 말대로 샤워를 하고 한숨 잤던 모양이다.
“여기 야엘이 입을 옷 사왔어. 나는 잠시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갈아입어.”
“네.”
야엘의 목소리가 마치 모기 소리처럼 작게 울렸다.
그렌은 쇼핑백들을 탁자 위에 두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소변을 보고 손을 씻은 후 잠시 창밖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이제 나와도 된다는 소리가 들렸다.
“크흠.”
욕실 겸 화장실 밖으로 나온 그렌은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거적때기 같은 옷 대신 평범한 셔츠와 바지만 입었는데도 그녀의 미모가 폭발적으로 살아났다.
아무래도 야엘은 평생 투구를 쓰고 살 팔자가 아닌가 싶었다.
“옷 잘 입을게요. 고맙습니다.”
“그거 말고 다른 것도 있는데……. 아! 아니다.”
괜히 쓸데없이 속옷을 언급하다 마루가 급히 제지했다.
덕분에 그렌은 어색한 상황에 빠지진 않았다.
“신발은 잘 맞아?”
“네. 맞춤 신발처럼 꼭 맞아요.”
그렌은 속으로 마루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이제 그럼 마법 계약서를 작성해 볼까?”
“예.”
“기간은 3년이고, 야엘은 몸과 마음을 다해 나 그렌에게 봉사한다는 내용이야. 동의하지?”
“네에? 아! 네.”
야엘은 무슨 일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기사 출신이라서 호위 기사가 된다는 말에 크게 흥분이라도 한 모양이다.
물론 마루는 좀 다른 관점으로 의심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부수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야엘, 그런데 정말 과거에 기사였어? 호위 기사 잘할 수 있겠지?”
“당연하죠. 전 과거 모리스 왕국 빈 영지의 기사였어요. 부르나 왕국과의 전쟁에 차출됐다가 엘피스 산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됐어요.”
“기사라면 그래도 준남작 신분인데 영주가 몸값을 내주지 않았어?”
“그, 그게 좀… 사정이 있어요.”
처연한 얼굴에 눈이 붉어진 야엘!
그렌은 어렵게 털어놓은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전후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지에서 흔히 벌어지는 전형적인 클리셰(cliché)였다.
야엘의 미모를 질투한 영주 부인!
그녀의 간계로 인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야엘은 결국 노예로 팔려버렸다.
무척 안타까운 사정이었다.
하지만 그렌에게는 오히려 잘된, 아니 행운이었다.
“가족은?”
“전 고아예요. 어려서부터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영주님의 눈에 띄어 시녀가 되려고 영주성에 들어가게 됐는데… 거기서 돌아가신 스승님을 만났어요. 덕분에 전 기사가 될 수 있었죠.”
“고생이 많았겠군.”
“그건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네요.”
“알 것 같기도 하네.”
“…….”
“그럼 마법 계약서는 아까 얘기한 대로 작성할게.”
“예, 좋아요.”
야엘이 승낙하자 그렌은 마법 계약서를 꺼냈다.
그는 차분하게 두 사람이 합의한 내용을 마법 계약서에 적었다.
그렌과 야엘은 각자 자신의 피로 마법 계약서에 서명했다.
모든 순서가 끝나자 마법 계약서 안에서 하얀 빛이 솟구쳤다.
그 빛은 둘로 나뉘더니 그렌과 야엘의 가슴 속으로 각각 스며들었다.
이제 누구든 계약한 내용을 어기게 되면 심장이 터져 죽는 끔찍한 페널티가 적용될 것이다.
“야엘! 잘 부탁해!”
“아니에요. 제가 잘 부탁드려야지요.”
그렌이 인사를 하자 그녀도 같이 인사를 했다.
그는 야엘 같은 미녀, 아니 호위 기사를 얻어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녀도 그렌 같은 주인을 만나게 된 것을 행운이라 여겼다.
전에 주인이었던 놈들처럼 자신의 몸을 탐하는 추악한 욕망을 보이지 않았다.
남녀관계는 젬병인지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의 순수함이 엿보였다.
“이거 받아.”
“아!”
야엘은 그렌의 손에 들린 한 장의 증서를 보고는 입을 딱 벌렸다.
“정말 이거 제게 주시는 거예요?”
“응, 비록 내가 야엘을 돈 주고 산 주인이지만 난 호위 기사가 필요하지 노예가 필요한 게 아니야.”
“고맙습니다. 3년 동안 정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렌을 향해 충성 맹세를 했다.
야엘은 자신의 노예 증서를 곱게 접어 품속에 넣었다.
찢거나 태우는 것은 나중에 혼자 있을 때 하려는 모양이었다.
“이리 와봐!”
“네?”
“아직 하나 남았잖아.”
“아아!”
야엘은 천천히 그렌에게 다가갔다.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아니 좋은 체향이 풍겼다.
그렌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낮은 톤으로 말했다.
“노예 각인을 풀기 위해서는 심장에 가장 가까운 가슴에 손을 대야 해! 알고 있지?”
“네.”
“그럼 마음의 준비가 되면 얘기해 줘! 기다릴게.”
“아니에요. 지금 바로 해주세요.”
야엘은 작심을 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렌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떨리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녀의 가슴에 가져갔다.
야엘의 한없이 부드럽고 뭉클한 과육이 한 손 가득 잡혔다.
그녀의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그렌의 심장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숨이 거칠어지고 욕망이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그렌은 역시 마법사였다.
이성을 잃을 것만 같자 그는 급히 카오스 볼의 마나를 전신으로 휘돌렸다.
차가운 물속에 빠진 것처럼 그렌은 금세 냉정을 회복했다.
“크흠! 그럼 시작한다.”
“예!”
야엘은 작게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예쁘고 귀여워서 순간 꼭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러자 그렌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보니까 만지고 싶고 안고 싶었다.
자꾸 마음이 야릇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눈을 감으니 좀 나아졌다.
그는 이때다 싶어, 노예 각인이 새겨진 야엘의 심장에 자신의 마나를 밀어 넣었다.
수식에 맞춰 노예 각인 마법을 발동했다.
너무도 쉽게 노예 각인 마법이 해제됐다.
물론 언제든지 노예 각인 마법을 통해 다시 노예 각인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렌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이었다.
“아응!”
묘한 신음 소리가 귀에 들렸다.
노예 각인 마법을 해제할 때 일어난 마나의 유동이 야엘을 자극한 것이다.
그렌은 그제야 손안에 그녀의 소담한 과육이 잡혀있다는 걸 깨달았다.
또다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를 발휘했다.
유혹을 이겨내고 서둘러 야엘의 몸에서 손을 뗐다.
가만히 눈을 뜨자… 야엘이 몽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 자체가 그냥 아름다운 화보였다.
“괜찮아?”
“힘이 좀 없어요.”
그렌은 앞으로 쓰러지려는 야엘의 몸을 얼른 받았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한 줌도 되지 않는 허리를 잡고 공주님 안기로 드니 몸이 솜털처럼 가벼웠다.
“아무래도 야엘은 좀 쉬어야겠어.”
“죄송해요. 제가 지켜드려야 하는데…….”
“일단 몸부터 추스르고 나서 나중에 나를 지켜줘!”
“예, 꼭 그렇게 할게요. 죄송해요.”
그 말을 끝으로 야엘은 죽은 듯이 눈을 감았다.
놀라서 침대에 눕히자마자 코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다행히 그녀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다크! 네 주인 잘 지켜라.”
야엘의 머리맡으로 어둠의 정령 다크가 올라왔다.
그렌은 다크의 배를 손가락으로 쿡 한번 찌르고 몸을 일으켰다.
봉인되어 있던 그녀의 오러 홀이 서서히 풀리며 기지개를 켜는 게 느껴졌다.
역시 오러를 다루는 기사였다.
당장은 말라서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야엘이다.
하지만 제대로 오러가 활성화되고 나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질 것이다.
그렌은 야엘의 잠자는 모습을 잠시 지켜본 뒤 특실을 나섰다.
그런데 1층에 1남 2녀가 그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렌 님!”
그렌은 마르코스를 보자 한 손을 살짝 들어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제니퍼와 로즈를 향해있었다.
화가 단단히 났는지, 아니면 완전히 삐진 건지 잔뜩 토라진 티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그렌: 제니퍼와 로즈가 많이 화난 것 같아. 어떻게 하지?] [마루: 야엘에 대해 절대 핑계를 대려고 하지 말아요. 제니퍼와 로즈를 위로하려고 들지도 마요. 그냥 너희들 일이 아니니 상관 말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면 돼요. 이제 제니퍼와 로즈를 보지 말고 마르코스만 보면서 얘기하세요.] [그렌: 어! 알았어.]마루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실전에는 좀 약해도 이론으로는 마루를 당해낼 자가 없다고 장담했다.
이젠 그의 말을 믿어도 될 것 같다.
“제니퍼와 로즈한테 들었습니다. 특실에 여자를… 사람을 들였다고요?”
“호위 기사로 쓰려고 전쟁 노예를 구했습니다.”
“네에? 호위 기사요?”
호위 기사란 말에 마르코스가 반색했다.
안 그래도 그렌을 지켜줄 호위 기사를 구하지 못해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홀연히 호위 기사를 구해놨다고 하자 걱정보다는 안도의 한숨부터 나왔다.
“야엘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마법 계약서로 계약을 맺고 노예에서 풀어줬거든요.”
“그러셨군요. 헌데 확실히 기사는 맞습니까? 아니 기사급 능력을 가지고 있나요? 듣기로는 다 죽어가는 비쩍 마른 소녀라고 하던데요.”
“잘 못 먹어서 비쩍 마른 것은 사실입니다. 소녀도 아니고 다 큰 여자예요. 모르스 왕국 출신의 기사로 오러를 다룰 줄 압니다.”
“네에! 오러 기사란 말씀이십니까?”
“맞아요.”
마르코스는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