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05)
내게 빌어봐-105화(105/240)
“입이 왜 이렇게 험해? 뒷골목에서 굴러먹던 버릇을 아직도 못 버렸군.”
결국 참지 못하고 윽박질렀지만 실은 왕족이면 왕족답게 경박한 언행은 삼가라고 빈정대려다가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인내심을 발휘해 참은 것이었다.
레온은 여자의 머리를 덮은 담요를 걷어 냈다. 먹구름이 낀 얼굴을 보자마자 화가 좀 누그러진 그는 이성적인 대화를 해 보기로 했다.
“내게 화낼 일이 아니잖아. 난 네가 묻는 대로 진실을 말해 준 것뿐이야.”
그가 그간 수작질을 셀 수 없이 벌인 건 사실이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살다 살다 이렇게 억울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 네겐 모든 게 내 잘못이지.”
여자는 끝까지 그와 눈을 맞추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레온은 이 일은 잠시 제쳐 두기로 하고 여자의 목덜미로 손을 가져갔다. 개 목걸이가 단숨에 풀려나갔다.
“그러지 말고 따라와. 불꽃놀이가 곧 시작되니까.”
그레이스는 또 속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불꽃놀이를 보여 준다기에 적어도 별채 후원까진 데려가 줄 줄 알았다. 하지만 남자가 그녀를 데려온 곳은 제 침실이었다. 항상 교묘하게 거짓이 아닌 듯한 거짓말을 하는 남자에게 일말의 기대를 한 게 멍청했다.
“불꽃놀이는 됐어. 피곤해.”
남자의 침대가 제 침대인 양 파고들어 가려는데 그가 그레이스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줄 게 있다니까.”
이끌려 간 곳은 드레스 룸이었다. 남자는 두꺼운 커튼을 창문에 단단히 치고서야 전등을 켰다.
“하나씩 풀어 봐.”
드레스 룸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상자 더미는 대공녀가 아니라 그레이스의 것이었다. 요즘 냉대하더니 느닷없이 값비싼 선물을 산더미처럼 바치는 게 기가 막혔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주문해 두어서 물리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내게 선물 같은 건 왜 사 주는 거야?’
또 변태적인 자기만족을 위한 건가. 그녀는 귀찮은 일을 떠맡은 사람처럼 마지못해 상자를 열어 보았다. 선물을 하나씩 확인할수록 그레이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야하기 짝이 없는 란제리는 놀랍지도, 불쾌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허를 찌르고 불쾌하게 만든 건 여느 부자가 연인에게 흔히 선물할 법한, 꽤나 정상적인 물건들이었다.
갖가지 화장품, 금과 진주로 장식한 장신구, 자잘한 보석으로 치장된 실크 하이힐과 버드케이지 베일, 그리고 우아한 실크 드레스까지.
왜 제 약혼식에 개보다 못한 정부에게 값비싼 선물을, 그것도 몸단장에 쓸 선물을 주는 걸까.
조롱이라면 불쾌하고 진심이라면 거북했다.
상자를 모두 펼친 채 무표정하게 서 있기만 했다. 맞은편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녀를 구경하고 있던 남자가 방을 빙 돌아 등 뒤로 다가왔다.
베일이 달린 머리띠가 머리에 얹혔다. 얼굴의 반을 덮은 베일이 코끝을 간질이자 그레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는 그레이스의 턱 끝을 들어 올려 거울을 마주 보게 했다. 은은한 미소가 번지는 그의 얼굴 옆에서 그레이스의 얼굴은 한층 딱딱하게 굳어 갔다.
“네게 주려고 내가 손수 고른 거야.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 리가. 갇힌 여자에게 날개 모양의 금붙이와 깃털로 장식된 머리띠를 주다니.
“자, 이제부터 우리 둘이서 내 약혼을 축하하는 파티를 여는 거야.”
남자는 싸늘하게 식은 뺨에 뜨거운 입술을 짓누르더니 제가 사 준 것만 걸치고 나오라는 지시를 내리고 침실로 가 버렸다.
‘정작 광대 쇼는 내게 시키면서….’
그레이스는 가장 큰 상자에서 연한 크림색을 띠는 실크 드레스를 들어 올리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들 양, 그 자식이 그대와 너그럽게 결혼해 준다고 하더라도 흰 웨딩드레스는 입지 마시길. 넌 이제 순결하지 않으니까. 그러면 내가 가서 새빨갛게 물들여 줄 거야. 알겠어?”
그녀에게 어울리는 흰색은 제 정액의 빛깔뿐이라며 모욕하던 남자가 흰 드레스를 입히려 한다. 그것도 웨딩드레스를 닮은 드레스를, 하필이면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돌아와서.
그레이스는 불현듯 남자가 가장 작은 보석 상자는 주지 않고 숨겼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건 마치 약혼 축하 파티로 결혼식을 하자는 것 같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시중들 하녀를 불러 줘야 하나?”
침실에서 굵은 목소리가 흘러 들어와 그녀를 압박했다. 그레이스는 쓸데없는 생각을 관두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저자가 무슨 짓을 하려 들든 어차피 그레이스는 막을 힘이 없었다.
불이 꺼진 침실, 유일하게 어스름한 빛이 드는 창가에서 남자는 빛을 등진 채 앉아 있었다.
“이리 와.”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하이힐이 익숙하지 않아 불안하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한 발짝씩 다가갈수록 검게만 보이던 인영에서 명암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재킷은 어느새 벗고 흰 드레스 셔츠 위에 검은 베스트를 입은 모습이었다. 광대 같다던 보타이는 풀려나가 빳빳하게 세워진 셔츠 깃 둘레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다.
더는 다가가지 않고 침대와 창가의 사이에 멈춰 섰다. 남자가 손을 거두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길게 뻗은 검지에 관자놀이를 기댔다.
다리를 꼬고 앉은 바람에 위로 들린 검은 구두의 코가 창문에서 새어 들어온 빛을 받아 은빛으로 번뜩였다. 그녀를 감상하는 남자의 눈동자 또한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시더니 갑갑한지 제 목덜미로 손을 가져갔다.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푼 남자는 소맷부리의 커프스를 뺐다. 곧바로 소매를 접어 올리는 동작이 평소보다는 성마르게 보였다.
“한 바퀴 돌아 봐.”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여자가 천천히 제자리를 돌았다. 하늘하늘한 드레스 자락이 군살 없는 허벅지와 부러질 듯 얇은 발목을 스치며 사락사락,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흰 드레스는 가느다란 팔과 쇄골만을 노출한 채 아래로 길게 떨어지는 형태였다. 가운데에는 잎사귀와 나뭇가지 모양의 금빛 허리띠가 매여 잘록한 허리와 탐스럽게 불거진 골반의 굴곡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석과 고급스러운 실크가 창문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을 받아 은은히 반짝이며 여자 스스로 빛을 내는 것만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한마디로 여자는 신화 속의 여신 같았다.
이런 광경에 다른 이들은 혼자 보기 아깝다는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레온은 이 여자를 남에게 보여 주기 아깝다는 생각만 더욱 굳혔다.
“예쁘네.”
씁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다시 손을 내밀자 여자가 마지못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리를 굽힐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어울리지도 않는 검은 스타킹이 슬쩍 모습을 드러내며 우아함 그 자체인 여자가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양쪽 어깨를 고정한 금빛 장식 사이로 실크 자락이 깊은 포물선을 그렸다. 그 아래의 천은 여자의 몸에 착 달라붙어 윤곽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여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만한 살덩이가 크게 흔들리며 그 정점에 곤두선 돌기가 천을 부드럽게 긁었다.
“우리 자기 추워?”
그가 사 준 속옷은 얇디얇은 레이스 조각일 뿐이었다. 가려야 할 곳을 전혀 가리지 못하는 탓에 젖꼭지가 옷감을 뚫고 나올 기세로 솟은 것이 똑똑히 보였다.
“아니면 날 봐서 기쁜 건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자 여자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레온은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늘 벗겨 놓고 원할 때마다 거리낌 없이 보고 주무르던 몸이었다. 그 익숙하디익숙한 여체가 한두 겹의 얇은 천 뒤에 은근하게 숨겨진 모습이 색달라 보였다. 그간 한풀 꺾였던 정복욕이 오랜만에 끓어올랐다.
여자가 고작 한 걸음 남겨 두었을 때, 레온은 더는 참지 못했다. 부러질 듯 얇은 허리를 낚아채 허벅지 위에 앉히기 무섭게 뒷덜미를 움켜쥐고 입술을 집어삼켰다.
“흡….”
레온은 여자가 항복을 선언하고 그에게 얌전히 혀를 내어 줄 때까지 밀어붙였다. 은빛 실을 길게 늘어뜨리며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픽, 웃음을 흘렸다.
고작 키스 한 번에 밤새 광란의 파티를 벌인 꼴이 되다니. 새빨간 립스틱이 뭉개져 입술 밖으로 이리저리 번져 있었다.
레온은 손수건을 꺼내 여자의 입가에 번진 립스틱을 닦아 주었다. 제 입술에도 분명 묻었을 화장품을 닦아 내는데 왼쪽 입꼬리에서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상처가 다시 터진 모양이었다.
“자기야, 때리니까 속이 시원했어?”
여자가 여전히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으면 다행인데….”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손수건을 접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보는 사람마다 입술은 어쩌다 터졌냐고 물어서 곤란했잖아. 내가 다른 여자와 약혼하러 가는 걸 막으려고 정부가 때렸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