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20)
내게 빌어봐-120화(120/240)
“적당히 해.”
그는 배를 쓰다듬으며 아직은 느껴지지도 않는 아이를 나무랐다.
족쇄의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어느 새벽엔가 여자는 욕실까지 갈 힘도 내지 못해 침실 바닥에 주저앉아 속을 게워 냈다. 잠시 잠들었다 깬 그가 다급히 다가가자 여자가 물었다.
“행복해?”
지금 내가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냐고 되물으려던 그에게 여자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얼굴을 하곤 이런 말을 했다.
“내 고통이 곧 네 쾌락이잖아.”
아니.
그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또 한 번 같은 질문을 해 준다면 이젠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가끔은 네가 병약했으면 좋겠어. 그럼 훨씬 쉬웠을 텐데.”
아니, 전혀.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며칠 전이었다.
“저기….”
출근을 준비하는 그에게 여자가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나 먹고 싶은 게 있는데….”
이 별채에 가둬 두고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도록 여자는 그에게 무언가를 먹고 싶다며 부탁을 한 일이 없었다. 아이를 가진 후 스스로 먹을 의지를 보인 것도 처음이었다.
레온은 출근을 미루고 문을 열지도 않은 카페를 억지로 열게 해 여자가 먹고 싶다고 한 것을 구해 왔다.
아몬드 케이크가 대체 뭐라고. 여자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더니 충격적인 말을 했다.
“고마워.”
그러곤 몇 입 먹지도 못하고 게워 냈다. 토하다 토하다 지친 여자는 결국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에 깊이 박힌 것은 날 선 욕설이 아니라 무르디무른 감사의 말이었다.
고맙다니. 저를 가둬 둔 것도 모자라 억지로 임신까지 시킨 남자에게 고맙다니. 그것도 고작 케이크 하나 때문에.
그의 감옥에 갇힌 죄수 주제에 늘 당당하던 여자는 그렇게 망가졌다.
염원대로 여자를 무너뜨리고서야 레온은 깨달았다. 실은 이렇게 되길 진심으로 원한 적 없다는 걸.
“어서 기운 차려. 넌 날 물어뜯어야지.”
레온은 잠든 여자를 쓰다듬다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자국이 사라진 지 오래인 손이 유난히 허전해 보였다.
***
레온은 섬찟한 예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오늘 밤도 적중했다. 여자는 오늘 밤도 어김없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보이는 건 그늘진 뒷모습뿐이라 여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야윈 몸이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입덧에 이어 한밤중의 돌발 행동 또한 한 달째였다.
이 짓이 막 시작되었을 때, 여자는 밤마다 울었다. 아이처럼. 전혀 그가 알던 이 여자답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훌쩍이다, 잠에서 깬 그가 달래려 하면 흐느끼며 매달렸다.
“제발 나를 보내 줘.”
“내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가려고? 네 약혼자에게?”
그런 애원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도 남는 여자였다. 제정신이 아니란 증거였다.
여자는 곧 그럴 기력마저 사라졌는지 보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밤중의 울음도 애걸과 함께 멎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번은 오늘과 같은 기분 나쁜 예감에 눈을 뜨니 여자가 옆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텅 빈 눈이라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나를 죽이고 싶어?”
그렇게 물었지만 여자는 여느 때와 달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부턴 저렇게 등을 보이고 우두커니 앉아 있기 시작했다. 말리지 않으면 몇 시간이나 앉아 있다가 구역질이 시작되고서야 관두곤 했다.
어젯밤은 그러다 돌연 각오라도 한 듯 일어서는 여자를 저도 모르게 덥석 안아 침대에 눕혀 버렸다. 그러곤 이런 생각을 밤새 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도망치려 한 걸까.
죽음으로 도망치려 하는 걸까.
입덧은 어쩌면 이런 식으로 죽어서라도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여자의 의지가 몸으로 나타난 걸지도 모른다.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온 푸르스름한 달빛이 여자를 비추기 시작했다. 파리한 여자는 유령 같았다. 이대로 달빛 속으로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어젯밤 여자가 일어서던 순간처럼 레온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가지 마.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뼈만 남은 손목을 아프도록 쥐어도 여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문득 이 여자에게 매달리는 제 꼴이 눈에 들어왔다. 구차하기 짝이 없었다.
하다 하다 이젠 여자가 저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겁을 집어먹다니.
구차함을 넘어 미련하기까지 했다.
이 여자는 문밖으로 나갈 힘은커녕 목을 맬 올가미를 만들 기력조차 없는 걸 레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매일 아침 여자에게 한 입만 먹고 다 게워 낼 케이크를 사다 주며 물었다.
내일은 어떤 걸로?
기쁘게 웃을 수 있는 이 단 한순간을 위해 지옥 같은 하루를 한 번 더 버텨 주길 바랐다.
그러니까 그와 아이 때문에 죽고 싶어 하는 여자가 고작 케이크 때문에 살고 싶어 하길 바란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레온은 문득 깨달았다.
애초에 여자는 죽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죽고 싶어 한다는 것 또한 그의 망상일 뿐이었다.
망상에 사로잡힌 겁쟁이.
그게 지금 제 모습이었다.
권력, 돈, 협박. 어느 것 하나 무섭지 않은 그를 겁쟁이로 전락시킨 건 다름 아닌 저 보잘것없는 여자였다.
깨달음과 함께 분노가 갑작스레 치밀었다.
그가 요즘 하는 모든 짓은 과거의 자신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순수하던 그가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로 돌변한 건 이 여자 탓이었다. 당당하던 자신을 잃고 구차한 머저리로 전락한 것 또한 이 여자의 탓이었다.
그를 변하게 만든 건 항상 이 여자였다.
네가 뭔데 나를 멋대로 휘둘러. 너 따위가 감히 뭐기에 나를 비참하게 망가뜨려.
한 달 가까이 제대로 쉬지 못해 뿌연 머릿속에서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결국 레온은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오르는 기이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찌르르르.
귀뚜라미 소리가 지끈거리는 그의 머리를 울리자 레온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흐릿한데도 굳게 닫힌 철문 앞에 선 여자의 모습만은 또렷했다. 담벼락 양 끝에 설치된 조명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여자에게로 쏟아지는 탓이었다.
레온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선 여자를 암담한 눈으로 응시했다.
얇은 잠옷 위에 그의 트렌치코트만 입혀 데리고 나왔다. 레온에겐 무릎까지 오는 코트의 끝자락이 여자의 발목 위에서 나풀거렸다. 코트 자락과 슬리퍼 사이로 드러난 발목이 유독 가늘고 창백해 보였다.
이 보잘것없는 여자는 조금 전부터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저를 왜 갑자기 별채 정원으로, 그것도 별채의 유일한 탈출구 앞으로 데리고 나왔는지 묻는 눈빛이었다.
레온은 여자의 시선을 피하며 쇠창살 너머에 선 경비원에게 지시했다.
“열어.”
철문이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렸다. 여자의 퀭한 눈에 감돌던 의문이 자취를 감추고 생기가 조금씩 돌아왔다.
생기라니.
시체 같던 여자가 문이 열리자 살아나기 시작한다.
레온은 울컥 치미는 울화를 삼키며 여자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가.”
그의 입에서 절대 나올 리 없던 말이 토해 내어 진 순간, 여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레온은 당혹감이 어린 청록 빛 눈동자를 응시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가 버려.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제발.
어제 오후만 해도 굳건했던 확신이 흔들렸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간다고 믿었던 계획이 과연 자신의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레온 윈스턴답지 않은 이 길이 과연 스스로 선택한 자유의 길인 걸까, 어쩔 수 없이 내몰려 걷기 시작한 몰락의 길인 걸까.
조금 전 음산한 달빛 아래, 흰 잠옷을 입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여자의 뒷모습에서 레온은 전설을 떠올렸다. 캄캄한 밤, 흰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면 불행이 닥친다고 하던가.
그 옛날도, 지금도 완벽하던 그의 삶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언제나 이 여자가 있었다.
데이지, 샐리, 그리고 그레이스.
내 불행의 전조.
제발 사라져 버려.
…가?
그레이스는 한참을 같은 자리에 서서 ‘가.’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내가 아는 그 뜻이 맞는 걸까. 어쩌면 여기 갇혀 사는 사이 의미가 바뀌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건 무슨 수작일까.
그레이스는 저와 멀리 떨어져 선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어보고 싶었다. 가라는 말, 대체 무슨 뜻이냐고.
하지만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지친 낯빛만 보자면 마치 그녀를 포기한 사람 같았다.
포기라니.
저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복을 갖춰 입은 사내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레이스와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부 못 보던 얼굴들이었다.
내가 꿈을 꾸는 걸까.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바람이 불어왔다. 시린 발목을 낙엽이 스치는 찰나 그레이스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저 남자, 정말 그녀를 놓아주려 한다.
자유야. 난 자유야.
그레이스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찬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옷깃을 여몄다. 못지않게 떨리는 입술은 감격에 찬 울음이 새어 나오지 않게 꾹 다물었다.
제 배 속에 족쇄가 심어져 있다는 건 까맣게 잊은 채 그레이스는 자유를 향해 첫발을 뗐다.